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았습니다. 사랑합니다.
-아아악
비명이란 게 참 신기하다. 그 어떤 훈련 없이 본능만의 힘으로, 바로 터져 나온다. 차가 폭죽 같은 걸 밟았나? 아이들이 장난을 쳤나? 고래처럼 뚱뚱한 관광버스였다. 왼쪽에서 바짝 붙어서 쓰으윽, 범고래의 혀로 물개를 핥듯, 능숙하게 쓰으윽. 백미러가 힘없이 나가떨어지는 소리였다. 따아악. 운전기사 조지, 나, 말카즈. 조지가 가장 먼저 정신줄을 잡았다. 클랙슨을 빵빵, 빵빵빵. 고래 버스를 쫓는다. 버스 기사만 이 시끄러운 클랙슨 소리가 안 들리나 봐. 그냥 간다. 내뺀다. 조지의 얼굴을 보며 감탄한다. 추격전 용으로 최고의 얼굴이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전사 같다.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서 오디션 없이 배역을 꿰찰 얼굴이다. 나는 그가 버스를 세우고, 운전기사를 싹싹 빌게 할 인재라는 걸 안다. 버스기사는 참 복도 없지. 나약하고, 힘없는 운전사들을 놔두고 하필 조지라니.
조지의 차가 옆에 바짝 붙는다. 버스가 선다. 관광버스였다. 안에는 관광객(으로 보이는)이 가득. 불안한 표정이다. 숨 막히는 추격전이었다. 분노는 그때 다 썼는지, 조지도, 중년의 운전기사도 고분고분. 잠깐의 대화 후에 버스는 멀어져 간다. 돈을 받았는지, 보험 처리를 했는지 나는 모른다. 나는 이 광경이 마냥 신기한 철없는 구경꾼.
-투어, 투어
조지는 해맑게 투어(관광)를 외친다. 구르자니. 트빌리시에서 차로 두 시간 거리. 태어나서 한국 사람은 처음 봤을 것이다. 손님 놀랄 준비를 하시오. 엄청난 볼거리를 보장합니다 얼굴이다.
-포토, 포토
러시아,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사람들까지 온다는 진흙 목욕탕이다. 허리 아픈 사람이 많이 온다. 노인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담소를 나눈다. 건물을 지나쳐 왼쪽 편에 철조망이 쳐있다. 진흙 바닥이 보인다. 조지는 신이 나서 포토를 외친다. 사진 안 찍고 뭐 하니? 나를 닦달한다. 찍으라니까 찍는다. 더, 더 찍어. 자꾸만 찍으란다. 아니, 이 새끼가. 삼촌뻘 어른한테 뭘 자꾸 찍으라는 거야? 자세히 보니 진흙에서 기포가 뽀글뽀글 올라온다. 화산지형인가 보네. 망원 카메라로라도 잡아야 하는 귀한 진흙님이시니? 들어가서 만져나 보면 몰라. 이 삼촌은 콜롬비아 카르타헤나에서 기포 뽕뽕 진흙에서 목욕까지 한 분이셔. 그때도 호들갑 안 떤 내가 어떻게 철조망 멀리 진흙 바닥에 흥분하겠니? 삼촌이 미안해. 남들보다 본 것도 많고, 아는 것도 많아서. 삼촌은 흥분한 조지가 좀 짜증 나. 공연장, 그 옆의 새 공연장, 유서 깊은 교회 건물. 네가 보라는 거 다 봤어. 고마워. 고맙지만, 재미는 없다.
-저, 산만 넘으면 러시아, 체첸 공화국이 나와
가로로 길쭉한 산맥들이 첩첩이 펼쳐진다. 오, 여기가 국경지대구나. 저 어마어마한 산들로 나라가 나뉘는 거야? 전망이 더 좋은 곳이 있을 텐데. 이런 곳을 보여줬어야지. 눈치 없는 조지.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뭔가를 볼 마음은 없다. 배가 고프다. 아침 잘 안 먹는다. 아침 일곱 시부터 끌고 나왔으니까 뭐라도 먹겠지 했다. 빵 한 조각에 커피라도 먹겠지. 헛된 기대였다. 속이 허하다. 조지가 뭔가를 보여줄수록 더 허하고, 더 힘이 빠진다. 현지인들은 자신들의 자랑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신축한 쇼핑몰로 데리고 가는 사람도 봤다. 우리 마을도 큰 마트 있다. 극장 있다. 그게 자랑인 사람도 있다. 많다. 도시 못지않은 '어엿함'을 과시하고 싶어 한다. 외지인은 현지인들의 일상이 더 좋다. 수백 년, 수천 년 쌓여서 그윽한 기적이 된다. 사는 사람들은 잘 모른다. 부엌이 지붕이, 다락이, 오래된 식탁이 얼마나 특별한지. 사실 그런 것도 지금은 안 보고 싶다. 배가 고프다. 나름 초대 아닌가? 손님 배 고프냐고 묻지도 않아?
차가 골목에 선다. 말카즈가 먼저 내린다. 마당이 있는 집 대문을 활짝 연다. 조지의 차가 들어간다. 말카즈의 집이다. 내가 묵는 에어비엔비는 아내 안나나와 남편 말카즈가 운영한다. 말카즈는 주로 여기서 산다. 과일을 재배한다. 아내 안나나는 트빌리시에 아이 넷을 맡는다. 7,8월이면 여기서 온 가족이 여름을 난다. 화장실은 구멍만 뻥, 재래식. 집은 시원한 대신 어둡다. 누가 살고 있다는 게 안 믿긴다. 이게 창고지, 무슨 집이야. 헝클어진 옷가지, 흐트러진 잡동사니. 정돈된 전원풍의 집을 상상하던 나는 실망한다. 마당 타이어 그네가 제일 마음에 든다. 트빌리시에서 싣고 온 짐을 내린다. 옷가지도 있고, 문짝 같은 것도 있고, 책도 있다. 같이 옮긴다. 나는 배가 고프지만, 나는 거든다. 어째 자발적 즐거움이 하나도 없다. 조지가 차를 몰고 사라진다. 둘만 남았다. 옛 소련 차가 아닐까 싶은, 나보다 형님이 확실한 차에 시동을 건다. 말카즈가 타라니까 탄다. 안전벨트는 새끼줄처럼 굳이 매겠다고 하면 묶어야 한다. 그냥 가슴팍 위에 얹어 놓는다. 말카즈도 얹어 놓는다. 안전벨트를 안 매면 벌금이라도 내는 모양이다. 내가 어이없어서 웃고, 말카즈가 더 크게 웃는다. 말카즈는 아침을 먹었구나. 아무래도 의심스럽다. 관광, 짐 옮기기. 이젠 뭐가 남았소?
말카즈의 농장으로 간다. 자두, 살구, 복숭아가 주렁주렁. 말카즈가 노란 살구를 준다. 복숭아 아니냐니까 살구란다. 살구는 시지 않나? 달고, 폭신하다. 천도복숭아 맛이 살구에서 난다. 살구가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있어? 잼이나 만들어야 겨우 먹을만해지는 거 아니었어?
이렇게 살아야 한다.
순간의, 확신이다. 빈속에 살구, 빈속에 자두. 허기를 갓 딴 과일로 채우며 살아야 한다. 욕망은 늘 한 번뿐인 삶, 화끈하게 막 먹으라고 꼬드긴다. 음식에 간을 하고, 기름에 튀기고, 열에 볶는다. 한 끼라도 열과 양념에서 자유로운 음식으로만 채우기. 그렇게 산다면 병은 없다. 그런 확신이 든다. 이곳 사람들은 체취가 심하다. 말카즈는 예순 나이에 체취도 없고, 쌩쌩하다. 십 분만 더 딸게. 오 분만 더 딸게. 내 눈치를 보면서 허겁지겁 과일을 딴다. 그러시든가. 나는 차가운 사람이구나. 뭘 따야 하는지 물어나 보고, 도와주고 싶은 티라도 내야지. 나는 멋대로 거닐며 자두를 찍고, 살구를 찍는다. 나는 작가니까. 이건 노는 게 아니라고. 찔리지만, 모른 척한다. 사실 일머리가 없어서, 엉뚱한 것만 딸까봐 손을 못 걷어부치겠다. 나약한 글쟁이다.
말카즈는 78kg을 따서 도매상에게 120라리를 받았다. kg당 600원. 우리나라 돈으로 5만 원. 꽤 된다. 일 년 내내 수확하는 게 아니니까 일당으로 치면 안되겠지. 안나나와 4남매는 이 돈으로 먹고, 공부하고, 자란다. 조지아 재래시장에선 붉음 붉음 봉숭아를, 자두를 1kg 천 원에 살 수 있다. 동남아시아보다 저렴하다. 과일로 삼시 세끼 가능한 사람은 조지아에 와야 한다. 말카즈는 마트에서 빵을 사고, 토마토와 소시지를 산다. 5분만 더, 10분만 더. 말카즈는 오늘 더 열심히 땄다. 손님상을 봐야 했으니까. 손님 먹일 빵값, 소시지 값을 벌어야 했으니까.
말카즈는 대학 교수였다. 전기공학과 교수. 러시아어, 리투아니아어, 불어까지 한다. 태어나고 자란 이곳에서 과일을 딴다. 지금이 좋고, 충분하다. 하필이면 영어만 못 하는 교수님이다. 대화는 떠듬떠듬. 우리나라 나이로 마흔아홉에 결혼했다. 가족 등쌀에 떠밀려서 결혼한 거냐고 물었다. 아니란다. 그냥 공부가 좋았고, 안나나를 만났고, 안나나가 좋았다. 좋은 것만 하다가 마흔아홉에 결혼해 4남매의 아빠가 됐다. 지금의 가족이 좋고, 구르자니 복숭아 밭이 좋다. 내 기준으론 참 대책 없다. 대책 없는 말카즈는 체취 없이 건강하게 늙고 있다. 대비한다. 고민한다. 걱정한다. 이것들을 잘하는 사람들은 기름진 식탁에서 한 끼를 먹고, 소화제와 혈압약을 먹는다.
-자고, 내일 같이 올라가
잠이 확 깬다. 술도 깬다. 무슨 소리세요, 교수님. 잠은 집에서 자야죠. 내 집, 내 방이 있는 트빌리시로 가야죠. 여기는 흉가에 살짝 걸친 집이라고요. 싹 다 들어내야죠. 벽칠 새로 하고, 조명 밝은 걸로 바꿔 달아야죠. 지금은요. 손님 재우면 안 돼요. 저도 며칠 익숙해지면 잘 지내겠지만요. 정글의 법칙 난이도라고요. 살짝 어이없을라고 하네요. 와이파이만 돼도, 어떻게 자볼 텐데 말이죠. 말카즈 집에서 5분 정도 걸었다. 대로변이다. 미니 버스가 온다. 트빌리시로 가는 미니 버스. 7라리(약 3천 원). 조지아의 국민 교통수단, 마슈르카다. 내 손엔 붉은 자두 열다섯 알, 자두를 조려서 만든 조지아 국소스 케말리가 들려있다. 나는 사랑받았다. 확인했다. 이제 내가 조지아를 사랑할 차례다. 조지아를 찬양할 차례다. 누군가가 조지아에서 상처 받으면, 내가 위로해주고, 변호해줄 차례다. 졸음이 쏟아지고, 마테가 보고 싶다. 우리 막내, 마테야. 이 천사를 어쩌면 좋냐? 삼촌이 간다.
PS. 매일 글을 씁니다. 저만의 오체투지 방식입니다. 매일 글을 쓰면 책 한 궈은 팔겠지. 작은 욕심으로 씁니다. 글로, 책으로 닿고 싶습니다. '입 짧은 여행 작가의 방콕 한 끼' 오체 투지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