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같은 4일이었다. 2만 4천 원에 5만 원짜리 방이다. 내겐 사치다. 만 원 안쪽이 내 방이다. 4일 독방 썼으면 됐다. 짐을 싼다. Fabrika란 호스텔을 예약했다. 하루 8천 원. 문을 연지 2년 된 초대형 호스텔이다. 떠들썩함이 두렵다. 떠들썩할수록 좋을 때가 있었다. 누가 뭐래도 주인공은 나지. 그때의 내가 낯설다. 그러면 안 가면 되지. 저렴한데 후기조차 완벽하다. 매트리스는 깨끗하고, 단단할 것이다.
-10라리, 10라리.
-5라리
대로변 택시. 10라리에서 9라리, 8라리 내려갈 줄 알았다. 미터기도 없지. 누구 하나 걸려라 죽치고 있지. 바가지 택시는 죽치는 택시다. 밤새 뒤척였다. 역류성 식도염이 그렇게 고통스럽나요? 독자들이 묻는다. 식도로 넘어간 음식물은 염산이 분해한다. 위장은 점액질이 있어서 염산을 견딘다. 식도에는 점액질이 없다. 염산이 목구멍으로 스멀스멀 기어올라온다. 식도를 지진다. 공포영화가 따로 없다. 염산이 기어 나오는데 팔도 도시락 끓이고, 가지찜에 초콜릿으로 입가심까지 했다. 병은 상식적이다. 염치없는 인간에게 가혹할 뿐이다. 호스텔까지는 편히 가고 싶다. 내가 5 라리라고 하자, 택시 기사가 안 잡는다. 5라리는 너무 심했나? 구글맵에서 예상 택시 요금은 4라리. 택시 기사의 어이없단 표정은 뭐지? 연기일까? 진심일까? 딱 두 배만 받겠다는데, 그걸 깎아? 염치도 없는 관광객 새끼. 나는 아무래도 그런 새끼가 된 것 같다. 택시는 포기. 마침 지하철역이 코앞이다. 총 세 정거장. 한 번 갈아타지만 세 정거장이다. 0.5라리. 2백 원. 200원이면 지하철을 태워준다. 싸다면 무조건 신나야 하는 나는, 약간 입맛이 쓰다. 다시 걷는다. 걸어서 10분 거리. 10분만 걸으면 된다. 10분이나 걸어야 한다. 6월의 시작을 알리는 샛노란 햇빛, 울퉁불퉁한 인도, 검게 그을린 건물. 청량한 6월의 태양도 어쩌지 못하는 꾀죄죄함.
-트빌리시는 아니야.
더 밝고, 명랑한 도시를 기대했다. 분명 전쟁과 큰 화재가 있었다. 찌그러진 도시를 손도 못 대고 있다. 대신 벽화로 땜질 중이다. 지하도가 곳곳에 뚫려있는데, 어둡고, 요란하다. 덕지덕지 벽화로 가득하다. 우리나라 전국에 깔린 벽화마을 같다. 일단 칠하고 보자, 채우고 보자. 한 발짝 여유가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너무 가난하다.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보았던 화려함이 없다. 아제르바이잔도 바쿠를 빼면 찌들고 심란하다고 한다. 보여주기 식 화려함이다. 여행자는 진지해질 필요가 없으니, 대충 화려하면 땡큐. 시시콜콜 사연 따위 필요 없다. 트빌리시는 보여주기 식 건물조차 없다. 그럴 돈이 없다. 벼룩시장 옷을 걸친 백인들이 커다란 빵 하나만 들고 걷는다. 가족이 먹을 식량이다. 물가가 싸다는데, 그렇지만도 않다. 케밥은 5라리부터 시작이다. 2천 원. 트빌리시 노동자의 평균 임금은 우리나라 돈으로 35만 원. 35만 원으로 월세를 내고, 밥을 먹고, 출퇴근을 해야 한다. 5라리 케밥은 매일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다. 끼니 때면 들고 다니는 커다란 빵은 정체가 뭘까? 설마 저 빵만 뜯어먹나? 온 가족이? 소금에 콕콕 찍어 먹으면서? 이렇게 가난한데도 아이들은 여행자에게 손을 내밀지 않는다. 치안도 완벽하다. 남의 돈에, 물건에 손대지 않는다. 이슬람의 인종 청소에 맞서 기독교를 지켰다. 와인이 시작된 나라다. 백인을 코카서스인이라고 부른다. 코카서스 사람, 바로 이곳 사람이다. 어떤 이는 그래서 백인의 뿌리로 이곳을 꼽는다. 백인의 고향, 와인의 고향, 기독교의 고향은 형편없이 가난하다. 한 때의 부유함이 그래서 더 슬프다. 자존심으로 자신의 가난을 책임진다. 도시는 전 세계 어디보다 안전하다.
아플수록 아픈 사람만 보인다. 이 도시가, 이 나라가 아프다. 외국인만 보면 환장해서 달려들고, 먹여주는 도시를 상상했다. 전혀 아니다. 아니어야 맞다. 내 몸이 지겹다. 그래서 이 도시가 더 지겹다. 일기에 매일 끙끙대는 소리도 그만 쓰고 싶다. 예상치 못한 고비다. 고비가 없는 여행은 없었다. 예상치 못한 고비를 예상했다. 이제부터가 여행이다.
조지아가 마련한 계획이 있을 것이다. 일단 모른 척해보겠다. 자, 나를 놀라게 해 보렴! 쉽지는 않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