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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우 Feb 24. 2021

12년 방콕 살이, 기억에 남는 순간들

강렬한 기억들이 모여서, 결국 삶이 되는 거니까요  

1. 아니 당신이 거기서 왜 나와? 서로 놀람


썽태우라고 태국식 마을버스가 있어요. 용달차나 미니 트럭을 개조해서, 양쪽 긴 의자에 쪼르르 앉아요. 요금은 우리 동네 경우 2밧 올라서 지금 10밧(370원)이에요. 한국 사람 둘이 타더라고요. 한국 사람 아닌 척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죠. 썽태우에서 한국 사람은 처음 봤어요. 우리 동네가 관광지도 아니고, 한국 사람은 택시를 타면 탔지, 썽태우는 잘 안 타거든요. 이 둘이 더듬더듬 선교를 하더라고요. 교회 나오라고 전단지를 돌리면서요. 아, 제발 나에게까지는 오지 마라.


-저, 한국 사람인데요. 죄송합니다.


전단지를 주려다가 깜짝 놀라더군요. 그러면서 또 반가워하더라고요. 저는 사실 안 반가운데, 어정쩡하게 웃고 말았어요. 나중에 동네 카페에서 절 알아보고, 너무 반갑게 인사를 하더군요. 썽태우에서 한국 사람 만날 확률, 남의 나라에서 선교하는데 트럭 버스에서 한국인을 만날 확률.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날 확률. 생각해 보면, 어마어마한 날이었던 거였어요.


2. 꽃미남 한국 청년, 닭꼬치 팔다


제가 사는 단지 앞에서 꼬치를 파는 거예요. 아주 잘 생긴 청년이 여자 친구랑 파는데, 여자 손님들이 그렇게나 많더군요. 혹시 맛있기까지 한 건가? 궁금하더라고요.


-어, 한국 사람이시네요?


저도 한국 사람일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한국 사람 맞더라고요. 서로 놀랐죠. 게다가 바로 옆 아파트에 사는 거예요. 발코니에 나와서 통화를 하다가, 저를 발견하고는 2층에서 인사까지 하더라고요. 이웃사촌이 된 거죠. 한국 청년이 태국 여자 만나서 방콕에서 정착. 그런 경우는 흔하디 흔한데, 꼬치를 파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살짝 궁금하기도 했는데, 안 궁금한 게 더 크더라고요. 저의 평화로운 고립이 무너질까 봐서요. 꼬치 장사를 오래 했다면,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도 있었겠죠. 한 달 정도 하고는 안 보이더라고요. 꽃미남이 사라졌다 이거지? 거울아, 거울아. 이 동네에서 제일 잘 생긴 한국인은 누구니? 네가 1등은 아니지만, 등수가 하나는 올라갔단다. 제 거울이 이렇게나 똑똑하답니다.


3. 난생처음 헌팅을 당해 봄


쇼핑몰에서 여자 둘이 말을 거는 거예요. 어디서 왔냐? 이름이 뭐냐? 좀 불편하더라고요. 답만 해주고, 자리를 피하려는데 자기 집에 가자는 거예요. 인도네시아에서 놀러 왔는데, 심심하다면서요. 밥을 해주고 싶다고요.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모르는 사람 쫓아가서 밥을 얻어먹겠어요? 이슬람교로 개종을 시키고 싶은 걸까요?


-너무, 잘 생겼어요.


끝내 거절하는 저에게, 치명적인 칭찬을 날리더군요. 종교인이건, 다단계 판매원이건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요? 잘 생겼다는 이야기 분명히 들었고, 엄연히 헌팅을 당했으니 저는 진실만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인도네시아에서 먹히는 얼굴인가? 태국 다음은 인도네시아다. 이런 고민을 아예 안 한 건 아닙니다만. 허허


4. 세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자와 1분 대화, 그리고 까임


제가 태국 어학원을 몇 달 다닌 적 있어요. 그때 학원에 미스 캐나다이자, 미스 유니버스인 여자가 다녔어요. 같은 반인 적은 없었고요. 우리나라 박지성, 손흥민 선수 이상의 국민운동 선수가 태국에도 있어요. 파라돈 스리차판이라는 테니스 선수죠. 세계 랭킹 9위까지 올랐어요. 파라돈과 이혼 후에도 계속 태국에 살더라고요. 학원 가는 길에, 그 미스 유니버스가 보이더라고요. 말이라도 한 번 걸어보면, 굉장히 영광이겠다. 그런 생각이 당연히 들지 않겠어요? 그래서 애초부터 미국 사람인양, 헤이, 하와유? 이렇게 말을 던졌어요. 자기 수업 늦었다고, 빨리 가야 한다는 거예요. 즉, 저 때문에 갑자기 수업이 늦어졌음을 각성한 거죠. 그렇게까지 도망갈 일인가? 애초부터 미국 사람인 것처럼, 저는 어깨만 들썩했어요. 아무도 보지 않는데, 무안함은 사라지지 않았거든요. 후회요? 후회를 왜 해요? 그렇게까지 쪽팔리지 않았어요. 스몰 토크는 원래 그런 거예요. 미쿡사람을 너무도 모르시네요. 이후로는 제가 일부러 피했어요. 삐진 거 아니에요. 그날 화장실 거울 보면서, 저를 받아들였어요. 제가 뭐라고, 미스유니버스가 농담 따먹기를 허락하겠어요? 진짜라니까요. 저 뒤끝 없어요. 나중에 무슨 안 좋은 일로 뉴스에서 울고불고하던데, 약간 쌤통이기는 하더라고요.


5. 재벌집 소불고기를 먹어 보았습니다


태국 최고 재벌이랑 결혼한 우리나라 연예인이 몇 있죠? 알고 지내던 미국 교포 동생이 그중 한 집 과외를 했었어요. 아이들 영어를 가르쳤죠. 추석이라고, 불고기를 선물로 받아 왔더라고요. 자기는 요리할 주방이 없다면서, 저에게 주더라고요. 태국 최고 재벌집에서 재운 불고기는 어떤 맛일까? 간을 삼삼하게 해서 먹더군요. 건강하고, 재벌재벌한 소불고기 맛이었어요. 내심 그 과외 자리를 저에게 토스해 주기를 바랐지만, 눈치 없는 놈이 그냥 미국으로 돌아가 버리더라고요. 하긴 저에게 뭘 배울 게 있겠어요? 아니죠. 한국어를 제대로 배울 수 있죠. 엄마가 한국인이라고 해도, 배우는 건 또 다른 거거든요. 갑자기 엄청난 기회를 놓친 기분이 드네요. 재벌집은 엘리베이터가 열리면, 바로 거실이라던데요? 저도 그런 집 한 번 구경해 보고 싶어요. 선생님 아이들 가르치느라 스트레스가 많으시죠? 아이들만 빼고 드라이브 가시죠? 부가티나 람보르기니 타고 짜오프라야 강변을 시원하게 달려보고 싶다고요. 제가 입이 싼 놈이란 걸 알고, 미리 철벽방어를 쳤던 걸까요? 어쨌든 불고기는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6. 유명 감독과 같은 비행기를 탔습니다


방콕 수완나품 공항에서 발권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앞에서 누군가가 신나게 떠드는 거예요.


-내 영화가 아직 심의를 통과하지 못했어. 제목이 뭐게?


오오, 영화감독이었어요. 제목이 뭐길래 뜸을 들일까요?  


-씨발놈


담담한 표정으로 '씨발놈' 하는데, 신선하고, 과격하고, 해맑게 무식해서 이미 그 영화가 좋아지더군요. 독립영화겠구나. 검색해 봤더니 제목이 <시발, 놈 - 인류의 시작> 이렇게나 거창한 제목의 SF 영화더군요. 인류의 기원을 그렸다는데, 너무도 잘 그렸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아요. B급도 아닌 C급 영화라고 당당하게 자랑하는 영화였어요. 예산은 천만 원을 썼답니다. 제목만 들어도 이거다 싶은 <인천 스텔라>는 영화를 만들었더라고요. 무려 SF 우주 로맨스더군요. 어쩌면 제목이 하나같이 웅장하고, 찬란하기만 한가요? 이런 천재 감독과 같은 줄에 섰다는 거,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하겠습니다.


7. 다리가 사리지고, 일자리가 사라지다


몸이 조금 불편해 보이는 여자였어요. 말도 어눌하게 하고요. 이 여자는 차량 통제를 하면서 돈을 벌었어요. 우리 동네에 실개천이 있어요. 다리 폭이 좁아서 차 두 대는 동시에 못 지나가요. 그러니까 누군가가 오가는 차를 통제해야 해요. 그녀는 차를 통제하고, 십 밧(3백70원)도 받고, 오 밧(185원)도 받아요. 하루 종일이면 그 돈이 얼마겠어요? 그런데 그 다리가 사라져요. 차가 오갈 수 있는 제대로 된 다리가 생겨버린 거예요. 그러면서 그녀는 직업을 잃게 돼요. 시장에서 우연히 그녀를 봤어요. 멀쩡하게 제대로 걷는 거예요. 그러니까 연기를 했던 거예요. 더 충격적인 건, 그녀가 과거에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가씨였다는 거예요. 태국 친구가 말해주더군요. 아마 마약을 하거나, 질이 안 좋은 남편을 만나면서 저렇게 된 게 아닐까 추측하더군요. 멀쩡하게 걷기는 하지만, 행색은 초라했어요. 저를 기억하는지, 눈이 마주치니까 당황하더군요. 제가 방콕에서 정말 오래 살았나 싶어요. 몸이 불편한 척해서 돈을 벌다가, 직업을 잃고 멀쩡하게 걷는 한 여자를 알고 있어요. 그녀가 조금은 더 건강하게, 예뻤던 과거의 모습으로 조금씩 다가가기를 바랍니다.


PS 매일 글을 씁니다. 우리에게는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나요. 아깝잖아요. 그냥 다 흘려보내는 건요. 그래서 써요. 기록이 되기를 바라면서요. 저의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여운이 되기를 바라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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