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실망 박민우! 마흔일곱 살, 클럽 도전 실패

양배추 김치는 성공

by 박민우
20190615_073455.jpg

내가 너한테 실망했다는 말 잘 안 하잖아. 나라도 너를 챙겨야지. 내 자존감은 그렇게 유지된 거잖아. 그런데 어떻게 새벽 네 시 반에 일어날 수가 있어? 클럽 잊었어? 맹세했잖아. 흔들기로 했잖아. 그래, 나이 마흔일곱에 주책이긴 하지. 동네방네 소문 안 내고 몰래 다녀오면 되지. 쉐킷쉐킷


KHIDI


트빌리시 최고의 테크노 클럽. 테크노 뮤직. 전자음 뿅뿅뿅. 막 좋아한다면 거짓말이지. 처음엔 기계 시대 기계들의 음악 같았어. 이게 좋다고? 거짓말이야. 억지야. 전자음이 아니라 전자파 음악 아니야? 전자파 마약 아니야? 추한 소음도 오래 들으니까, 혈관을 타더라. 웃겨, 정말. 이 거지 같은 소음에 내가 가끔은 들썩이는 거야. 라오스 방비엥에서는 웃통 까고 깡총깡총 뛰기까지 했지. 아베르바이잔 바쿠에서 만났던 아리에가 KHIDI에서 찍은 동영상을 보여주더라. 음악이 찰지더군. 조지아에선 전자음도 감성이 느껴지더라고. 아리에는 유대인이야.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이스라엘로 돌아갔지. 신앙심이 남다른 녀석이지. 다른 나라에선 고기도 안 먹어. 유난 떤다 싶은데, 나는 여행자고, 여행 많이 다닌 여행자고, 누구보다 관대해야 하니까, 유난 떠는 신앙심 강한 새끼로 존중해 줬어. 혼자 클럽에서 몸을 흔드는 건 좀 안 어울린다 싶었지만, 설마 걔가 여자 만나려고 흔들었겠어? 콧바람도 가끔 쐬야 신에게 돌아갈 맘이 더 생기는 거지. KHIDI는 트빌리시에서 가장 가고 싶었던 곳이 됐어. 갈 날만 손꼽았지. 몇 번을 실패했어. 금, 토. 이틀만 열어. 열시만 되면 눈이 감겨. 꼭두새벽에 눈이 떠지고, 공원에서 팔자걸음 걷는 감성 할배가 더 좋은 거야.


안돼.


이게 무슨 징조지? 그럴 리가 없지. 일부러 꽃 안 쳐다보고, 꽃 사진 안 찍으면서 버텼어. 아이들도 안 예뻐하려고 애썼잖아. 마음이 할배가 안 되려면, 노력해야지. 억지 부려야지. 늘 명심했는데. 설마 클럽이 귀찮아진 거야? 아니야. 그럴 리 없어. KHIDI는 꼭 가야겠어. 가서 삐융삐융 전자파 음악에 푹 젖어야겠어. 전자레인지 햇반 느낌으로 쉐킷쉐킷 돌아야겠어. 아홉 시 반 되니까 또 눈이 감기더라. 어차피 새벽 두 시가 제일 붐빈다니까. 그때 일어나지 뭐. 거의 다섯 시간을 자고 클럽에 가는 거지. 이보다 더 싱싱한 몸 상태는 없지. 아, 나는 클럽에서 젊은것들보다 더 젊어져서 깡총대겠구나. 이 모습을 가족과 친구들에게만 안 들킨다면, 주말 이틀은 KHIDI 죽돌이로 살래. 열 두시쯤 눈이 떠지더라. 조금만, 조금만. 잠이 너무 달콤해서 등이 안 떨어지는 거야. 조금만 더 자고 가자. 구글맵 정보로는 오전 열 시까지 한다잖아. 그러니까 조금만.


네 시 반


그리고 새벽 네 시 반에 눈이 떠진 거야. 아, 젠장. 아, 제기랄. 양말까지 신고, 그대로 잤어. 샤워하면 흔들릴까 봐. 신은 양말 그대로 뛰쳐나가려고 했단 말이야. 지금이라도 나가면 되지. 열 시까지라며? 싱크대 양배추가 눈에 확 들어오는 거야. 어제 새로 집을 옮겼어. 마트 까르푸에 들렀지. 역류성 식도염에 좋다는 양배추를 사려고. 수프를 끓일까? 이 집 냄비가 좀 작은 거야. 방에 냉장고도 없더라고. 아니 에어컨까지 있으면서 왜 냉장고가 없는 거야? 1인분 수프 만들기? 이거 해낼 수 있는 사람 지구에 몇 없을 걸? 토마토 반쪽, 양파 반쪽, 감자 3분의 1쪽. 이렇게 인수분해하듯 분리하고, 정렬해서 증발의 양까지 계산해서 1인분? 남은 재료는 어쩔 건데? 그건 어디다 둘 거냐고?


양배추 김치를 담그는 거야.


천재적 순발력으로 양배추 김치를 생각해냈어. 김치를 담그면 쉬어터져도 김치고, 유산균이잖아. 몸에 좋다면 근성 있게 퍼먹는 종자니까, 성실하게 며칠 안에 다 끝낼 거야. 양배추에 콜리플라워(왜? 콜리플라워 김치는 왜 안돼?), 피시소스, 소금, 마늘, 파프리카 가루를 까르푸에서 왕창 사 왔더랬지. 새벽 네시 반. 빨리 클럽에서 쉐킷쉐킷해야 할 시간. 몸이 양배추로 가는 거야. 얼척없어서. 마늘을 까고, 양배추를 소금에 절이는 거야. 배추랑 다르게 어찌나 잘 절여지는지. 절인 양배추 대충 물에 헹구고 마늘 찧어서 넣고, 파프리카 가루(고춧가루가 자극적이라 생각해서), 피시 소스, 설탕 대충 뿌리니까 끝. 너 이렇게 쉬운 김치였냐? 배추김치와 난이도 자체가 다르잖아. 샐러드 만드는 노력이면, 그냥 만드는 거였네. 익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왜 이리 맛있는 거야? 익으면 정말 장난 아니겠다. 창가에 둬야지. 어제부로 30도를 넘겼더구먼. 지글지글 노릇노릇 트빌리시 볕 받으면서 제대로 한 번 익어 봐. 이제 일곱 시. KHIDI에 갈까? 미쳤어? 공원 갈 시간이야. 더 늦으면 더워져. 빨리 모자만 쓰고 나가. 공원 의자에서 지나가는 개새끼 열 마리 보고 오라고.


박민우 정말 실망이다. 양배추 김치 담그려고 락엔락까지 샀냐? 소담히 담긴 모습이 그렇게도 좋아? 실망이야. 실망. 솜씨 좋은 것까지 실망, 대실망.


20190615_053725.jpg

PS. 매일 글을 쓰면 책 한 권이 팔리겠지. 그 마음으로 글을 씁니다. 박민우 식 오체투지. 지금은 '입 짧은 남자의 방콕 한 끼'로 오체투지 중입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맞아, 조지아는 웃음을 잃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