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무니없이 열심히 살아야 했던 이유가 따로 있었을까요?
단 한 번도 같은 반인 적이 없었는데도 유명한 친구였어요. 단지 공부를 잘해서만은 아니었어요. 쉬는 시간에도 늘 공부를 했어요. 쉬는 시간에 공부를 하는 친구들이야 꽤 있었죠. 그 친구는 중얼대면서 공부를 했어요. 저도 그 교실에 구경 갔다니까요. 신들린 사람처럼 중얼중얼대면서 뭔가를 암기하고 있더군요. 매일 그렇게 사는 친구였어요. 딱히 시험 기간이 아니어도요. 원래 공부 잘하는 친구들은 잘 안 괴롭히잖아요. 그런데 그 친구에겐 아이들이 시비를 걸더군요. 공부하는 티 좀 내지 마. 이런 거였죠. 전설처럼 떠도는 이야기였는데, 이 아이가 벌떡 일어나더니 내가 힘이 없어서 참는 줄 알아? 주먹을 꽉 쥐고, 소리를 꽥 지르더래요. 갑자기 돌변하니까, 게다가 연극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를 치니까 괴롭히던 양아치들이 깜짝 놀라서 뒷걸음치더래요.
제가 중학교 땐 무슨 생각이었는지 과학고등학교를 지원했어요. 우리 학교에서 열 명 정도가 시험을 쳤죠. 합격하면 서울 과학 고등학교 1회 합격자가 되는 거였어요. 합격자 발표를 라디오에서 해줄 정도였으니까, 합격만 한다면 가문의 영광이었죠. 아마 여의도 고등학교에서 시험을 봤을 거예요. 아, 이건 중학생이 풀 수 있는 게 아니구나. 수학 문제를 풀다가, 포기가 되더라고요. 정규 과정만 공부한 친구들은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들이더라고요. 수유리에 꽁꽁 숨은 학교에서는 아무도 붙을 수 없겠구나. 좀 슬퍼지더라고요. 그런데 그 친구가 붙은 거예요. 늘 전교 1등을 하는 친구도 아니었는데 말이죠. 중학교 시험이 변별력이 좀 없는 편이잖아요. 대충 공부한 애들도 백 점 맞는 게 가능하죠. 같은 백점이라고 비슷한 실력이 아니었던 거예요. 쉬는 시간에도 추격전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공부를 하던 아이는, 월등한 실력을 쌓아두고 있었던 거죠.
형 친구 동생이 사법 고시에 합격했는데, 사법 연수원에 별의별 공부 도사들이 다 있더래요. 판사가 되려면 그 어려운 시험에 합격한 천 명 중에서도 100등 안쪽이어야 하는데, 100등 안쪽은 '어나더 레벨'이더랍니다. 눈알이 빠져서 병원을 간 사람도 있었대요. 어떻게 공부를 하면, 안구가 다 돌출이 될까요? 그런데 안구 돌출이 된 사람도 못 따라가는 천재들이 꼭 있대요. 좀 설렁설렁하는 것 같은데도, 1,2등을 하는 괴물들이요.
영어 사전을 한 장씩 외우곤 찢어서 먹었다는 아이는 어느 학교에나 다 있죠? 저는 직접 보지는 못했어요. 수험생 때는 4당 5락이란 말을 귀 아프게 들으며 공부했어요. 4시간 자면 붙고, 5시간 자면 떨어진다. 잠만 줄이면 대학을 가는구나. 고3 1학기 3,4월은 진짜 네 시간만 자면서 공부했어요. 깨어있는 시간엔 그럼 공부를 했을까요? 그럴 리가요. 그냥 안 자는 거죠. 안 자면, 누군가가 대학에 붙여주는 줄 알았어요. 열심히 살지 않으면, 성공은 꿈도 꾸지 마라. 그런 공포 분위기가 너무나 당연했죠. 지금도 그렇지만요. 집안이 어려운데 장남이기까지 하면 책임감이 남달랐어요. 공부로 집안을 일으켜 세워야겠다. 그런 친구들도 참 많았죠.
궁금해요. 공부 벌레 친구들이요. 잘 살고 있겠지만요. 곁눈질 한 번 안 친구들은 어떻게 가정을 꾸리고 살까요? 공부엔 딱히 관심이 없는데, 잘 사는 친구들은 꽤 봤어요. 사교성이 좋은 친구들이 대부분이더라고요. 사람들 사이에서 기죽지 않고, 잘 어울리는 부류요. 그래서 아마 더 궁금한가 봐요. 사교성은 별로인데, 공부만 잘했던 친구들은 어떤 어른이 됐을까요? 음식은 골고루 먹으라면서, 운동도, 취미도 없이 공부만 강조했던 세상에 감히 시비를 걸 수 없었죠.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도 포기하고, 세상 돌아가는 것도 모른 채 공부만 하는 친구들이 최고였어요. 너는 왜 저렇게 못 하니? 어머니들은 내 아들이 꽉 막힌 수용소 같은 곳에서 공부만 하기를 바랐어요. 어른이 되고 보니, 참 잔인한 시절이기도 했어요. 그 나이에만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는데 말이죠. 친구들끼리 분식집도 가고, 전자 오락도 하고, 롤러스케이트도 타 보고, 옷을 사러 동대문 시장도 가 보고요. 그런 추억이 박탈된 아이가 최고의 모범생이라뇨? 그 친구들은 억울하지는 않을까요? 평범한 사람들의 생각을 이해 못해서, 사회생활이 더 어렵지는 않을까요? 제 앞가림도 못하는 처지에, 제가 이렇게나 오지랖이 넓어요. 어련히 알아서 잘 살까요? 성실하고, 유능한 친구들인데요. 잘 살아야죠. 공부 벌레 친구들의 안부가 갑자기 궁금한 날이네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항상 쉽게 쓰는 건 아니지만, 예전에 비해서 훨씬 자연스럽게 글을 쓰고 있어요. 즉, 습관이 되고 나면, 내 것이 되는 거죠. 모든 게 다 그럴 거예요. 새로운 일에 도전해 보고 싶네요. 재밌는 걸 시작해 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