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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추억 8090

옛날 극장에 가고 싶어요

이제는 사라진 극장의 추억

by 박민우
339908_106550_3437.jpg 경상일보에서 퍼왔어요

동시 상영관에 가고 싶어요. 영화 한 편이 끝나도, 또 한 편이 남았다는 안도감에 취하고 싶어요. 묵혀둔 책을 펼칠 때 나는 종이 냄새를 맡고 싶어요. 망가진 의자들 사이에서, 멀쩡한 의자를 찾아내고 싶어요. 삐걱삐걱 거슬리는 소리에 조심조심 고쳐 앉고 싶어요. 화면에서 주르륵 내리는 빗줄기에 거슬리고 싶어요. 갑자기 툭, 화면이 꺼지고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야유소리를 듣고 싶어요. 껌을 밟아서 종일 화딱지가 나고 싶어요. 쥐새끼를 봤다고 해도, 아무도 안 믿어주는 황당함에 억울해하고 싶어요.


대한 극장에서 백투더 퓨처를 보고 싶어요. 긴 줄에 표가 있을까? 발을 동동 구르고 싶어요. 껌 파는 할머니에게 주시 후레시 껌 한 통을 사서 씹고 싶어요. 고대 앞에서도 봤던 할머니라, 뭔가 신기하다는 생각도 하고 싶어요. 암표를 사야 하나? 마음 졸이며 갈등하고 싶어요. 마지막 남은 표를 손에 쥐고 감격하고 싶어요. 매너는 개나 줘 버린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이고 싶어요. 저게 뭐 하는 거야? 까부는 거 보니 곧 죽겠군. 혼잣말 도사들이 우글우글하는 곳에서 화병이 나고 싶어요. 내 머리통 뒤로 발을 올리는 사람 때문에, 기분이 잡쳐보고 싶어요. 극장에는 사람만 오는 게 아니구나. 짐승도 사람 탈을 썼음을 깨닫고 싶어요. 영화가 시작했다고, 감동적이라고, 잘 끝났다고 손뼉 치고 싶어요. 영웅 본색을 보고, 벌떡 일어나서 미친 듯이 박수를 쳤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요. 1월 1일 대지극장에서 성룡의 '쾌찬차'를 보고 싶어요. 그런 극장이 아닌데, 성룡 영화로 매진이 된 대지극장에 놀라워하고 싶어요.


방학이면 만화 영화를 보러 가고 싶어요. 학교 앞에서 책받침을 나눠 주던 얄팍한 상술에 놀아나고 싶어요. '태권 동자 마루치, 아라치', '로보트 태권 브이', '똘이 장군', '전자 인간 337'을 몇 날 며칠 기다렸다 마침내 보고 싶어요. 주제곡이 나오면 떼창을 하고 싶어요. 파란 해골 13호가 납작코가 되었네. 애국가보다 더 뭉클한 노래로 하나가 되고 싶어요. 결국 정의는 승리하는구나. 대견한 마루치와 아라치를 응원하고 싶어요.


닮은 듯, 안 닮은 듯, 미묘하게 근사하고, 어찌 보면 조잡한 극장 간판 그림에 잠시 멈칫하고 싶어요. 오징어를 살까? 쥐포를 살까? 오란씨를 살까? 극장 안을 가로로 왔다 갔다 하는 아저씨를 부르고 싶어요. 나무로 된 납작한 상자를 목에 매달고, 부르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던 아저씨를 만나고 싶어요. 껌이며, 라면땅이며, 초콜릿이며 없는 게 없었던 마법의 상자 앞에서 갈등하고 싶어요. 친구들과 단체 관람을 하고 싶어요. 숫자가 많아지면 바보가 되는 놈들이 떼로 비명을 지르고 싶어요. 뒤늦게 명작임을 알고, 그때의 장면들을 되새김하고 싶어요. 피카디리 극장을, 단성사를, 서울극장을, 국도 극장을 지나치고 싶어요. 작심하고 외출한 사람들의 설레는 표정을 보고 싶어요. 시작까지 한참 남았으니 어디로 갈까? 극장 앞 커피숍에 우글우글 모인 사람들을 보고 싶어요. 아이고 재미없네. 보지 마세요. 표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물 먹이는 사람들을 보고 싶어요. 먼저 본 걸로 유세 떠는 얄미운 사람들을 째려보고 싶어요.


간절해지고 싶어요. 가디리고 싶어요. 손을 모으고, 소중하게 관람하고 싶어요. 영화 속 장면을 곱씹으며 하루를 보내고 싶어요. 꿈속에서 한 번 더 보고 싶어요. 입장권과 광고지들을 열심히 모으고 싶어요. 혹시 나도 저런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두근두근 꿈에 설레보고 싶어요. 삶과 영화가 구분되지 않아, 혼란스럽고 싶어요. 비루한 현실이 전부는 아닐 거야. 언제라도 싸구려 조조영화로 위로받고 싶어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가장 가난한 마음속에서 꽃이 피어나요. 그러니 혹시 지금 이 순간이 비참하다고 해서, 꽃 피우기를 미루시면 안 돼요. 무럭무럭 발아하는 씨앗을 보셔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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