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추억 8090

1985년, 미아리에 파레스 백화점이 문을 열었다

세상에 우리 미아리가천지개벽,제2의 명동이되려나봐요

by 박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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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아리에 백화점이 다 생기다뇨? 에스칼레이터를 타려고, 명동 미도파 백화점까지 안 가도 된다는 거잖아요. 이름도 어쩌면 이렇게 근사할까요? 파레스, 파레스. 거꾸로 하면 쓰레빠. 누가 이런 근본 없는 말장난을 하나요? 영어 좀 한다는 형들이 팰리스라고 읽어야 맞다는데, 파레스가 입에 짝짝 붙지 않나요? 이름만 놓고 보면 미도파나 롯데보다 파레스가 훨씬 있어 보이지 않나요? 탤런트 원미경이 온다지 뭐예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요? TV 탤런트를 실제로도 볼 수 있다는 건가요? 그건 아니죠.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어요? TV에 갇혀서 나오지도 못하니까, 연기라도 해서 먹고사는 거 아니었나요? 우리랑 똑같은 사람인데, 뭐하러 TV 속에서 답답하게 사나요? 가끔 꺼내 주고 싶다는 생각도 했지만,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 금성TV 조립도 못할까 봐서요. 나도, 탤런트도, 가수도 다 죽는 거예요. 저는 아버지에게 맞아 죽겠죠. 그래도 TV가 꺼져 있을 때는, 쉴 수 있잖아요. TV 틀 때만, 고생하면 나머지 시간은 놀고먹는 거 아니었나요? 새빨간 거짓말이란 걸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려고 파레스로 갔어요. 사람이 이렇게 깔려 죽는구나. 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사람은 처음이었어요. 백화점 구경 온 사람, 원미경 보러 온 사람으로 1층 매장은 전쟁터였어요. 정말 원미경이 오는 게 맞나 봐요. 이 사람들이 다 바보도 아니고, 오지도 않는 원미경을 보려고 구름 떼처럼 몰렸겠어요? 어떻게 탤런트가, TV 밖으로 나와서 사람 행세를 할 수 있을까요? TV 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도 같이 좀 꺼내 주든가요. 원미경만 파레스 백화점에서 특별히 빼내 준 건가요? 개장 이벤트라 이거죠? 피어리스 화장품이랑 짜고요? 정윤희나 금보라도 다 똑같은 사람인데, 그녀들이라고 세상 밖이 안 궁금하겠어요? 주단학, 나드리, 아모레 화장품은 뭐 하는 건가요? 피어리스 화장품 반만 좀 닮으라고 하세요. 화장품 모델로 써먹을 때는 언제고, '테레비 감옥'에 가둔 채, 나 몰라라 하냔 말이죠. 조금씩 조금씩 피어리스 화장품 매장이 가까워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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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을 입은, 너무 작아서 사람 같지 않은 원미경이 활짝 웃고 있더라고요. 진짜네요. 진짜 사람이었어요. TV 밖에서도 숨 쉴 수 있고,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어요. 얼굴도, 어깨도, 목도 다 가늘어요. 저렇게 생긴 사람을 미아리에선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그냥 작다로는 설명이 안 돼요. '좁은 사람'이었어요. 기계로 양쪽에서 꾹꾹 밀어서, 빈대떡을 만들어 놨네요. 그 좁은 얼굴에 눈코입이 다 있고, 몸뚱이에 팔다리가 다 있어요. TV에선 예쁘다 정도였는데, 실물은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그냥 천사더라고요. 사람들이 다들 넋이 나가서, 입도 뻥끗 못해요. 큰 죄를 지은 사람들처럼 눈도 못 마주치고 출구로 얌전히 나가요. 파레스 백화점이 아니었다면, 미아리 사람들은 평생 연예인 볼 일 있었을까요?


https://www.youtube.com/watch?v=LGCk6ge-8tg

파레스 백화점 5층이 롤러 스케이트장이었어요. 미아리 날라리라면 여기서 롤러스케이트 한 번씩은 타 줘야죠. 가수 임병수가 온 거예요. 뮤직 비디오를 찍겠다네요? 정식 뮤직비디오는 아니고, 예능 프로그램용으로 막 찍는, 허접 뮤직비디오였어요. 신촌 크리스탈 백화점과 미아리 파레스 백화점이 대결하는 예능이었는데, 무려 임병수가 파레스 백화점을 응원하려고 귀한 걸음을 해준 거예요. PD 아저씨가 자연스럽게 트랙을 돌라더라고요. 자연스럽게가 뭐지? 파레스 백화점도, 롤러 스케이트장도 저에겐 말도 안 되는 신분 상승이었는데, 연예인까지 코앞에서 활짝 웃고 있어요. 그곳에 모인 미아리 날라리들은 최선을 다해서 트랙을 돌았어요. 그때만큼은 뒤로 가는 겉멋도 자제했어요. 마이클 잭슨 흉내보다는, 우리의 병수형이 더 중요했으니까요. 신비로운 볼리비아라는 나라에서 온, 스페인어 쏼라쌀라 가능한 왕자님, 병수 형아가 미아리까지 와줬어요.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나더라고요. 넘어지면 어쩌지? 벽에라도 부딪히면? 조금이라도 병수형에게 해가 가면 안돼요. 얼마나 정성껏 롤러스케이트를 탔나 몰라요. PD 아저씨는 같은 장면을 몇 번을 찍는 건가요? 그래서 좋았다고요. 병수 형이 어디 안 가고, 우리랑 계속 같이 돌아 주니까요. 우리가 정말 TV에 나오는 건가? 다들 무보수 출연자를 자청했지만 그런 큰 상이 주어질까? 감히 꿈꿔서는 안 되는 엄청난 야망이라, 입 밖으로 내기도 수줍었어요. 우리가 정말 TV에 나올 수 있는 건가? 나와도 되는 건가? 일요일 방영시간을 기다리고 기다려서, 촬영 장면을 봤는데요. 제 모습은 못 찾겠더라고요. 다들 자기 모습 찾기 쉽지 않았을 거예요. 실망이라뇨? 나도 저기에 있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인데요. 신촌 크리스탈 백화점에게 절대로 질 수 없다. 손에 땀을 쥐며, 프로그램을 시청했네요. 프로그램 제목도, 누가 이겼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아요. 확실한 건 두 백화점 모두 세상에 없는 백화점이 됐다는 거죠.


PS 매일 글을 씁니다. 착한 사람이고 싶어요. 그런 생각을 한다는 건, 착한 사람이 아니란 반증이죠. 착하고, 따뜻한 사람이고 싶어요. 만만하고, 손해에 익숙한 그런 사람요. 그런 사람이 될 수 없어서, 그런 사람이고 싶어요. 아주 조금씩이라도 착해져서, 흰머리 가득한 노인이 됐을 땐, 이 정도면 착한 거지. 스스로도 인정할 수 있는 산타클로스가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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