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수업만 하고 집에 가면 어머니는 라면이나 수제비를 끓여 주셨어요. 혼분식을 장려하는 시대였으니, 밀가루 음식을 먹는 것도 나름 애국이었죠. 밀가루를 먹으면, 더 건강해지고, 키도 쑥쑥 큰다고 믿었어요. 지금은 탄수화물과 글루텐 덩어리라고 기피하는 걸 보면, 지금 몸에 좋다는 건 믿어도 될까? 그런 의심도 들기는 하네요. 떡볶이도 자주 해 먹었어요. 숭인 시장에서 떡볶이용 떡을 사 오는 건 제 담당이었어요. 시장 안쪽에서 국수랑 같이 파는 매대였는데, 목련표 밀떡을 주로 사 왔어요. 겉은 멀쩡해 보여도, 막상 떡을 꺼내 보면 쉰내가 나기 일쑤였죠. 쉰내가 나면 어머니는 물에 한 번 헹궈서, 떡볶이를 해주셨어요. 먹어도 안 죽는다. 즉, 안 죽으면 다 먹을 수 있다. '안 죽으면 그만'이라는 신앙을 몸소 실천했던 분이셨죠. 곰팡이가 핀 밥도, 물에 헹궈서 볶아 먹고, 콩나물 죽 해먹고 그랬어요. 하얀집이라고, 미아리에선 유명한 즉석 떡볶이집이 숭인시장에서 가까웠어요. 생일 때나 갈 수 있었죠. 해준이 형이, 봉지를 들고 하얀집에서 나오는 거예요. 아버지가 교감 선생님이면, 미아리에선 초상류층이었죠. 즉석 떡볶이를 포장해 가는 거래요. 즉석 떡볶이 1인분 가격이면, 온 가족이 배불리 먹을 텐데. 부자들은 즉석 떡볶이를 집에서도 먹을 수 있다는 게, 어린 저에게는 충격이었어요. 늘 떡볶이 재료를 들고 집으로 가는 길은 행복했는데, 그때는 신분의 격차를 미묘하게 느꼈던 것 같아요. 내 떡볶이는 아무리 노력해도, 즉석 떡볶이는 될 수 없으니까요.
토요일은 TV로 시작해서, TV로 끝났어요. 낮에는 재방송을 많이 해줬어요. '배달의 기수'라는 군 홍보 프로그램이 토요일의 상징이었죠. MBC에서도 해주고, KBS에서도 해줬어요. 재미도 없는데, TV 말곤 딱히 오락 거리가 없으니까, 억지로 봐요. 왜 보고 있나 싶지만, 안 보는 것보다는 나으니까요. 가끔은 전쟁 영화처럼 재밌을 때도 있기는 했어요. 아주 가끔요. 종일 방송을 해준지 얼마 안 되는 때라, TV에서 나오기만 하면 광고조차 넋 놓고 보던 때였죠. MBC에 해줬던 '믿거나 말거나'라는 미국 프로그램을 재밌게 봤던 기억이 나요. 지금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원조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겠네요. 세상에서 키가 가장 큰 사람, 작은 사람, 가장 긴 손톱을 가진 인도인, 머리카락을 한 번도 자르지 않은 사람, 으스스한 묘지, 독사를 삼키는 사람 등등을 보여 줬어요.
-못 믿으시겠다고요? 그건 여러분의 몫입니다. 믿거나 말거나 말이죠.
그 멘트를 들으면 이상하게 소름이 돋았어요. '멕가이버'나 '쇼비디오 자키'도 토요일에 볼 수 있었어요. 아마 재방송이었을 거예요. '전격 Z작전'도 빼먹으면 섭섭하죠. 이렇게 재밌어도 되나 싶은 프로그램들을 줄줄이 해주니, 토요일은 축복 같은 날이었어요. 그중에서도 '멕가이버'는 최고였죠. 음악도, 배한성의 더빙 연기도, 과학적 지식을 무장한 꽤나 현실적인 캐릭터도 그렇게나 매력적일 수가 없었어요.
저녁밥 먹을 때는 가요 프로그램이었어요. TBC '쇼쇼쇼', KBS '백분쇼', MBC '쇼2000'이 치열하게 경쟁했어요. 이후엔 MBC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가 접수했고요. 가수가 나와서 노래하고, 무용단이 상당히 진지하게 춤을 추는 구성이었는데, 어린 저에겐 많이 지루했어요. 지루한 시간을 견디면, 주말 연속극이 우리를 기다렸죠. 그때는 MBC 주말 연속극이 무조건 국민 드라마였어요. 드라마 작가 김수현과 MBC가 죽이 잘 맞을 때였어요. '사랑과 진실' '사랑과 야망' 90년대 '사랑이 뭐길래'로 전 국민의 혼을 쏙 빼놓죠. 시체도 벌떡 일어난다는 김수현의 드라마들이었으니까요. 어릴 때도 김수현 드라마는 왜 저렇게 따발총 인물들이 많은 걸까? 신기했어요. 누군가 태엽을 돌려서 인형들 입에서 대사가 쏟아지는 것처럼 보였어요. 저 많은 대사를 인간이라면 외울 수가 없다고 생각했죠.
저녁엔 KBS 2tv 토요 명화를 보는 시간이었어요. 주말에 경쟁적으로 외화를 더빙해서 보여줬어요. MBC는 '주말의 명화', KBS 1 tv에선 '명화극장'이란 프로그램이 있었고요. 일요일에 해줬던 명화극장에선 영화 평론가 정영일이 노타이에 뿔테 안경으로 독특한 예고편을 해주기도 했어요. '이 영화 놓치지 마십시오' 이 한 마디에, 온 국민이 그 영화만 기다리던 때였어요. 인기는 토요 명화가 가장 많았던 것 같아요. '내 이름은 튜니티'를 제일 좋아했어요. 진지하지 않은 서부극은 어린 저에겐 너무나 신선했거든요. 무술 영화에 성룡이 있다면, 서부극엔 테렌스 힐이 있었죠. 베이크드 빈즈라고 하죠. 토마토랑 콩이랑 졸인 요리요. 그걸 테렌스 힐이 어찌나 맛나게 먹던지요. 저에겐 먹방으로 더 기억에 남는 영화이기도 했네요. 그래도 라디오로 이문세의 별밤 공개방송을 들을 때가 가장 짜릿했네요. 토요일엔 '별이 빛나는 밤에', 일요일엔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 공개 방송이 밤 열 시면 우리를 기다렸어요. 테이프로 녹음 뜨는 것도 잊지 않았죠. 두고두고 들어야 하는, 보석 같은 방송이었으니까요. 지금 친구들에게 토요일은 '무한 도전'이나 '놀면 뭐하니'를 보던 시대로 추억되겠죠? 이젠 기다림의 재미가 사라졌어요. 언제고 다시 볼 수 있으니까요. 그 기다림이 가끔 그리워요. 참 시간이 안 갔어요. 밤 열 시 공개방송을 들어야 하는데 말이죠. 그 소중한 기다림이 그리운 밤입니다.
PS 매일 글을 씁니다. 나는 육체를 가지고 있는 물건일까요? 생각으로 가득 찬, 영혼의 존재일까요? 둘 다일까요? 제 안의 영혼은 꼭 내 몸이 아니어도 될 텐데, 늘 붙어 있다는 게 신기해요. 날아가 버리지 않고요. 이런 엉뚱한 생각도 하면서 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