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추억 8090

내 소중한 동심이 무참히 파괴되던 날

그렇게 어른이 되는 거겠죠?

by 박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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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은 것도 같고, 철이 든 것도 같은 순간들이 있어요. 굳게 믿었던 세상이 와르르 무너지던 날요. 그때부터 의심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봤어요. 더 이상 놀아나지 않겠다. 속지 않겠다. 딴지 걸기를 좋아하는 버릇도 그때부터 생겨났죠. 삐딱한 시선은 그러니까 제 탓이 아닙니다만.


1. 할리우드 배우들이 한국말을 전혀 못한다고?


어릴 때 미국 영화 보면서, 어쩜 저 배우들은 목소리까지 좋을까? 또박또박 표준어가 참 듣기 좋았어요. 한국말이 지구말인 줄 알았죠. 적어도 서구권은 다 한국말을 쓰는구나. 성우들이 스튜디오에서 대본 들고 더빙을 한 거란 걸 알았을 때, 정말 허무하더군요. 성우들의 얼굴까지 알게 되자, 몰입이 예전처럼 안 되는 거예요. 특히 마징가 제트의 쇠돌이가 김영옥 할머니였다는 걸 알았을 땐, 폭력에 가까운 충격이었어요. 소년미 넘치는 형으로 상상했던 저는 뭐가 되냐고요? 지구를 구하는 그 똘망똘망한 소년이 김영옥 여사여야 했나요? 그게 최선이었어요? 그럼 정체를 끝까지 숨기셨어야죠. 영화는, 만화는 현실이 아니구나. 어떻게 할리웃 배우들이 한국말을 단 한 마디도 못할 수가 있을까요? 진짜 못 배운 것들이 연기를 하는 세상이었어요.


2. 물냉면의 '물'이 진짜 물이 아니었어?


어머니는 저를 자주 극장에 데리고 가셨어요. 미아리 대지극장, 을지로 국도 극장이 기억에 남아요. 을지로 국도극장으로 영화를 보러 간 날, 극장 앞 분식집에서 어머니랑, 어머니 친구분은 물냉면을 시켜요. 저는 비빔냉면을 시키고요. 어머니가 한 번 먹어보라는데, 제가 기겁을 했어요. 왜 소중한 면을, 물에다가 말아서 먹을까요? 밥을 물에 먹어본 사람인지라, 물냉면이 얼마나 맛없는 줄은 알죠. 식당에서까지 물에 말아서 먹고 싶지 않았어요. 어른이 되면 물맛을 아는 걸까? 물에 면만 담가서 먹을 생각을 하다니. 맛있게 드시는 어머니랑, 어머니 친구분을 보는데 속이 다 메슥거리더라고요. 물냉면이 백 프로 수돗물이 아니라 육수라는 건, 대학생이 되어서야 알았어요. 이렇게 오묘한 감칠맛이었다는 걸 알았다면, 비빔냉면 쳐다도 안 봤을 거예요. 물냉면이 훨씬 맛있는데, 그걸 오랜 시간 몰랐던 거예요. 비빔냉면을 식당에서 먹어본 지 십 년도 넘은 것 같네요. 무조건 물냉면이죠.


3. 에게게, 케이크가 이렇게 맛없는 거였어?


서울 변두리 아이인 저는, 미국에 대한 환상이 아주 컸어요. 주말이면 미군들을 위한 채널 AFKN에서 만화 영화를 해줘요. 못 알아 들어도, 얼마나 열심히 봤는지 몰라요. 미국 아이들이 먹는 아이스크림, 우유, 사탕은 훨씬 더 맛있을 거야. 특히 케이크는 신비로운 맛이 날 거라 믿었어요. 하얗고 풍성한 크림, 꼬불꼬불 장식, 위에 얹어진 초콜릿 등이 마법의 궁전처럼 화려하니까요. 아버지가 크리스마스 때, 버터케이크를 사 오셨어요. 아마 뉴욕제과 버터케이크였을 거예요. 생크림이면 환상이 덜 파괴되었을 텐데, 어째 크림부터 단단한 거예요. 그걸 조심스럽게 입에 넣어 봤더니, 달달한 비누던데요? 씹히는 비누였어요. 이게 뭐라고 생일 때마다 미국 애들은 호들갑을 떨며 처먹는 걸까? 잡채나 갈비와 비교하면, 쓰레기에 가까운 음식 아닌가요? 피자도 그래요. 가장자리 퍽퍽한 빵을 그냥 먹으라고요? 피자는 고등학생 때 처음 먹어 봤는데, 가장자리는 꼭 남겼어요. 먹을 게 늘 모자란 가난한 집 아이였는데도요. 케이크나 피자 때문에 미국 환상이 치명적으로 손상됐다니까요.


4. 크리스마스가 이렇게나 시시한 거였어?


크리스마스가 도대체 뭐길래 갑자기 세상이 달라지는 걸까? 그때는 미아리 아이들 누구라도 교회에 다닐 때였어요. 교회에서는 한 달 전부터 연극 연습을 하고, 학교에서는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고요. 신탁은행 앞에서는 구세군 아저씨가 짤랑짤랑 모금을 했어요. 눈도 어쩐지 크리스먀스 때를 기다렸다가 내려주더군요. 어디서나 울리는 캐럴송은 또 어떻고요? 형과 나도 기대가 컸어요. 크리스마스 아침에는 산타 클로스가 찾아오시겠구나. 얼마나 대단한 선물을 받게 될까? 안 오는 잠을 억지로 청하다가 새벽에 눈을 떠요. 아, 아버지가 화투 친구를 데리고 오셔서 고스톱판을 벌이신 거예요. 그때 버터케이크도 사 오셨죠. 산타클로스 할아비지가 고스톱 치는 방구석까지 찾아오시겠어요? 어쩌면 아버지는 그리도 눈치도 없을까요? 언제 저 화투판이 끝나려나? 자는 척 감은 눈으로,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흐르더군요. 그렇게 서러운 크리스마스는 처음이었어요.


5. 내가 치타처럼 빠른 아이가 아니었어?


꼼꼬미라고 아시나요? 술래잡기의 변형인데, 술래가 지정한 곳까지 다녀오면 아이들이 숨는 거예요. 술래가 올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내가 술래일 때는 아이들이 얼마나 바쁠까? 바람처럼 찍고 오면, 이놈들 숨을 시간이나 있을까? 왜 나만 이렇게 빠른 사람일까? 늘 의아했어요. 제가 5학년 때 반장이었어요. 백 미터 달리기 초시계를 누르고, 가장 나중에 뛰어야 했어요. 김자영(얼마나 충격 먹었으면 이름도 안 잊히네요)이라는 여자 아이랑 저랑 달리기를 하는데, 자영이가 빨라도 너무 빠른 거예요. 거의 30미터는 차이가 났을 거예요. 다리가 왜 이렇게 안 움직이는지. 땅바닥에 접착제라도 발라져 있다면, 자영이만 저렇게 날아다닐 수는 없는 거잖아요. 아, 꼼꼬미를 할 때 나는 더 느렸겠구나. 아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술래가 나였겠구나. 그런 깨달음이 그제야 찾아오더군요.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지 않는다는 걸 자각해요. 아주 고통스럽게요. 주인공인 줄 알았던 제 삶이 깍두기로 전락하는 충격은 참 괴롭더라고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어느 순간부터 모든 존재는 진동이란 생각을 해요. 만져지고,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흔들리는 예감 같은 존재요. 그러니 이 순간만 책임지면 돼요. 어떤 존재가 되겠다거나, 어떤 존재여야 한다는 강박 없이 지금 이 순간 마음껏 흔들리면 돼요. 춤추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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