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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아리 촌놈 출세했네 - 유치하지만 감격스러웠던 순간들

미아리 구멍가게 둘째 아들의 믿을 수 없는 신분 상승

by 박민우
IMG_2885.JPG 미국 예일대학교에서 캬아아

1. 오성급 호텔에 당당히 들어가서 똥 누고 나올 때


처음엔 아무나 못 들어가는 줄 알았어요. 문 열어 주는 직원들 눈에 레이저빔이라도 장착된 줄 알았죠. 누가 손님이고, 누가 아닌가? 귀신같이 알아보고, 못 들어오게 막는 줄 알았어요. 강남 8학군 출신 친구놈이 화장실 급하면 꼭 호텔을 찾는 거예요. 더러운 곳에선 똥이 안 나온다고요. 그 귀한 호텔을 개인 화장실로 쓰더란 말입니다. 저는 쫓아만 가는데도, 그저 안절부절, 심장이 콩닥콩닥. 너 누구야? 당장이라도 경호원이 제 멱살을 잡을 것만 같더라고요. 이놈이 너무나 당당하게 용무를 마치고 오는 걸 보고 용기를 얻었죠. 안 쫓아내겠구나. 혹시 부티나는 친구 덕일까?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에라 모르겠다. 남산 하얏트 호텔에 들어가 봤죠. 아무도 제지를 안 해요. 궁전 같은 호텔 화장실을 공짜로 쓸 수 있다니. 이 기가 막힌 비밀을, 다 큰 성인이 되어서야 알아냈단 말이죠. 미국 보스턴 인터 컨티넨탈 화장실이 크고 좋더군요. 딱 제 눈높이에 맞아서 흡족했습니다.


2. 나의 신한 카드가 미국에서도 네덜란드에서도 노프라블럼일 때


카드 제일 처음 쓸 때, 단말기에 긁힐 때마다 조마조마하더라고요. 과연 결제가 될 것인가? 현금만 쓰다 보니, 믿을 수가 있어야죠. 그래서 늘 현금을 가지고 다녔어요. 그때는 LG카드였네요. LG 2030 카드. 이영애랑 배용준이 광고하는 X세대 필수품. 쓰다 보니 익숙해졌지만, 처음엔 이 플라스틱이 돈 구실을 할까? 늘 의심스럽기만 했어요. 그러니 외국에선 더욱더 의심스럽죠. 그 카드로 암스테르담의 마트에서, 뉴욕 맨해튼의 스타벅스에서, 캄보디아 공항에서 현금 인출할 때 아주 잘 썼습니다. 드르륵드르륵 긁고, 읽히는 그 몇 초가 상당히 긴장돼요. 영수증이 뽑아 나올 때는, 쾌변 비슷한 쾌감이 있지 않나요? 외국에서 카드로 긁는 걸, 박민우도 해볼 줄이야. 그런 카드도 이제 몇 년 안 남았네요. 스마트폰이 카드를 대체할 테니까요. 이미 한국은 그렇게 되고 있죠.


3. 비행기를 탔는데, 창가 자리도 귀찮을 때


처음엔 무조건 창가 자리였죠. 비행기를 타는 행위 자체가 목숨 내놓는 일이란 생각을 늘 했어요. 비행기가 이륙할 때, 아, 이젠 죽었구나. 눈을 감고, 이를 악 물었죠. 그래도 비행기 바퀴가 땅에서 떨어질 때, 그 묘한 해방감이 있어요. 돌이킬 수 없는, 저질러진 자유라고나 할까요? 갑자기 내가 머물던 세상이 장난감처럼 보이고, 구름은 어깨 옆에서 잔잔하게 펼쳐져요. 이젠 비행기 감흥 없어요. 자기 바빠요. 공항 수속이 좀 피곤하냔 말이죠. 앉자마자 자다가, 침이 입에서 가슴팍쯤을 적실 때 깜짝 놀라 눈을 떠요. 비행기는 이미 공중에서, 평화롭게 균형을 맞추고 있고, 기내식이 내 테이블에 놓여 있어요. 기내식도 살짝 귀찮기는 하지만, 절대 포기할 수 없죠. 잘 녹지도 않는 버터를 모닝롤에 짓이기면서 저 스스로에게 감격해요. 야, 박민우. 버터를 모닝롤에 비비는 건 어떻게 안 거야?


4. 뉴욕 맨해튼에서 뮤지컬 알라딘을 봤을 때


그것도 앞쪽 다섯 번째 줄이었나? 가장자리였지만, 거의 코앞에서 알라딘 공연을 본 사람입니다, 제가. 뉴욕은 세계에서 제일 비싼 도시 중 하나죠. 뮤지컬은 오죽하겠어요? 그래서 할인하는 곳 찾아가서, 백달러였나? 나름 준수한 가격에 뮤지컬 티켓을 구했어요. 알라딘이 그나마 영어가 쉽다는데, 애니메이션 본 사람은 더 잘 들린다는데. 아니던데요? 하나도 안 들리던데요? 그래도 주제곡 훌뉴월드(Whole new world) 울려 퍼질 때는 눈물이 다 쏟아지더군요. 알라딘과 자스민 공주를 태운 양탄자가 무대 위에 둥실 뜨는데, 괜히 반갑고, 황홀하고, 감격스럽고. 내가 지금 어디에서, 뭘 보고 있는 건가? 믿을 수가 있어야죠. 저는 디즈니 애니메이션도 알라딘으로 시작했어요. 거슬러 올라가면 미키마우스와 도날드덕이기는 한데, 극장 애니메이션은 알라딘이 처음이었어요. 너무나 재밌게 보기도 했고요. 그걸 그 비싼 도시에서 뮤지컬로 보고 있다는 게 감개무량하더군요. 이 걸 보고 몇 끼를 또 굶어야 하나? 뭐, 그런 서러운 눈물은 아니었습니다만.


5. 배용준, 조인성, 김태희 다 나와. 일대일로 인터뷰를 한 사람입니다만


잡지사에서 일할 때 연예인 인터뷰를 했어요. 겨울연가 때 모든 잡지사가 배용준을 잡고 싶어 했죠. 모든 잡지사가 실패한 인터뷰를 제가 독점으로 따냈지 뭡니까? 의류 화보 촬영장에서 '한 밤의 TV 연예'가 한 시간을 잡아먹고, 화보 촬영 끝나면 바로 LG카드 CF 찍으러 호주로 날아가야 하는 상황이었죠. 저는 하이에나처럼 맴돌았어요. 마음은 비웠죠. 십 분만 빼 달라고 해도, 여기저기서 저를 죽이려고 했을 거예요. 호주 잘 다녀오세요. 배용준에게 인사만 건넸는데, 세상에 제 손을 꼭 잡고는 우리 이야기해야죠. 이러는 거 아니겠어요? 캬아아. 이 맛에 기자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조인성은 제가 자취할 때, 집 앞 허접 공터에서 리바이스 화보까지 찍게 했어요.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란 걸 알았습니다. 제 반지하 앞 골목이, 뉴욕 브루클린 싸다구 날리는 분위기 깡패가 되더라고요. 아, 그리고 제가 김태희를 만났을 때요. 연예인 그만 하고, 공부하라고 했어요. 공부가 더 잘 맞겠다고요. 제 말 안 듣고, 연기자 하기를 얼마나 잘했냐고요. 제가 이렇게 안목 빵점 기자였습니다. 데헷


PS 매일 글을 씁니다. 배가 고프면 먹고, 배가 부르면 밥숟갈 놓고. 이런 단순한 삶만 살아도, 우린 훨씬 건강해질 거예요. 모든 삶의 비밀은 단순함에 있지 않을까요? 기본과 순리만 따르면, 우리의 수명은 십 년 이상 늘어날 텐데요. 비밀을 찾지 말고,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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