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바쿠, 안녕 내 사랑

너는 내 영혼까지 다녀갔다.

by 박민우
기차 밖 풍경

없다. 없어. 노트북 충전기가 없어.


길바닥에 캐리어를 활짝 펴고 뒤적뒤적. 귀까지 달아오른다. 아니, 그 큰 충전기가 없을 리가 있어? 빼먹은 게 분명 있을 거야. 짐을 챙겨서 숙소를 나오면 거국적으로 다시 한번 짐을 확인한다. 니시무라 시게요시 씨가 문 앞에서 손을 흔드신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캐리어를 연다. 일흔일곱의 일본인은 처음부터 내게 호감이었다. 나만 보면 웃고, 짧은 영어로 말을 걸었다. 일본인 천만 명 중 단 한 명도 낯선 이에게 먼저 다가가지 않는다. 민폐고, 피곤한 모험이다. 수명이 15년 정도 남은 일본인은 생각이 다르다. 이번 여행이, 지금의 인연이 단 한 번임을 안다.


단 한 번


의 힘. 대부분이 사실 단 한 번이다. 젊다고 크게 다르지 않다. 다시 올 것 같은 순간도 다시 안 온다. 또 만날 것 같아도, 못 본다. 젊음의 착시에 갇혀서 거리를 둔다. 내 얘기다. 니시무라 시게요시 씨처럼 될 것이다. 되어야 한다. 사람이 좋으면서, 사람을 밀처낸다. 나는 겁쟁이고, 모순이다. 충전기가 있다. 있어. 그럼 그렇지. 있을 줄 알았어. 나를 의심하고, 나를 믿는다. 다들 나처럼 분열증을 갖고 살겠지? 의심으로 지금까지 무사했다. 의심으로 늘 잘 체한다.


-짐을 들어드릴까요?


앳된 청년이 묻는다. 심장이 쿵. 바쿠를 떠나는 날, 바쿠를 확신한다. 나는 바쿠를 사랑한다. 조지아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광객이 덜 오는 나라다. 나 같은 관심 종자를 위한 나라다. 외국인에 대한 시선이 강렬하다. 그런 관심받고 싶어서 여행 다닌다. 불쾌한 순간도 물론 있다. 중고등 학생이 떼로 지나다닐 때다. 바짝 긴장해야 한다. 동양인이야. 진짜 눈이 거의 안 보여. 크크크. 이런 경우가 종종 있다. 중남미에서 특히 잦다. 농담을 종일 지껄여야 하는 나이다. 전혀 다른 인종을 마주하면,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 순간 뱉고 마는, 악의 없는 버르장머리다. 바쿠에서는 비슷한 순간조차 없었다. 식당에서 뭘 먹으면 양념을 가져다주고, 앉아서 먹으라며 의자를 가져다줬다. 어리고, 어린 친구들이 말이다. 수상하게 나를 쫓아오던 한 남자는, 바쿠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이 말만 불쑥 던지고는 사라졌다. 캐리어를 펼치고 부산 떠는 나를 도와주려고, 한 청년이 계속 서성였다. 예쁘장한 아가씨들이 내 걸음에 맞춰 주변을 맴돈 적도 몇 번 있었다. 착각이면 어때? 착각 비슷한 일도 한국에선 없었다. 수줍게


맴돈다.


온천이나 만년설보다 이런 순간이 내겐 여행이다. 액자로 걸어두고 싶은 순간이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 내가 이리 태평하다. 야간 기차를 타고 국경선을 넘는다. 비자는 없다. 문제가 될 것이다. 그들이 더 쩔쩔매며 해결해줄 이다. 내 예상은 맞았다.


-비자를 잃어버렸어요.

-알겠어요.


그게 끝? 야간 기차가 다음날 아침 국경선에서 멈췄다. 군인이 칸마다 다니며 여권을 수거해 갔다. 비자가 없다고 하자, 여권만 달라고 했다.


-지금 뭐 한 거예요? 나를 찍은 거예요? 폰 내놓으세요.


나는 그때 동영상 촬영 버튼을 눌렀다. 녹화 소리가 삑 하고 났다. 좆됐다. 후회는 이미 늦었다. 목소리를 담고 싶었다. 담아두면 얘깃거리가 될 것이다. 나는 곧 유투버로 데뷔한다. 한국 대사관에 가서 서류 떼 오시오. 최악의 경우, 이런 일도 일어날 수 있다. 밤새 온 길을 되돌아가면 피눈물 상황이지만, 흥행엔 플러스다. 남의 불행은 재미 중에도 으뜸 재미다. 그래서 녹화 버튼을 눌렀다. 잘해 주니까 보이는 게 없는 박민우는 선을 넘었다. 철창에 갇혀 시멘트 잠을 자야 마땅하다. 군인은 갤럭시 노트에 찍힌 영상을 찬찬히 본다.


-어서 지워요.


다시 준다. 굳이 범죄자에게 맡긴다. 지운다. 손이 바르르 떨린다.


-잘 가요. 비자 문제는 해결됐어요. 행운을 빌어요. 아제르바이잔에 또 오세요.


웃는다. 군인이 웃는다. 내가 지금 뭘 본 거야? 선을 넘어도, 오만방자하게 굴어도 나를 경계하지 않는다. 보호한다. 밤 여덟 시 사십 분에 탄 기차였다. 다음날 아침 아홉 시 정도에 도착할 거라더니, 열한 시를 훌쩍 넘었다. 1등석을 탔다. 58 마나트. 사만 원이 조금 넘는 돈. 3등석은 찜통이란 얘기를 들었다. 밤에 침낭이 필요할 정도로 쾌적한 1등석이었다. 영어는 열 단어 정도만 아는 여직원은 주기적으로 복도를 오갔다. 볼 때마다 웃거나, 찡긋하며 나를 챙겼다.


단 한 번.


모든 장소는 단 한 번이다. 같은 곳은 다시 가지 않는다. 나의 철칙이다. 호기심이 늘 애틋함을 이긴다. 다시 가는 곳은, 살고 싶은 곳이다. 태국이 그렇다. 바쿠가 애틋해지고 있다. 다시 갈 일은 없다. 없을 것이다. 나의 이런 철칙이 통증이다. 벌써부터 아릿하다.


안녕, 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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