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꿈꾸는과거가 그곳에 있어서는 아닐까?
얼마 전에 넷플릭스에서 '네 마음에 새겨진 이름'을 봤어요. 퀴어 영화지만, 굳이 '퀴어'에 방점을 찍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사랑 영화니까요. 엔딩 크레딧까지 보고 나니까, 큰 울림이 있더라고요. 나이를 먹고 재회하는 첫사랑. 다음날이 되니까 더 슬퍼지더라고요. 현실적인 엔딩 때문에 더 그랬던 것도 같고요. 영화도 좋았지만, 대만 영화라서 더 좋았던 것 같아요.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소녀'도 '말할 수 없는 비밀'도 대만 영화였어요. 대만 영화는 특유의 아련함이 있어요. 셀로판지로 한 번 덧댄 것 같은 화면 속에서 나의 옛날이 보이는 것도 같아요.
대만은 특별하지 않아서 좋다고 생각했어요. 다시 생각해 보니까, 특별한 이유가 있어요. 눅눅하게 바랜 색감이 좋아요. 30년 전에 멈춰 있는, 박제된 듯한 풍경이 그곳에 있어요. 대만은 말끔하지 않아요. 그렇다고 더럽다는 건 아니고요. 외벽이 벗겨지면 벗겨진 대로 놔둬요. 일본과는 또 다르죠. 일본은 말끔해요. 꾸준히 개보수를 해서라도요. 대만은 그렇게까지 꼼꼼하게 덧칠하지 않아요. 시간의 때를 받아들여요. 옛날의 대만은 어떤 모습일까가 그래서 궁금하지가 않아요. 크게 다를 것 같지가 않아서요.
게다가 물가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저렴해요. 대만도 엄연한 선진국인데, 물가만 보면 태국과 큰 차이를 못 느끼겠어요. 제주도 고기국수와 비슷한 족발 국수가 삼천 원, 밀크티가 천오백 원, 장조림 돼지고기 덮밥인 루로우판은 천 원. 유명한 맛집 우육면은 8천 원도 하지만, 골목의 아주 맛있는 국수는 천오백 원이면 먹어요.
지난 3월에 미국은 대만을 환율 조작국으로 지정할 수 있다고 겁을 줬어요. 대만의 환율은 예전부터 심하게 조작한다는 게 기정사실이죠. 수출에 몰빵하느라, 자기 나라 돈의 가치를 너무 후려친 거예요. 시장 가격이 1달러에 천 원이라면, 2천 원에 맞춰 놓은 거죠. 자국 내에서 생산하는 상품은 싸지만, 수입 물가는 폭등할 수밖에 없죠. 그러니 대만 서민들 삶은 얼마나 팍팍하겠어요? 여행자들에겐 로또죠. 선진국의 음식과 서비스를 반값에 누리는 가성비 끝판왕 나라인 거죠. 저는 그저 느낌이 좋은 나라라고 생각했어요. 아니에요. 여우처럼 알아본 거죠. 이 가격은 말도 안 된다. 바겐세일 중인 나라구나. 그래서 매일매일이 즐겁고, 여유로웠던 거죠.
대만 친구들을 보면, 그래서 좀 짠해요. 제법 알려진, 뉴스를 진행하는 대만 친구가, 한국에서 오만 원짜리 방도 벌벌 떨면서 결제하더라고요. 무슨 시상식에 간다고 H&M에서 재킷을 사더라고요. H&M을 무시하는 건 아니에요. 그래도 명색이 레드 카펫인데, 십만 원 안쪽에서 재킷을 사더란 말이죠. 유명인인데 우리나라 웬만한 대졸자 월급보다 훨씬 못하더군요. 2017년 조사 자료를 보면 대만 평균 연봉이 천이백만 원 정도로, 우리나라 중소기업 평균 연봉 2,500만 원의 절반이 채 안 돼요. 충격적이지 않나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착하고, 친절하니 더 마음이 안 좋네요. 원래부터 못 살았던 나라가 아니에요. 우리보다도 훨씬 잘 살았던 나라였죠. 코로나 이후로 성장세라고는 하지만 평균적인 대만 사람들의 삶이 획기적으로 좋아질 것 같지는 않아요. 이 나라도 부동산이 또 폭등이거든요. 그래서 그 없는 돈으로 다들 저축만 한대요. 내수 기업들은 죽어 나가는 거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저렴한 물가가 탄생한 거고요.
어떤 나라든 속사정을 알면 씁쓸한 경우가 더 많죠. 완벽한 나라는 또 어디에 있겠어요? 여행자들은 모르는 척, 행복의 과실만 주워먹다 오는 거죠. 기약할 순 없지만, 대만에 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즐겁게 먹고 마시겠죠. 우리의 노동력에 맞는 대우를 해달라. 피를 보면서 싸우지 않아서일까요? 착해 빠진 대만 사람들 덕에 대만이 좋긴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좋아기엔 참 많이 미안하네요. 대만에서 비 냄새를 맡고 싶어요. 진한 밀크티를 마시면서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내 안에 하고자 하는 말이 이렇게나 많으니까요. 모두 쏟고, 가벼워지고 싶습니다. 그렇게 되면 훨훨 날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