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치유하는 시간, 얼빠진 시간
호스텔 청소 여사는 늘 분주하다. 입으론 중얼중얼. 방 쓴 꼴 좀 봐. 누가 또 서랍 열어놨어? 먹었으면 설거지를 해야지. 이런 혼잣말로 추측된다. 불편함을 넘어 이제는 좀 무섭다. 그녀가 싫어하는 모든 행동들을 삼갈 의향이 있다. 모든 행동을 싫어하는 것 같아서 꼼짝을 못 하겠다. 그녀가 청소를 할 때는 화장실도 안 간다. 내가 손님인데 왜 눈치를 봐야 해? 화가 난다. 화도 나고, 무섭기도 하다. 될 수 있으면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지도록 애쓴다. 거실을 청소하면 발코니로, 방을 청소하면 그때는 거실로 간다. 자발적이지 않은 노동은 분노다. 백 명의 손님이 모두 만족하는 청결. 손님은 그 요구가 당연하다. 청소 여사는 잘해야 본전. 누가 또 똥을 싸질러 놨는지, 드라이로 머리카락을 수북이 쌓아놨는지 십 분이 멀다 하고 확인해야 한다. 그래도 어떤 손님의 눈엔 으으으 머리카락, 아 X발, 변기 똥이다. 누군가를 들들 볶아야, 당연한 청결이 유지된다. 손님이 왜 그런 사정까지 헤아려야 해? 손님들도 일터에서 늘 억울하고, 분하다. 월급은 그래야만 들어온다. 모두가 분한 마음으로 돈을 벌어야, 나의 분함이 덜 억울하다. 그래서 아픈 사람 천지다.
조지아 트빌리시로 밤기차를 타고 간다. 사놨던 기차표가 사라졌다. 그럴 리가 없다. 가방을 뒤집고, 여권 지갑을 뒤진다. 여권 안에 있어야 할 아제르바이잔 비자까지 없다. 종이 쪼가리일 뿐이지만, 엄연히 비자다. 브라질에서도 잃어버린 적이 있다. 큰돈을 벌금으로 요구했다. 현금이 없었다. 각서를 쓰고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여권에 벌금 안 냈음, 외상임. 이런 글이 빼곡히 쓰여 있었다. 기차표에 비자까지 없다. 등신아, 정신을 어디다 두고 사는 거야? 그딴 정신으로 무슨 여행이야? 브라질에선 열병이었다. 폭염에 몸이 녹아서 내내 앓았다. 지금은 역류성 식도염으로 잠을 설친다. 몸이 병들면, 정신이라도 놔야 한다. 정신을 어디다 둘 수밖에 없어서, 어디다 뒀다. 몸은 그 시간 동안 천천히 낫는다. 나만 모를 뿐이다. 내 모든 등신 같은 짓에도 질서가 있고, 이유가 있다. 기차역에서 몇천 원 수수료를 내고 새 기차표를 받는데 성공한다. 비자는? 그건 국경선에서 해결한다. 억류되면 그때 또 발광한다. 절망한다. 나를 저주하고, 여행을 저주한다. 잦아들겠지. 정신줄을 놓고는 기다린다. 회복의 시간은 온다. 어떻게든 된다. 어떻게든 안 된 적은 없다. 너무도 확실한 문장. 어떻게든 된다.
양배추에 토마토를 넣고 수프를 끓인다. 당분간 외식 금지. 병은 내 책임이다. 책임지고 완치하겠다. 커피도 끊었다. 이틀을 그렇게 먹었더니 괜찮다. 많이 괜찮다. 마트에서 웨하스를 산다. 작은 걸 찾았는데 없어서 큰 걸 산다. 밀가루에 설탕 범벅 웨하스 좋을 리 없다. 여행까지 와서 양배추탕을 만들어 먹는 내가 짠했다. 내게 주는 상이다. 대신 조금만 먹기. 절반 이상은 절대 금지. 한 입 크기로 잘라져야 마땅한 웨하스가 붙어있다. 빨래판처럼 생겼다. 통째로 뜯어먹는 웨하스다. 멜로디언을 건반부터 파먹는 기분이다. 이게 여행이지. 남들은 어이없고 말 일인데, 춤이라도 추고 싶다. 신기하다. 재밌다. 이따위 웨하스가 어떻게 가능하지? 그래서
다 먹었다.
아픈 몸은 아픈 정신이다. 폭식하는 사람은 마음 연고부터 발라야 한다. 마음이 안 아프면, 폭식도 멈춘다. 나는 아픈 사람, 아픈 등신.
입 짧은 여행작가의 방콕 한 끼. 초반에 잠깐 반짝 팔리더니 멈췄다. 이삼백 권이나 팔렸을까? 이삼백 권 팔린 책을 백만 권 팔아야 한다. 잠깐 숨이 막힌다. 실패의 공포다. 금세 회복된다. 우주의 질서는 내 눈엔 안 읽힌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분주하다. 나는 몰두하고자 한다. 나의 몰두가 질서를 만들고, 기적을 만든다. 유튜브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내가 보고 싶은 동영상을 만들면 된다. 그동안 콘셉트를 어떻게 잡을까 고민했다. 괜한 짓이다. 어쨌든 하다 보면 방향은 나온다. 너무 각 잡지 않는다. 쉽게 간다.
재원이와 한국어 선생이 다시 만났다. 인스타그램에 다정히 찍은 사진이 올라왔다. 재원이가 조지아로 떠나기 전 다시 만나고, 다시 이야기 꽃을 피웠다.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했다. 거봐, 우주의 질서를 나는 못 봤잖아. 어떻게든 보고 싶으면 봐야지. 만나야지. 간절함은 우주의 질서를 바꾸는 유일한 힘. 사랑은 어쨌든 눈부시다. 백만 권이 팔릴 때까지 나도 간절하겠다. 내 눈에 안 보이는 백만 권의 질서를 믿겠다. 내 몸의 병도, 비자가 없는 국경선도, 미지의 나라 조지아도 나는 모른다. 모른 채로 풍덩! 나는 힘을 뺀 채 다가가기만 할 뿐. 지금까지 나를 살리고, 나를 쓰게 했던 힘이 갑자기 도망갈 리 없다. 어떻게든 된다. 어떻게든 쓴다. 좋지 않은 여행은 없었다. 좋은 여행이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