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만요, 저 숨 좀 쉴게요. 압도적 은의 세상

치앙마이 은사원 왓 시리수판

by 박민우

골목에 갇힌 신세, 참 고맙습니다요


아니, 이게 제가 까칠한 건가요? 말이 되나요? 미리 차 못 들어갑니다. 푯말 하나면 되는 일이잖아요. 동네 사람들 다 나와서,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네요. 사원 앞에 주말 장이 서는 걸 세상 여행자들이 다 알아야 해요? 이 좁아터진 골목에 왜 장사를 허락한 거죠? 꾸역꾸역 들어오는 차를 보세요.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가 없잖아요. 미안해요. 죄송합니다. 우리를 따라온 선량한 차 주님들 한 대씩, 한 대씩 후진하십니다. 오로지 신중합시다. 다들 경건한 마음으로 오셨죠? 차 긁히고, 악에 받히지 마시고요. 천천히, 심호흡하면서 천천히. 그래요. 그래요. 후진 실력 끝내 주네요. 네, 네, 끝이 보입니다. 그나저나 시장 사람들 다들 자기 일처럼 나와서 챙겨 주세요. 골목 입구에 푯말 하나면 될 일을요. 그래도,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안 감사합니다.


복권에 미친 태국 사람들


그리고 형님, 꼭 사원을 가야겠어요? 치앙마이 널리고, 널린 게 사원이잖아요. 갈 마음이 나냐고요. 어디에 차를 대려고요? 아예 한참 걷자고요? 걷는 거 좋죠. 그래도 밥 때니까 밥을 먹어야죠. 여행 팀워크 모르시죠? 양보도 하고, 양해도 구하고. 그러면서 친해지고, 추억도 공유하고. 이게 여행이죠. 형님, 모르시는구나. 제가 잘 난 여행 전문가니까요. 그냥, 제 말이 다 옳아요. 제 말만 들으면, 여행이 편해집니다. 형님이 양보할 타이밍이네요. 배는 안 고파요. 체한 느낌은 가셨지만, 더부룩함은 여전해요. 그냥 다 귀찮아요. 골목에서 30분 씨름했으니까요. 형님도, 이미 맛이 간 얼굴이에요. 저만 좋자고, 이러는 거 아니라고요. 복권 살려고 그러죠? 기도발로 복권 좀 당첨되어 보려고요? 그놈의 복권, 복권. 태국 사람들 복권 사랑, 병이죠. 병이에요. 뉴스에서 봤죠. 자동차가 강물로 첨벙, 전복 사고가 났어요. 견인차가 차를 들어 올리는데요. 태국 사람들이 뭐 하고 있었게요? 자동차 번호를 폰카로 막 찍어요. 아이돌 팬클럽에 온 줄 알았어요. 운전자가 무사했다고요. 행운을 부른 차라고요. 너나 할 것 없이 폰 들고 자동차를 찍어요. 자동차 번호를 찍어요. 그 번호 복권 사려고요. 비슷한 번호라도 사려고요. 형님의 소원은 내일 당장 퇴사죠? 고향에 나무 백 그루 더 심을 돈만 있으면 되죠? 얼마나 간절한 줄이야 알죠.


내게 다가오는 풍경이란


저는 사진이나 찍을게요. 형님은 기도하세요. 복권 번호가 그냥 나오나요? 형님 땅이 밀림처럼 나무로 꽉 찬 풍경을 상상하세요. 주렁주렁 망고와 파파야를 떠올리세요. 트럭에 가득 싣고, 시장에 팔아요. 어허, 회계사 연봉 안 부럽군요. 그 돈으로 아시죠? 불쌍한 글쟁이 어엿한 단칸방도 지어 주세요. 방은 작아도 돼요. 창으로 보는 풍경은 커야죠. 책상도 하나 튼튼한 놈으로 요. 이케아 안돼요. 좋은 마음이 당첨의 기본자세라고요. 저만 좋겠다고 이러는 거 아니죠. 그래요. 형님. 사원에 오니, 마음이 좋으세요? 그래도 오길 잘했다고요? 여기 유명한가요? 은장식이 왜 이렇게 촘촘해요? 왜 이리 섬세하죠? 아니, 뭐가 이렇게 화려해요? 기도발이 끝내주는, 복권 명당 사원 같은 건 줄 알았죠. 아, 잠깐만요. 저 오버하고 싶진 않아요. 그런데, 뭐죠? 사원 벽이, 천장이 다 은이네요? 진짜 은인가요? 그냥 은이 아니라, 그 은을 가르고, 새겨서 각자의 힘으로 빛을 나누잖아요. 움푹 들어가고, 겹겹이 도드라져서, 공간의 무의미함을 밀어내잖아요. 가장 놀라운 풍경이란 뭘까요? 저에겐 모르는 풍경이에요. 알고 왔다면 어림없죠. 저를 놀라게 못 해요. 제가 누군데요? 몸 절반만 걸치고 사진만 찍으려고 했죠. 신발 도로 신고 나오려고 했어요. 몸이 반만 걸쳐서는, 꼼짝을 못 하겠네요. 포위됐죠. 사로잡혔죠. 아름다움이야 다 다르죠. 누구에게나 아름다울 순 없어요. 끝을 보는 집념은, 누구나 동의하죠. 동의할 수 없는 집념으로 새기고, 팠어요. 마음을 다스리고, 자신을 놓은 사람들이 만들었네요. 제가 꼼짝을 못 해요. 그 힘이요. 그 마음이요. 제게도 왔어요. 꼼짝을 못 하겠어요.


저는 이제 모르고 살까 봐요.

아무 욕심 없이

우연과 어리석음에 맡겨 볼까 봐요.

입 반쯤 벌리고 살까 봐요. 공기 반, 투덜 반.

남부럽지 않은 멍청함으로 더 멍청해져 볼까 봐요.

보게 될 풍경은 보게 돼있죠.

만나게 될 사람은 만나게 되어 있어요.


오늘 번호는 제가 고를게요.

73으로 끝나는 복권을 사세요.

제가 태어난 해니까요.

소의 해니까요.

태국 소고기가 맛이 없으니까요.

아, 그냥 73으로 하세요, 좀!

저 탄력 받았다고요.

기도 대충 하세요.

지금 내 마음이 우주의 기운으로 랩을 하고 있어요.


치앙마이가 저랑 밀당을 하는군요.

알겠다, 알겠어.

내가 질게.

이런 끼쟁이를 무슨 수로 이겨요, 제가!


PS 제가 간 곳은 은으로 유명한 왓 시리수판입니다. 사원 내부로 여자는 못 들어간다고 해요. 미안한 마음에요. 제가 동영상을 찍어 왔어요. 건물 바깥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아예 안 가지는 마세요.


제 글이 지구 반대 쪽까지 닿기를 원합니다. 공유는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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