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통은 내 책임이다.
-짝짝짝
뒤뚱뒤뚱, 덜컹. 세 번의 비행 중 가장 좋은 착지. 커다란 비행기 바퀴가 사르르 닿는다. 승객들은 박수를 친다. 남미에서 몇 번 봤던 풍경, 무사 착지 박수. 살았다. 비행기는 빠르고, 안전하다. 단, 삐끗하면 죽는다. 착지는 삶의 연장 쿠폰. 어떤 사람은 집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여행으로 간다. 기내 복도에 다들 일어서서 다리를 떤다. 빨리, 빨리 비행기에서 나가게 해 주세요. 가장 새 것 같은 하루다.
도착비자 26달러. 코카서스 3국 여행을 아제르바이잔에서 시작한 이유다. 조지아와 다르게 아제르바이잔은 비자가 필요하다. 도착 비자는 비행기로 올 경우만 가능하다. 공항 직원이 기계 앞으로 데리고 간다. 여권을 인식하면 스크린으로 내 여권이 큼직하게 등장한다. 26달러를 넣었더니, 종이 쪼가리가 한 장 달랑.
-웰컴 투 아제르바이잔
종이 쪼가리를 건네며 공항 직원이 수줍게 웃는다. 쾌적하고, 친절하고, 비자 자판기까지 갖춘 나라다. 좀 놀랍다.
공항버스는 1.4 마나트. 멀쩡한 공항버스가 천 원이다. 바쿠 공항은 어떤 공항보다 아름답고 세련됐다. 배차 간격은 30분. 방금 전 버스가 떠났다. 거의 30분을 더 기다려야 한다. 택시 기사가 다가온다. 나는 미리 고개를 젓는다. 한 시간을 기다려도 버스다. 기사 양반 사람 잘못 보시었소. 갓 구운 빵, 연한 갈색빛의 오후다. 공항버스가 움직인다. 코팅한 창 때문에 화사함은 약간 일그러졌다. 세련된 현대식 건물이 띄엄띄엄. 약간 놀란다. 더 놀라울 수도 있겠다. 공항에서 시내는 일종의 예고편. 예고편부터 괜찮다. 기대감이 아주 살짝. 나는 이 도시에 아무 기대가 없었다. 그러니 모든 풍경이 놀라울 것이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통신사에서 유십칩을 바꾼다. 통신사 이름은 Azercell. 5기가 바이트에 20 마나트. 만 4천 원. 간판만 보고 통신사 매장을 찾아냈다. 휴대폰 매장에서 1차 실패 후, 2번째 만에 성공.
예약한 숙소까지 걸어서 10분. 구글맵을 켠다. 길을 잃는 게 불가능한 시대. 숙소를 찾느라 풍경은 뒷전. 밝고, 깨끗하고, 떠들썩하다는 건 알겠다.
숙소 건물. 입구가 약간의 길쭉한 터널. 수상한 터널을 지나고, 마당. 낡은 철제 계단을 밟고 삐걱삐걱, 현관문을 연다. 부유한 중산층 거실이다. 널찍하고, 반짝반짝. 아름답기까지 하다. 내 방은 물론 도미토리다. 돈을 더 쓰더라도 비싼 방에서 좀 자자. 이번만큼은 그러고 싶었다. 노트북, 드론 카메라를 샀다. 항공권을 날려 먹었다. 백만 원만 아슬아슬 남았다. 책 인세가 곧 들어온다. 하지만 지금은 없다. 그러니까 만 원 도미토리다. 6명이 나눠 쓴다. 창가에 소파만 하나 덜렁. 콘스탄틴이란 이름의 사내가 노트북으로 뭔가를 한다. 키가 큰 러시아 남자가 13인치 노트북이다. 글자를 칠 때마다 바느질을 하는 것 같다. 섬세하다. 콘스탄틴에게 아제르 바이젠은 51번째 나라다. 나보고 몇 번째 나라냐고 묻는다. 어느 순간부터 방문한 나라를 세지 않는다. 콘스탄틴은 조지아만 6번을 갔다. 51개 나라 중 1등. 그런 나라가 코앞이다. 콘스탄틴 덕에 약간 기분이 좋아졌다.
밖으로 툭 터진 Taste란 식당을 찾아냈다. 명치 쪽 통증이 벌써부터 감지된다. 보통은 잘 때만 괴롭다. 샐러드 정도는 괜찮겠지. 채소 샐러드를 시킨다. 수프도 괜찮겠지? 토마토 수프를 시킨다. 제길, 빵이 곁들여 나온다. 한 조각 정도는 괜찮겠지? 빵을 뜯는다. 빵을 씹을 때부터 찡그려진다. 왜 먹고 있지? 왜 다 먹지? 애초에 설계된 채로 살면 된다. 설계를 거부하고, 멋대로 처먹고 있다.
새벽에 눈이 떠진다. 기록적인 통증이다. 출산의 고통은 어느 정도일까를 상상하며 복식호흡을 한다. 고통이 사라지는 건 너무 먼 일이니까 누그러지기만을 기다린다. 원래 소화액은 피부도 녹여버릴 만큼 강력하다. 그런 소화액이 식도를 타고 올라온다. 타들어가는 고통은, 진심으로 타는 고통이다. 한기가 느껴진다. 콘스탄틴이 내가 닫았던 창문을 굳이 연다. 나만 춥다. 적당한 소음, 닭살이 돋는 한기, 활활 타는 명치와 목젖. 일기를 쓰길 잘했다. 일기로 내 상황을 정리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저 두려웠을 것이다. 이 모든 고통이 갑작스러웠을 것이다. 공항에서, 기내에서 내내 이어진 폭식이 위장 안에서 날뛴다. 낫는 법도 안다. 배가 고플 때만 먹기. 부르면 멈추기. 단순해지면 된다. 단순함에서 너무 멀리 왔다. 단순함이 복잡함보다 훨씬 더 복잡해졌다. 새로운 음식은 모두 맛보고 싶다. 케밥을, 양꼬치를, 도넛을, 다디단 과자를 다 먹고, 놀라고 싶다. 내 위장은 늙었고, 거덜났으며 한 때의 당연한 쾌락은 날아가 버렸다. 고통의 한가운데, 나는 먹고 싶다. 후우우, 하아아. 어려운 여행이다. 하나씩, 하나씩. 방법이 있을 것이다. 후우우, 하아아. 죽을병은 아니겠지? 나를 보살필 수 있는 건 나. 프리덤 호스텔, 여섯 개 침대 중 가장 안쪽, 2층 침대 중의 1층. 눕다가 다시 앉은 나는, 통증을 빤히 본다. 너도, 나도 잠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