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계절이 뚜렷한 나라가 살기엔 제일 좋죠
손발이 차서 더운 나라를 늘 동경했어요. 우리나라는 목욕탕이라도 흔하죠. 으슬으슬 유럽에서 겨울은 힘들더라고요. 집도 한국처럼 따뜻하지 않아서, 몸을 지질 곳이 없는 거예요. 소원대로 태국에서 12년째 잘 살고 있어요. 좋은 점만 있겠어요? 좋은 점'도' 있는 거죠. 일단 좋은 점부터.
1. 반바지가 디폴트, 이렇게 자유로울 수가 없어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반바지에 플립플롭(비치 샌들) 차림으로 살아요. 요즘 코로나로 다들 마스크를 써야 하잖아요. 그래도 하체가 자유로우니까, 좀 덜 답답해요. 양말은 1년에 열 번이나 신을까 말까예요. 조금 추우면(영상 십 도면 엄청난 한파예요) 목도리, 털모자 같은 걸 어떻게든 구해서 겨울 분위기 내는 사람이 있기는 해요. 겨울이 없는 나라라서, 겨울 기분 내는 게 그렇게나 소중하거든요. 그런데 제가 오해한 게 있어요. 더운 나라니까, 반바지에 관대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니더라고요. 잘 사는 사람들일수록, 반바지 절대 안 입어요. 긴팔에 갖춰서 입어요. 갖춰 입으면 자동적으로 좀 사는 집 사람이 돼요. 직장도 집도 에어컨이 있는 환경이어야 가능하니까요. 관광객들이 가장 자유롭게 입고 다녀요. 태국까지 와서 양말을 신을 필요가 있나요? 좀 없어 보여도, 이 자유 포기 못 해요.
2. 사람들 성격이 엿가락처럼 늘어져요
더운 나라에서 성격 급하면, 당 떨어져서 아무 곳에서나 기절할 거예요. 더위에 순응하는 방법은 최대한 덜 움직이고, 덜 흥분하는 거예요. 더위 하나만 상대하기도 버겁거든요. 이게 또 나라마다 다르긴 해요. 베트남 사람들은 한국 사람 못지않게 빠릿빠릿하더라고요. 어쨌든 태국에 머물면 쫓기는 기분이 들지 않아서 좋아요. 저는 한국만 가면 갑자기 싸움소가 되더라고요. 주문한 게 좀 늦으면, 내 주문 까먹은 건가? 배송한 게 왜 안 오나? 수시로 배송 상황을 클릭해야 안심이 돼요. 더 빠른 나라에 사는데도, 더, 더 빨리 안 해주는 게 답답하더라고요. 한국에선 음식 먹는 속도도 빨라져요. 비싼 곳은 어차피 이야기하는 곳이니까 눈치를 안 보는데, 오로지 식사만 하는 곳 있잖아요. 김밥 천국 같은 곳이요. 빈자리가 없거나 할 때는, 제가 더 조바심이 나요. 빨리 먹고 일어나 주는 게 예의지.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때가 있어요.
3. 빨래가 그렇게 잘 마를 수가 없어요
동남아시아 날씨가 고온다습인데도, 가습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해 봤어요. 제가 사는 방이 볕이 유난히 잘 들어서일 수도 있겠네요. 반나절이면 빨래가 다 말라요. 건조 기능이 있는 세탁기가 있는데도, 건조 기능은 1년에 열 번도 쓸까 말까예요. 한국에선 겨울이면 정말 빨래 안 마르잖아요. 요즘엔 다들 건조기 쓰시니까 괜찮나요? 아, 그리고 딱히 보습제를 안 발라도 돼요. 공기가 자연 보습제라서요. 그러고 보니, 요즘엔 화장품이란 거 자체를 아예 안 쓰네요. 스킨, 로션, 선크림 하나도 안 써요. 화장품 안 썼더니 피부만 좋아지더라. 그런 사람 절대 아니고요. 화장품 안 써서, 피부 안 좋습니다. 하하.
4. 1년 내내 꽃구경하며 살아요
늘 꽃이 피어 있어요. 당연히 사시사철 푸른 이파리들이 나무에 매달려 있고요. 앙상한 가지, 떨어지는 낙엽으로 계절의 변화를 느끼기가 힘들어요. 공터 같은 곳은 몇 달만 방치해도, 알아서 무성해져요. 그러니 계절의 변화로 시간이 간다는 걸 느끼기란 불가능에 가깝죠. 늘 봄, 여름 속에서만 산다는 게 장점일 수도 있지만, 시간이 흐름을 덜 민감하게 느끼게 돼요. 1년이 어떻게 지났지? 12월만 되면 다들 황당하시죠? 태국에 살면 더 그래요. 도둑맞은 느낌까지 들 정도예요. 찜통인데 12월이라고 크리스마스 캐럴이 어디서나 울려 퍼지면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5. 내 사랑 열대 과일, 그저 은혜로운 땅
과일의 천국이에요. 더운 나라여야만 먹을 수 있는 두리안, 망고, 망고 스틴 같은 거요. 이름도 모르는 신비로운 과일들도 재래시장 가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맛있는 과일이 싸기까지 해요. 저번에 마트에서 할인 행사를 하더라고요. 망고 두 개를 700원에 업어 왔어요. 설탕과 어느 쪽이 더 단가 내기를 해도 이기겠더군요. 신라 호텔 망고 빙수가 세금 포함, 6만 원이 넘는다면서요? 태국에 오시면 만 원짜리 한 장으로 온 가족이 망고만으로 배를 채울 수도 있어요. 땅도 비옥해서, 뭐든지 잘 자라요. 심지어 물고기도요. 해산물은 물론이고, 강물에서 자라는 새우도 팔뚝만 해요. 민물고기는 작다? 그런 편견도 더운 나라에 오면 다 깨져요. 민물에서 자라는 생선도 크기가 어마어마해요. 먹을 것들이 넘쳐나니까, 어디나 재래시장이 꽃처럼 활짝 피어 있죠. 지금은 자본주의 시대니까, 1인당 소득으로 국가의 부를 나눠요. 지구 역사를 통틀어서 본다면, 더운 나라들이 뼈대 있는 부자 가문이죠. 최근 몇백 년 역전당한 것뿐이죠.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수박 주스 한 잔 하러 나가 봐야겠네요.
더운 나라에 살면 나쁜 점은 뭘까요?
1. 냉방병 주의
이게 진짜 제일 나쁜 점 같아요. 1년 내내 에어컨 속에 산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럼 에어컨 끄면 될 거 아니냐고요. 저는 좀 춥다 싶으면, 에어컨 꺼요. 선풍기만으로도 그럭저럭 버텨요. 그런데 회사나 학교에선 그게 불가능하죠. 가족이 있을 경우, 자기가 춥다고 에어컨 끄기가 쉽나요? 누구는 열대야에 잠을 못 자는데, 어떻게 끄냐고요. 지하철(MRT)이나 지상철(BTS)은 에어컨을 근본 없이 세게 틀어 놔요. 반발 반바지 입은 사람들 다 얼어 죽으라고요. 가방에 가벼운 재킷 같은 거 하나씩은 꼭 넣고 다니셔요. 태국에서 얼어 죽었다고 뉴스에 나오고 싶지 않으면요.
2. 쥐새끼, 바퀴벌레, 도마뱀 다 튀어나옴
저에게는 이제 단점이 아니에요. 지구에 인간만 사는 거 아니니까요. 그렇다고 제가 모든 쥐새끼와 바퀴벌레를 사랑한다는 건 아니고요. 이런 날씨에 완전 박멸은 불가능하다는 거죠. 도마뱀은 게다가 굉장히 이로운 동물이에요. 모든 해충을 열심히 잡아먹어요. 제가 자주 가는 한국 요리 사이트에서, 베트남을 혐오하는 글을 봤어요. 너무너무 더럽고, 볼 거 없어서 후회한다는 글이었어요. 그럴 수도 있죠. 누구나 다 좋아할 수는 없으니까요. 충격은 댓글이었어요. 댓글의 대부분이 베트남을 저주하더군요. 이유는 더러워서가 가장 크더라고요. 코딱지 판 손으로 서빙을 하고, 주방은 차마 눈 뜨고 못 봐줄 정도로 더럽고, 길바닥엔 쥐새끼가 내장이 터져서 죽어 있고요. 좋았다는 댓글도 있었지만, 길거리 음식은 먹어선 안 됨. 그건 아예 기본 상식이더군요. 베트남에서 매일 쌀국수를 먹으면서, 너무 행복해했던 저는 좀 많이 외로워지더라고요. 뉴욕 맨해튼에도 쥐새끼는 그만큼 있어요. 너무 과격하게 놀라지들 마셔요.
3. 어쩔 수 없어요. 게을러져요
제가 걸어서 5분 걸리는 스타벅스를 오토바이 택시를 타고 와요. 저 부자 아니에요. 통장 잔고는 백만 원 조금 넘을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어요. 이런 가난뱅이가 20밧(700원)을 꼬박꼬박 써가며, 어떻게든 안 걸으려고 해요. 처음엔 안 그랬죠. 가까운 거리도 오토바이 택시 타는 사람들 욕했어요. 저렇게 게으르니 발전이 없는 거야. 몇 년 살면 자연스럽게 걷는 게 싫어져요. 헬스클럽 러닝머신에서 열심히 달리면서요. 작렬하는 땡볕이 정수리를 지지는 게 싫어요. 기껏 샤워했는데, 끈끈해지는 것도 싫고요. 뽀송뽀송한 상태를 유지하고 싶은 거죠. 될 수 있으면 걷지 않아야 해요. 뽀송뽀송함이 이 나라에선 쉽게 유지되는 게 아니라서요. 그러니까 게을려졌다기 보다는, 쾌적함을 유지하고픈 욕구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네요.
4. 깜짝깜짝 잘 놀라요
특히 큰 소리에 잘 놀라요. 그렇다고 방콕도 고요한 도시는 아니에요. 하지만 경적은 잘 안 눌러요. 운전 더럽게 해도 그런가 보다 하죠. 그러다 보니까 자동차 경적 소리에도 깜짝 놀라요. 태국 사람들은 들릴까 싶게 아주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눠요. 그러다 보니, 목소리가 큰 사람이 상당히 거슬리더군요. 태국어는 성조라는 게 있어요. 음의 높낮이로 같은 음도 뜻이 달라져요. 중국어처럼요. 성조 때문에, 조용조용 말해도 뜻 구별은 좀 더 쉽다고 하더라고요. 방콕에 있다가 서울이나 뉴욕에 가면, 굉장히 위협적으로 느껴져요. 느린 곳에서 살다 보면, 소음이나 속도에 대한 면역성이 현격하게 떨어져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제주도나 귀농의 삶을 택하나 봐요. 저처럼 도시에만 산 사람도, 도시의 소음이 버거울 때가 있거든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저는 태국 방콕에서, 먹고, 자고, 글 쓰며 살아요. 단조로운 삶에 감사하고, 단조롭지 않은 삶을 꿈꾸면서요. 조금씩만 덜 외로웠으면 해요. 제 글을 읽는 사람 모두가요. 저는 이미 덜 외로워요. 제 글을 읽어주셨으니까요. 감사하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