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랑받았다. 훨씬 덜 받았다.
-바쿠 기념 셔츠를 꼭 드리고 싶어요.
한국어 선생은 다음날 차를 마시자고 했다. 아니, 뭘 또 봐?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한국어도 가르쳐 줬잖아. 네 시간 가까이 떠들었다. 셔츠는 또 뭐야? 이제 여행 시작이다. 짐 늘어나는 거 딱 싫다. 만나는 드릴 테니, 셔츠는 넣어 두시죠. 이렇게 말해도 될까? 군말 없이 나갔다. 내 마음 편하자고 나간다. 거절은 두고두고 남는다. 젠장!
약속 장소에는 한 명의 동양 남자가 더 있다. 안경 소녀와 한국어 선생도 이내 등장한다. 나와 눈이 마주치고, 바로 그 남자에게로 옮겨졌다.
-반가워요. 처음 뵙겠습니다. 이거 셔츠예요.
한국어 선생은 또박또박 한국말로 인사했다. 나머지 쇼핑백 하나가 내 손에 쥐어졌다.
-이거 모자예요.
모자? 검정 모자였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이름만 모자인 모자. 오는 길에 급하게 샀다. 그 정도 눈치는 있다. 내게 주기로 했던 셔츠는 다른 남자의 손에서 대롱대롱.
-한국 사람이세요?
-아, 네 반갑습니다.
기다리면서 몇 번 눈이 마주쳤다. 중국인일 거라고 생각했다. 잘 생긴 부잣집 중국인. 한국인이었다. 인스타그램에 상주하는 왕거미 선생의 거미줄에 포획됐다. 키는 185 정도? 이제 막 제대한 스물세 살 청년이다. 셔츠가 그렇게 그리로 갔다. 그러고 싶어서 그랬겠어? 주책맞은 마음이 시켰겠지. Paul이란 식당에서 우린 리조토와 샌드위치, 치즈 튀김, 치킨 스테이크를 시켰다. 남미 음악이 주로 나온다.
-너무 잘 생겼어요. 드라마 장난스러운 키스 아세요? 주인공 김현중이랑 똑같이 생겼어요. 아이돌 같이 생겼어요.
잘 생겼다는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움찔. 혹시 나는 아닐까? 아니다. 잘 생긴 사람은 이렇게 자주 잘 생기는구나. 잘 생겼어요. 잘 생겼어요. 아, 제발 밥 좀 먹읍시다. 그녀의 입을 막고 싶다. 너는 못 생겼어로 들린다. 피해의식이다. 늘 당당하고 싶다. 어렵다. 장난스러운 키스는 그녀의 인생 드라마다. 한국어 선생이 된 이유가 김현중 때문이다. 스물세 살, 이름은 재원이. 잘 생겼지만 안 닮았다. 다른 인종을 보는 눈은 이렇게 다르구나. 그런데도 잘 생긴 사람은 또 확실히 알아본다. 오늘의 나는 밝고 재미난 캐릭터여야 한다.
-우리 나눠 먹을까요?
다들 좋다고 했다. 안경 소녀의 치즈 튀김을 반 잘라서 재원이에게 줬다. 내가 했다. 고깃집에서 고기도 잘 안 굽는 내가 손을 걷어붙였다. 재원이가 너무 맛있어요 한다. 안경 소녀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나는 이들의 피부를 본다. 더 좋은 피부는 불가능하다. 수분과 콜라겐으로 반들반들. 주글주글, 거뭇거뭇. 내 얼굴을 똑바로 들어도 되나? 자꾸만 쪼그라든다. 그럴수록 웃겨드려야 한다. 수줍은 재원이를 대신해서, 심장 소리가 머리통을 흔들어대는 두 여자를 위해서.
-저기, 사진 그만 찍으시면 안 돼요?
-부끄럽대요. 그만 찍으시는 게 좋겠어요.
광대는 중재자도 되어야 한다. 한국어 선생의 마음은 알지만, 재원이의 마음도 알겠다. 그렇게 수시로 찍어대면, 누구라도 언짢다. 김현중이다. 김현중이 눈 앞에 있다. 한국인 남자 친구가 있지만, 지금은 한 남자만 보인다.
-왜 부끄러워요? 저 사람처럼 편해지면 안 돼요? 재미있으면 안 돼요?
저 사람은 물론 나를 의미한다. 내 리조토도 먹어 볼래? 트러플 오일이 들어간 거야. 세상에서 제일 비싼 버섯으로 만든 오일이야. 처음엔 이상했는데, 맛있어졌어. 조금만 먹어 봐. 조금이라도 먹어 봐. 그렇게 이상해? 하하하, 깔깔깔. 뭘 더 이야기하지? 어떻게 하면 재원이도, 선생도 편해질까?
-지금 얘는 재원씨에게 사랑에 빠졌어요.
한국어 선생은 안경 소녀를 가리켰다. 안경 소녀는 선생의 한국말을 못 알아듣는다. 눈만 말똥말똥.
-재원씨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했어요. 저요? 저는 아니에요. 저는 남자 친구가 있잖아요.
선생은 자신의 말로 자신을 통제하려고 한다. 누가 봐도 지금 사랑에 빠진 사람은 선생이다. 횡설수설, 그녀는 꽃이다. 붉고, 아슬아슬하다. 저렇게 급속도로 얼굴이 붉어지다니. 좀 놀라운 생물학적 신비다. 남자 친구가 있지만 김현중과 단둘이 사진 찍고 싶다. 그 사진을 인스타에 올리고 싶다.
-인스타에 올리는 건 안 돼요.
재원이가 정색.
-왜요? 왜 안 돼요? 그냥 올리는 거예요.
-안 돼요.
-여자 친구가 있나요? 여자 친구가 제 인스타그램을 어떻게 봐요? 저를 어떻게 알겠어요?
-그래도 안 돼요.
그녀의 얼굴이 고추장 색으로 바뀌었다. 지금 가장 불행한 사람이다.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우리는 식당에서 나와 잠시 걸었다. 어제 맞선을 봤던 안경 소녀의 엄마는 잠시 들러서 차만 마셨다. 오늘 기분이 별로라며 갔다. 나 때문은 아니길. 신경이 쓰인다. 그녀의 여동생, 안경 소녀의 이모가 쇼핑백을 가득 들고 나타났다. 그녀가 밥값을 계산했다. 내가 내야 한다는 생각만 했다. 신한 카드가 지갑에 있었지만, 손이 안 떨어졌다.
-지금 무슨 말했어요?
재원이는 양구에서 군 생활을 했다. 나도 양구에서 했다. 재원이는 오늘이 신기하기도 하고, 어리둥절하기도 하다. 그래도 내가 있어서 덜 불편한 거예요. 나는 생색을 낸다. 재원이가 웃는다.
-왜, 그것까지 말해 줘야 하죠?
이번엔 내가 정색한다. 별거 아닌 이야기예요. 미안해져서 좀 더 덧붙였다.
-제발, 제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이야기해 줘요.
그녀는 재원이의 모든 걸 알고 싶다.
-굿바이
텅 빈 얼굴이 되더니 뒷걸음질 쳤다. 그녀는 사라졌다. 통제가 안 되는 자신을 자각한 듯했다. 그나마 지키려는 듯했다. 스스로가 용서가 안 되는 순간, 그렇게 사라졌다. 안경 소녀와 이모는 택시를 탔다. 순식간의 이별이었다. 재원이와 나만 남았다. 30분 정도 걸었다. 러시아에서 시작한 재원이의 여행은 아제르바이잔, 조지아를 거쳐 터키에서 끝난다. 전공이 마음에 들지 않아 고민이 많다. 이번 여행이 끝나면, 고민이 해결되기를 바란다. 겨우겨우 혼자가 되었다. 바쿠는 밤만 되면 바람이 거세진다. 기온은 따뜻하고, 바람은 세다. 기묘하다. 오늘 나는 무척이나 밝고, 재미난 사람이었다. 나는 잘 생겼다. 나도 괜찮다. 틈틈이 나를 응원했다. 나는 잘생겨지지 않았고, 내 손엔 종이백이 있다. 오늘 같은 날이 많아지면, 받아들이는 늙은이가 된다. 발버둥도 젊으니까 치는 것. 여전히 젊고, 어리석다. 이제 곧 발버둥도 잦아들 것이다. 평화로워지겠지. 미련에서 멀어진, 참한 늙은이가 되겠지. 오늘은 모두에게 약간은 불편한 밤이다. 하지만 빈손은 아니다. 모자라든지, 셔츠라든지, 설렘이라든지, 후회가 있다. 성장은 설렘보다 후회에서 온다. 땀을 흠뻑 흘린 기분이다. 더운 샤워를 하면 깊은 잠을 잘 수 있겠다. 이런 기분에 이런 바람이라니. 바쿠는 바람 때문에 더 근사하다. 가슴에 두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