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제르바이잔에서 선보다! 부끄부끄

세상의 모든 인연은 찬란한 진동

by 박민우


아이란(시큼시큼), 아제르바이잔어도 배웠음, 파파존스 피자(내용상 등장 인물들 사진은 못 올리겠네요)

안경을 쓴 소녀가 쭈뼛쭈뼛 내게 왔다. 약속한 쇼핑몰 앞에서 곤두세우던 중이었다. 중학생? 고1? 선생님이랬는데? 너무 어리다. 쇼핑몰 1층 스타벅스로 나를 안내한다. 두 명의 여자가 더 있다. 그중 한 명이 내게 연락 준 한국어 선생이다. 선생과 아이가 일단 사라진다. 일대 일이 된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킨다. 한국어 선생은 인스타그램을 보고 내게 연락했다. 해시태그(#)로 찾아냈을 것이다. #아제르바이잔 #바쿠. 이런 한국어 해시태그를 매일 검색하는 모양이다. 한국인 여행자는 그런 단어를 쓸 수밖에 없다. #해시태그가 도대체 뭔지 여전히 모르겠지만, 해시태그를 붙여야 검색된다는 건 알겠다. 모든 한국인에게 다 연락하는 걸까? 고르는 걸까? 거미집이 튼튼한 왕거미가 떠올랐다. 왕거미 한국어 선생님. 근처에 한국어 교실이 있다. 먼저 가서 기다리겠다고 한다. 이 여자는 당연히 내 인스타그램을 봤다. 내 얼굴을 보고, 내 여행 사진을 봤다. 일단 합격. 그러니까 이건


맞선이다.


점수가 매겨지고 있다. 안경 소녀가 가져다준 캐러멜 마키아토가 내 앞에 있다. 어머니 지갑을 통째로 가지고 가더니, 이걸 가지고 왔다. 역류성 식도염, 피해야 할 커피. 간만의 커피, 간만의 마키아토다. 먹어서 안 되는 음식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 여자가 손톱만 통통 튕긴다거나 시선을 바깥으로만 둔다면, 탈락이다. 아, 이런 상황은 정말 끔찍하다. 탈락은 더 끔찍하다. 내 몰골은 높은 확률로 실물이 별로다. 마른 버섯처럼 검고, 쭈글쭈글한 피부다. 광대뼈 밑으로 지방이 아예 없다. 게다가 내내 아팠다. 사진에서 감춰지는 늙음과 빈티가 자비 없이 드러난다. 가지런한 치아, 남은 건 치아뿐이다. 활짝 웃는다. 형편없는 실물을 만회하려면, 웃음뿐. 나는 그 누구보다 잘 생겼다. 웃으면 이병헌이다. 웃으면 배용준이다. 믿어야, 잘 생겨진다. 그러니까 믿어라. 내 얼굴은 강풍에 버티는 텐트다. 의심과 불안의 강풍이 거세다. 확신하라. 버텨라. 입이 찢어져라 웃어라. 마시고 싶다는 생각보다 먼저 손이 간다. 벌컥벌컥 마키아토를 비운다. 텐트가 찢어지려고 한다.


여자의 정체는 안경 소녀의 엄마. 나이는 서른다섯. 남편은 암으로 죽었다. 남편은 러시아인. 딸아이가 한국을 너무 좋아해서 조만간 한국에 갈 생각이다. 한국에 눌러 살 마음도 있다. 금발의 백인이다. 아버지는 터키, 어머니는 우크라이나 사람, 할머니는 또 프랑스 사람. 모스크바에 집이 여러 채 있다. 부동산으로 돈을 번다. 이탈리아, 프랑스, 호주를 좋아한다. 딸만 아니면 호주에서 살고 싶다. 안경 소녀가 대학에 진학하면 바로 분가할 계획이다.


-그때쯤이면 아기를 또 키우고 싶어요. 또 낳고 싶다는 얘기죠. 사람은 가족이 있어야 하니까요. 아제르바이잔 남자는 안돼요. 아제르바이잔은 따분해요. 바쿠가 좋다고요? 살아 보세요. 모스크바가 아제르바이잔보다는 낫지만, 그래도 별로예요.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했다. 아이라고? 내 얼굴이 절반 섞인 아기를 상상하고 있다. 비싼 캐러멜 마키아또 값을 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합격이다. 이루었으니, 마음껏 부담을 느낄 차례.


-일어날까요?


엄청난 미래를 계산하는 무게에서 나는 뛰쳐나와야겠다. 수업 중인 교실로 갑시다. 금발의 여자는 좋은 남편감을 찾고 있다. 딸아이가 한국을 좋아하니까, 엄마도 따라서 좋다. 딸이 한국 유학을 꿈꾸니까, 엄마의 꿈도 한국이 된다. 일주일에 세 번 필라테스를 하고, 주말이면 쇼핑을 한다. 굉장히 명쾌하다. 직선의 삶이다. 여유에서 오는 해맑음이다. 오늘 같은 만남이 몇 번 더 생긴다면, 괜찮은 남자를 높은 확률로 만나게 될 것이다. 아름답고, 밝은 여자다. 지금의 나를 질투하고, 부러워할 남자가 한국에 수백만 명 산다. 나는 수백만 중에 하나가 아니다. 가정은 안락이라는 평균적인 사람들이 전혀 이해가 안 간다. 나는 외계인이다. 외계인은 죄책감을 한국어 교실에서 풀고 싶다. 안경 소녀와 엄마, 세 명의 또 다른 학생, 그리고 선생님. 모두 여자고, 모두 아제르바이잔 사람이다. 한국이 너무 좋아서 한국어를 배운다. 한국이 이토록 대단한 나라다. 그들이 한국어 노래가 듣고 싶어요 한다. 노래를 한다. 춤도 춰 주세요. 춤도 춘다. 같이 춰요. 맞선녀의 손을 잡고 사교댄스도 춘다. 내가 웃으면 따라 웃고, 내가 노래하면 입을 못 다문다. 한국 사람 입에서 한국 노래라니. 나는 작은 기적이다. 파파존스 피자와 아이란(요구르트에 물을 섞은 시큼한 음료)을 함께 먹는다. 나는 사랑받고 있다. 눈으로 확인하면 더 큰 힘이 된다. 불편하다. 불편하지만 감사하다. 내 부담감이 드러나면 안 된다. 경련이 일도록 웃는다.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터무니없는 특혜다. 아침까지 막장 변기 사용자였다. 지금은 한국에서 온 신비의 왕자다. 이렇게 늙은 왕자도 있다. 믿음의 문제다. 믿으면, 강력하게 믿으면, 나는 왕자다. 나는 왕자님이 되어 숙소로 돌아갈 것이다. 청소 아줌마가 힐끗힐끗 나를 못 마땅해해도, 왕자님이니까 괜찮다. 똥을 눌 때도 기다리는 사람 생각 안 하고 십 분 이십 분 스마트폰을 볼 것이다. 왕자답게 해맑을 것이고, 뒤끝 같은 건 안 남길 것이다. 철없이 모두를 사랑할 것이다. 마침내 왕이 되는 첫날 청소 여사에게 30평 아파트를 하사할 것이다.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건 사랑과 약간의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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