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탐은 정신병이다
라면을 먹어도 될까? 역류성 식도염에 피할 음식이 뭐였더라? 튀긴 음식과 커피. 기름에 튀겼으니까 라면이다. 안 튀기면 건면, 생면이다. SPAR 마트에서 러시아 글자 빼곡한 팔도 도시락을 보자, 기름 둥둥 얼큰함을 상상해 버렸다. 꽉 막혔던 명치가 일제히 수문을 개방하고, 펩신, 트립신, 펩티다아제가 이번만큼은 믿어보라고 큰소리친다. 냉장고에는 반값에 산 가지찜과 당근, 양배추 피클이 있다. 큰 용기, 작은 용기 중에 어디에 담아드릴까요. SPAR 마트 점원이 물었다. 줄 선 사람들 봐서 싹쓸이 참았더니, 용기 크기를 물어? 큰 용기에 꾹꾹 눌러 담으시오.
먹어도 될까? 잠시 묻는다. 왜 묻지? 안 먹을 거면 사오지를 말았어야지. 수돗물을 끓인다. 조지아 물은 그냥 마셔도 된다. 그래서 마트에 생수가 없다. 녹이 슨 파이프를 타고 온 물이 좋아 봤자지. 아니지. 조지아 사람들이 바보도 아니고. 늘 먹었는데, 늘 좋았던 거지. 조지아 물은 그냥 마셔요. 방주인 아주머니가 큰소리쳤잖아. 세종의 피부병을 치유한 초정리 광천수가 트빌리시 수도관에서 콸콸 쏟아지기라도 하나? 라면 국물은 치유의 성수? 식탐에 놀아나는 개돼지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치유를 꿰뚫어 보는 선지자인 거지. 어차피 먹기로 했으니, 후회도, 자학도 그만. 내일 먹겠다고 약속한 피클도 꺼낸다. 김치도 없는데, 피클을 안 먹어? 멍청하기 짝이 없는 다짐이었다. 어리석음을 용서하는 건 어리석음이다. 알코올 중독자도, 마약중독자도 나는 다 이해되고, 용서된다. 혈관으로 흐르는 라면수프의 약리 작용은, 사지를 떨게 하고, 충혈된 눈의 핏물을 하나씩 제거한다. 혀의 돌기들이 만신창이가 되지만, 곧, 평평하게 마무리가 되고, 느끼한 국물은 식도를 적당히 코팅하며 곧 다가올 불행을 답사한다. 쾌락이 너무 강렬해서, 후회의 감정조차 환각스럽다. 의외로 부대끼지 않는다. 물의 힘인가? 러시아 대평원에서 자란 자급자족 밀가루의 힘인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정말 오늘 밤엔 죽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올리브 오일에 푹 절여진, 땅콩까지 들어간 고소, 고소하고 부들, 부드러운 가지찜도 목구멍으로 밀어 넣는다. 방주인이 준비한 초콜릿 과자도 탈탈 털어 넣는다. 벌벌 떨린다. 오늘 밤이 무서워서,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좋아서.
다음날 눈을 뜨고는 내 고통을 곱씹었다. 목구멍의 이물감, 명치를 타들어가는 고통. 아예 없지는 않았다. 지독하지도 않았다. 정말 치유의 물인가? 조지아 사람들의 평균 수명을 검색했다. 일흔여덟. 딱히 오래 살지 않는다. 물이 아무리 좋으면 뭐해? 뭔 짓을 하길래, 서둘러 죽는 거야? 영양가 없는 정보에 잠시 화가 난다. 아니, 아니! 난 무조건 조지아의 물을 믿겠다. 매일 팔도 도시락을 먹을 수 있다. 약탕기로 종일 다린 한약을 먹듯, 꼭 두 손을 사용해 국물을 퍼마시겠다.
트빌리시는 시시해!
오후의 트빌리시 거리는 더럽다. 아제르바이잔 바쿠에 비하면 추접하다. 잿빛에 그을린 고깃덩어리 같다. 더러움을 가리려고, 벽화가 덕지덕지. 악령 같은 거리, 환자 같은 벽화. 이 감정은, 이 지껄임은 몸에서 나온다. 두려움에 조여졌던 고통이 툭, 터졌다.
엄청난 고통의 밤이다.
고통이 오지도 않았는데, 고통이 보인다. 오늘 밤 잠은 다 잤다. 살려주세요. 빈다. 누구에게? 모르겠다. 용서해 주세요. 마지막 기회를 주세요. 오늘 밤만 무사히 넘기게 해 주세요. 케밥 가게로 달려간다.
응?
내일부턴 새 삶을 약속했다. 오늘 밤은 먹겠다. 핫도그 메뉴를 고른다. 핫도그 케밥은 또 뭐야? 파우치 형태로 안에는 소시지가 가득 들어있다. 하나를 샀더니, 두 개 분량이다. 반을 먹고, 베란다에 앉았다. 반만 먹겠다. 크기를 보고, 즉시 다짐했다. 어제는 바람이더니, 오늘은 고요하다. 어둠에 걸친 트빌리시가 여전히 추잡하다. 방으로 들어가 에어컨을 켠다. 바람이 멈추었다. 큰 비가 먹구름을 타고 올 것이다. 책임의 시간이다. 죽지는 않겠지만, 살아서 뭐하나 싶은 고통이 나를 옥죌 것이다. 이왕 죽도록 괴로울 거면, 반 남긴 케밥을 먹겠다. 뽀득뽀득 소시지에 마요네즈가 듬뿍 들어간 뜨끈한 케밥이다. 더러운 몸에게, 어찌 이리 아름다운 맛이 왔을까?
개돼지야, 먹어, 먹어. 먹고, 죽어!
고통은 최악이어야 한다, 반성은 쉽게 오지 않는다. 죽기 살기로 처먹은 이유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죄인의 여행을 다시 시작한다. 이렇게는 안 된다. 이렇게는 못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