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무슨 냄새를 맡아도 그런가 보다 하네요
후각으로 기억하는 시간들은 참 특별해요. 시각이나 청각보다 더 강렬해요. 왜 요즘엔 무슨 냄새를 맡아도, 기억으로 연결이 되지를 않을까요? 몸이 늙는데, 코라고 예외겠어요? 코로 기억하는 시간들을 더 많이 만들고 싶은데 말이죠.
1. 토요일의 냄새가 있어요. 내가 고른 향수 냄새
이십 대 때 선물 중에 만만한 게 향수였으니까요. 생일이면 향수 두세 개는 기본으로 생겼죠. 그걸 돌아가면서 뿌리다 보면, 취향이라는 게 생겨요. 저는 버버리 위크엔드를 좋아했어요. 이름부터 위크엔드잖아요. 켈빈 클라인도 자주 썼고요. 불가리는 좀 있어 보이는 애들이 좋아해서, 저도 좋아하는 척 일부러, 전략적으로 뿌려댔네요. 주말이 되면 어떤 향수를 뿌리고 나갈까? 약간 거리를 두고 뿌려요. 뭐든 과하면 촌스러운 법이니까요. 삼성 통닭에서 치킨을 뜯을 거면서 향수는 왜 뿌렸을까요? 인간적으로 막걸리에 파전 먹을 거면, 향수는 자제했어야죠. 지금 생각하면 강렬한 무스에 헤어스프레이 때문에, 향수도 큰 의미가 없었어요. 시리아에 가니까 명품 향수를 몇 천 원에 즉시 만들어 주더군요. 진정한 향수 강국, 시리아가 그리워요. 시리아 여행의 문이 열리는 날, 가장 먼저 날아갈 사람 여기 있습니다.
2. 우리의 아지트, 지하실의 술집에서 나던 축축한 냄새
아는 형이 학교 앞에서 술집을 했어요. 수업도 안 들어가고, 죽치는 날이 많았죠. 영업 개시도 안 한, 곰팡이 냄새 창궐하는 지하 술집이 그렇게도 좋았어요. 창문도 없는 그 음침한 곳이요. 그곳에 가면, 저처럼 학점 안 좋은 날라리들이 항상 있었죠. 죽돌이 브라더스들이 곰팡이 냄새 섞어가며 맥주를 마시고, 칵테일을 마셨어요. 지금 나만 빼고 다들 술 마시는 거 아니겠지? 수업 시간에도, 그 생각뿐이었죠. 형은 청소나 좀 제대로 하지. 늘 습한 냄새가 코를 찔렀어요. 유한 락스 냄새, 곰팡이 냄새가 반반씩 섞인 그 아지트로 성큼성큼 들어갈 때마다 괜히 심장이 콩닥콩닥. 그 형은 지금 잘 살고 있으려나요?
3. 스페인 세비야에서 나는 오렌지 향기, 여기가 천국인가?
런던의 겨울이 지긋지긋해서 스페인으로 탈출했어요. 같은 겨울이어도, 영국과 스페인은 하늘과 땅 차이더군요. 스페인은 한겨울에도 봄 날씨더라고요. 세비야에서 나는 오렌지 향은 아직도 잊지 못해요. 가로수가 오렌지 나무더라고요. 오렌지 나무에서 떨어진 오렌지들이 짓이겨지고, 터져서는 오렌지 향으로 진동을 해요. 방금 전까지 런던의 시체 같은 바람에 괴로워했던 저에게 얼마나 큰 감동이었겠어요? 영국은 형벌, 스페인은 축복. 이렇게 반으로 딱 쪼개진 세상처럼 느껴졌어요. 오렌지 향이 휘덮은 세비야는 그래서 저에겐 겨울을 파괴하는 온순하고, 따뜻한 봄의 여신 같은 도시로 남아 있어요.
4. 뭔가 짜고, 눅눅한 냄새 - 대만
대만 냄새는 중국 청두랑도 비슷해요. 짭조름한데 정체를 모르겠어요. 향기로운 건 아니고, 낡은 책방이 바닷물에 젖어서 십 미터마다 있는 향이라고 해야 하나? 눈이 멀면요, 그냥 다 좋아요. 다 장점이 돼요. 저는 대만이 다 좋아요. 대단한 뭔가가 있어서는 아니에요. 그런 건 어쩌면 홍콩이 더 가졌을지도 모르죠. 전생에 대만에서 살았던 사람인가 싶게 좀 아련해요. 대만의 소도시 다락방 같은 곳에서 살았던 건 아닐까요? 그런 향은 태국 변두리에서도 맡을 수 있어요. 좀 습한 곳에서 나는 냄새인가 봐요. 빨래도 잘 안 마르는 이런 날씨가 사실 오래 살면 좋기야 하겠어요? 그래도 언젠가 대만에서 1,2년 살아 봐야 하지 않을까? 그런 꿈을 자주 꿔요. 찌뿌둥한 냄새로 온 몸을 적시고, 늙은 카페에서 연한 녹차를 마시면서 졸고 싶어요.
5. 소똥과 생강 커피의 콜라보 - 인도 바라나시
인도 바라나시가 저는 엄청 더러울 줄 알았어요. 화장터를 끼고 흐르는 강이기도 하고, 인도 자체가 청결과는 거리가 머니까요. 갠지스 강의 첫인상은 의외로 안 더럽다였어요. 실제로 안 더럽다는 건 아니고, 시각적으로 대단히 더러워 보이지는 않는다는 거죠. 인도 사람들은 성스러운 물이라고, 그 갠지스 강물로 입을 헹궈요. 옆에선 붕대로 둘둘 만 시체가 둥둥 떠다니는데요. 바라나시도 소들의 천국이죠. 소똥 냄새가 사실 그렇게 역하지는 않아요. 익숙해지면 원래 공기 냄새처럼 친근해요. 좀 덜 삭힌 청국장 향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향이 은은하게 나죠. 제가 즐겨 가는 카페에선 생강 커피를 팔아요. 커피와 생강. 안 어울릴 것 같죠? 저에겐 인생 커피예요. 느릿느릿 걸어가는 소들을 바라보면서 마셨던 생강 커피가 너무도 좋았어요. 지금 막 화장터로 들어가는 젊은 시체의 종아리를 보고 와서는 생강 커피를 음미해요. 지금은 생강 커피 향이, 시체 타는 냄새보다도 더 강렬해요. 이놈의 후각이 참 요상하단 말이죠.
PS 매일 글을 씁니다. 내 안의 찌꺼기들이 글을 쓸 때마다 세척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나를 점점 비우는, 깨끗하고, 가벼워지는 시간이 글 쓰는 시간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