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 시트와 베개보를 벗기고, 담았다. 직원이 수거해 간다. 2인실이지만 독차지하고 편히 잤다. 야간 기차, 국경선 넘기. 담담하다. 나 정도면 담담해야지. 20년을 싸돌아다녔다. 조지아다. 역시 담담하다. 방 찾기, 환전하기, 현지 전화번호 받기. 기차라서 똥도 못 눴고, 속도 부대낀다. 해야 할 일도 많고, 몸 상태도 별로다. 당장 눕고 싶지만 오후 두 시 입실을 맞춰 달란다. 어디서 죽치고 있다 들어가야 한다. 지금 시간은 열두 시.
유튜브를 시작한다고 해놓고, 바쿠에서 찍어 놓은 게 없다. 유튜브에 모든 걸 걸어야 한다. 어쩌면 유튜브는 마지막 기회다. 이걸로 떠야 한다. 대박 날 거야. 많은 사람들이 나 대신 나를 확신한다. 그래서 더 시작을 못 했다. 가시밭 길임을 안다. 블로그를 시작할 때도, 페이스북을 할 때도 내가 손만 대면 난리가 날 거라고 했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페북에 먹방 동영상을 올리면, 얼굴 좀 치우라고 했다. 주로 지인들이었다. 내겐 간섭이지만, 그들은 배려였다. 진심을 다해 지적해준 것이다. 나나 되니까 해 주는 말이야, 오빠. 얼굴 안 나오면 안 돼? 그럴 때마다 움츠러들었다. 그런데 유튜브라니. 어려울 것이다. 댓글도 더 사악해지겠지. 그래도 해야 한다. 욕먹어도 해야 하고, 후회가 돼도 해야 한다. 나의 가난, 지지부진한 책 판매. 유튜브로 막힌 혈을 뚫어야 한다. 절실함이 힘이 되어줄 것이다. 그런데 넋 놓고 아프기만 했다. 벌써부터 삐끗. 십 년을 성실하게 올려보자. 길게 보자고 최면을 건다. 당장은 자신이 없어? 또 피해 갈 구멍을 파니? 나의 계획이 나는 못 마땅하다.
환전을 한다. 기차역이 쇼핑몰과 연결돼 있다. 아래층이 환전소다. 시내 은행이랑 큰 차이도 없다. 만 원 정도 되는 아제르바이잔 돈도 바꿔준다.
유심칩도 바꿨다. 통신사 대리점이 아니라 쇼핑몰 서점에서 판다. 잡지도 파는 작은 서점. 바늘로 톡, 갤럭시 노트 구멍에 꽂는다. 작은 트레이가 나오고, 유심칩을 갈아 끼운다. 5라리. 2천 원. 데이터는 기계를 이용해 충전한다. 스크린이 달린 기계가 아래층에 있다. 그 기계로 데이터도 살 수 있고, 공과금도 낼 수 있다. 버스표도 살 수 있다. 오, 뭔가 세련됐다. 일단 1기가 데이터만 산다. 5라리. 역시 2천 원. 택시 기사가 달려든다.
-10라리만 주세요.
4천 원이다. 편히 갈까? 캐리어 끌고 헤매지 않아도 된다. 물론 안 탄다. 92번 버스를 탄다. 92번, 49번, 29번 버스가 간다. 0.5라리. 200원. 이해가 안 되는 물가다. 버스가 더럽고, 작지만 200원이라니. 동전이 0.4라리뿐이다. 그냥 1라리 내고 말지. 1라리 동전을 넣으려고 하자, 한 여자가 말린다. 지갑에서 0.1라리를 꺼낸다. 땡큐, 땡큐. 조지아 말로 땡큐가 뭐지? 당장 연습해야겠다. 쓸 일이 많을 것 같다. 한 남자가 정류장에서 버스 카드를 충전한다. 기사가 시동을 걸다가 손을 놓는다. 정말 기다린다. 뜸을 들이던 충전이 끝났다. 남자가 탄다.
entree란 빵집에서 두 시간을 때우기로 한다. 조지아의 파리 바게트 같은 곳. 거지가 들어오더니 손을 내민다. 미안해요. 나는 거절한다. 거지가 플라스틱 칼로 종이 식탁보를 지지직 긁는다. 어어어. 내가 눈을 크게 뜨고 어어어 소리를 낸다. 거지도 놀란다. 장난 좀 친 거야. 웃는다. 빵집 종업원이 그녀(여자였다)를 말린다. 진열된 오렌지 하나를 집더니 주머니에 넣는다. 종업원이 웃는다. 오렌지를 훔쳐간 거지를 보고 웃는다.
웃어?
희한한 방식으로 트빌리시가 다가온다.
왜 집이 안 나오는 거야? 구글맵에 나온 주소로는 여기가 맞다. 막다른 골목이다. 이따위로 돈을 벌려고 해? 나 역시 구글맵에 서툴지만, 가라는 대로 갔는데 막다른 골목이면 짜증 정도는 낼 줄 안다. 다들 꽤나 능수능란한 척 스마트폰을 쓴다. 쓰는 것만 쓴다. 아는 것만 유능하다. 확실한 건 스마트폰이 없었다면 에어비엔비는 절대 성공할 수 없었다는 것. 머물던 방을, 쓰던 방을 여행자에게 판다. 대로변에 있지도 않고, 주인이 늘 대기하는 것도 아니다. 알아서 찾아가고, 알아서(안 그럴 때도 있지만) 문을 열어야 한다. 전화가 왔다. 집주인의 딸이다. 대로변 맥도널드에서 기다리란다. 아니, 처음부터 맥도널드에서 보자고 하든지. 맥도널드와 스포츠 센터 사잇길로 내려오세요. 에어비엔비로 온 문자 메시지다. 사잇길에 있는 수많은 집 중 어디? 길이 당신 집이요? 시골에서 길 물을 때 느꼈던 낭패감이다. 저어기로 가세요. 저어기에서 돌아가면 바로 거어기요. 저어기, 거어기, 내려가고, 올라가고. 이런 식이다. 어디로 가면 내려가는 거고, 어디로 가면 올라가는 걸까? 이런 설명을 누가 알아듣지? 모호한 설명만으로도 살아지는 삶. 세상 참 따습게 살았구려. 나의 세계는 까칠하고, 논리적이다.
머리카락이 젖은 오십 대 백인 여성이 활짝 웃으며 온다. 방청소를 끝내고, 샤워를 하고 온 모양이다.
-내 이름은 지아예요. 조지아 말로 태양이란 뜻이죠. 호호호호. 오후 여덟 시면 SPAR 마트에서 음식을 반값에 팔아요.
영어로 떠듬떠듬. 50% 할인은 꼭 필요한 정보다. 그녀는 약간 신이 나있다.
-학생이에요? 여기는 학교가 많아서요. 대학생? 대학원생?
내가 이 맛에 여행한다. 마흔일곱에 학생 소리를 들으려면 트빌리시에 오면 된다. 학생이에요가 바카스다. 피로가 사라졌다. 12층 건물 엘리베이터를 탄다. 0.1리라 동전을 넣는다. 작은 자판기 구멍에 동전을 넣는다.
-내려갈 때는 공짜라우. 호호호호
동전을 넣어야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세계 테마 기행을 찍으러 왔다면 1분, 아니 2분 분량은 된다. 범죄자, 불법 체류자가 한 집 건너 한 집일 것 같은 아파트다. 먼지는 없지만, 먼지만 없다. 모든 낙서는 악마의 주문 같다. 연쇄 살인범의 경고거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역시 어둡다. 50대 아저씨가 마중 나왔다면, 손에 땀 좀 났을 것이다. 집마다 번호가 없다. 조지아는 택배 기사가 집을 어떻게 찾지? 택배가 아예 없는 나라인가? 그녀가 번호 없는 현관 중 하나를 골라 열쇠를 꽂는다. 바닥에 깔린 카펫. 다른 집엔 없다. 11층 반달 모양 카펫. 내 집, 내 방. 재빨리 외운다. 살기 위해선, 외워야 한다. 문이 잘 안 열린다. 쿵, 그녀가 어깨로 민다. 열린다. 느닷없이 밝다.
"이건 교통 카드고요. 이건 엘리베이터에 쓸 동전이요."
현관 앞에 카드와 동전이 담긴 접시가 있다. TV 옆 식탁에는 와인과 사과, 초콜릿이 있다. 깜찍한 2인용 가죽 소파도 보인다. 집에 가져가고 싶은 소파다. 베란다 밖으로 작은 공원과 내가 머무는 곳보다 더 더러운 아파트들이 보인다. 세탁기는 Bosch 제품이고, 중국 항저우에서 온 녹차와 원두커피, 터키식으로 커피를 우리는 커피 머신이 있다. 매트리스는 딱딱하지 않다. 유일한 감점. 2만 4천 원이다. 하루에 2만 4천 원 방에 웰컴 와인이 있다. 도미토리에서 눈치 보는 밤이 지겨워서 나흘간 내게 준 선물. 종일 늙었던 감정이 삽시간에 팽팽해진다. 누군가에겐 산의 정상이 여행이다. 누군가에게는 야자수와 책 읽기가 여행이다. 나는 깨끗한 방과 베란다의 탁자가 여행이다. 나의 빨래를 남의 집 빨랫줄에 걸고, 50% 할인된 음식을 베란다 탁자 위에 하나씩 올려놓는다. 와인을 딴다. 이게 나의 여행이다. 앞으로 두 달 반. 이런 하루 열 개면 족하다. 열 개의 하루를 찾는 여행이 될 것이다. 아니, 아홉 개지. 최고의 하루, 하나를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