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반에서 만난 기적 같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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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빌리시에서 아르메니아 예레반으로 넘어가려면 마슈르카를 타야 한다. 마슈르카는 승합차다. 매시간 정시에 출발하는지 8시에 출발했다. 총 여섯 명. 중국 우한에서 온 여행자 셋, 프랑스 할아버지, 조지아 총각, 그리고 나.
-물만 좀 사 오면 안 돼요?
-안돼요.
거구의 운전사는 쌀쌀맞았다. 한 시간 정도 갔나? 섰다. 작은 가게였다. 자기 물만 사 온다. 나도 재빨리 물을 산다. 아이스크림도 산다. 조지아 사람은 참 신기해. 물 필요한 사람은 지금 사세요. 이 말이 입에서 안 나와? 아르메니아 사람이 그렇게 친절하다던데. 아르메니아 사람들이 소문대로 친절하면, 조지아를 배신할 의향 있다.
점심시간. 이미 국경선을 넘었다. 아르메니아 한갓진 주유소, 작은 식당. 운전사가 피자처럼 생긴 빈대떡 두 장을 오물오물 먹는다.
-달러나, 조지아 돈은 안 받나요?
내가 물었다. 식당에서 남 먹는 것만 보는 거 정말 비참하다. 중국인 셋은 이미 받아들였다. 고분고분. 프랑스 할아버지도 마찬가지. 운전기사가 식당 여주인에게 물어봐 준다.
-노오
물어봐 준 게 어딘가? 문신 가득 조지아 총각도 냠냠 맛나게 처먹고 계시다. 아르메니아 돈이 있다. 아르메니아에 자주 와본 사람이다. 국경선을 오가는 게 직업이다. 승객들이 아르메니아 돈이 없어 쫄쫄 굶지만, 자기만 먹으면 된다. 운전사지, 가이드가 아니니까. 다 맞고, 자기 배 채우는 상식적인 행위를 하고 있지만, 나는 저 두 새끼가 아니, 저 두 새끼님이 꼴 보기 싫다. 가게에 섰을 때 과자라도 사놓으라고, 이 한마디만 해줘도 되잖아. 여섯 시간이 걸린다. 여덟 시에 출발했으니 두 시에 닿는다. 그때 먹으면 된다. 큰일 아니다. 둘만 정말 열심히, 깔끔하게 점심을 먹었다. 맛있냐? 이 돼지 새끼들아!
-인터넷 타임!
운전기사가 인터넷 공유기를 켠다. 인터넷 타임을 외친다. 공유기가 있어? 세상에, 조지아에서 아르메니아로 넘어가는 승합차에서 인터넷이 된다니. 밥 좀 혼자 처먹으면 어때? 밥보다는 인터넷이지. 조지아 사람이 이렇다. 살갑지는 않지만, 마냥 미워할 수가 없다. 대놓고 친절한 사람에게는 없는, 되려 믿음직한 느낌이 있다. 사람이 다 같을 필요는 없지. 친절은 의무가 아니고 선택인 거고. 다 다르고, 달라서 예쁘다. 그걸 보려고 여행한다. 같다면, 모두가 상식에 부합한다면 여행할 필요 없다. 그 사람이 그 사람. 재방송 같은 여행을 뭐 하려 해? 아, 참고로 운전기사는
아르메니아 사람이었다.
내 모든 해석을 허락하더니, 아르메니아 사내였다. 조지아에서 운전대를 잡았으니, 조지아 사람일 거라 생각했다. 충격이 이만저만. 아르메니아인들은 친절하다며? 사회주의 국가였던 나라들은 기본적으로 데면데면한 건가? 요령이 없는 거야, 못돼 처먹은 게 아니라. 이러쿵저러쿵 그만. 친절 타령 좀 그만해. 상처 받는 걸 즐기지? 그게 재밌지? 뭐라도 되는 양, 한두 명으로 세상 꿰뚫어 보는 짓 좀 하지 마. 나는 내가 지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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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메니아 세 번째 날. 75번 버스를 탄다. 현대 승합 차를 개조한 마을버스. 차비는 100드람(240원). 중심가까지 얼추 30분. 조지아 트빌리시에선 지하철로 웬만한 곳은 십 분이었다. 구글맵이 거의 먹통이다. 목적지만 찍으면 버스가 주르륵 떴다. 트빌리시에선 되고, 예레반은 안 된다. 조지아는 미국과 친하고, 아르메니아는 러시아와 친하다. 그게 이유일 수도 있겠다. 어떻게 시내로 가지? 방법이 없다. 러시아에 사는 집주인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75번 버스를 타란다. 그래서 탔다. 구글맵을 본다. 시내에서 되려 멀어진다. 반대쪽 버스였다. 내린다. 길을 건넌다. 10분 정도 기다린다. 75번 버스가 온다. 어이, 러시아 집주인. 길 건너 타란 이야기 정도는 해줘도 되잖아? 나는 뭐 믿고, 차선을 골랐지? 나도 어떻게든 되겠지 했다. 이러면서 배우는 거지 뭐. 시내를 가는 건 이제 틀릴 일 없다. 버스를 타고 느릿느릿, 불편하다. 조지아로 돌아가야지 뭐. 내가 제일 못하는 거. 버티는 거.
-파파라치 카페가 어디죠?
구글맵에서 평점이 좋은 카페였다. 근처인데 계속 헛도는 느낌. 한 건물에서 나오는 여자 셋이 보였다. 물었다.
-거기는 카페가 아니고, 클럽이에요. 요 위에 있는 vinyl store 카페 가보세요.
그녀들이 지금까지 있다 나온 곳이다. LP 판이 가득한 카페였다. 턴테이블에 LP 올려서 음악 듣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신기한 건 이런 복고풍 카페는 꽤 된다. 신촌에서, 통영에서도 이런 카페에 종종 갔다. 마이클 잭슨, 보니M 앨범이 보인다.
-아람 하차투리안 음악을 한 번 들어볼래요?
카페가 예뻐서 갤럭시 노트에 담는 중이었다. 한 여자가 오더니 사장님을 소개해드릴까요? 묻는다. 네, 답한다. 굳이 사장님까지? 부담스럽지만, 필요 없어요라고 답하는 것도 거북하다. 젊은 남자가 왔다. 젊은 사장은 아람 하차투리안에 대해 묻는다. 두툼한 권투 장갑 같은 헤드폰을 머리에 씌어준다. 볼륨을 얼마나 올렸는지, 고막이 지끈지끈. 웅장하면서, 울컥하는 러시아 풍의 교향곡이 머리통을 꽉 채운다. 아람 하차투리안이 누굴까? 아르메니아 출신 서양 고전 음악 작곡가다. 우리나라의 윤이상 작곡가가 떠올랐다. 평탄하게 살고 싶었지. 그게 잘 안됐어. 그저 선율뿐인데도, 이야기가 들린다. 아르메니아인 150만 명이 죽었다. 터키인들은 오스만튀르크를 벗어나려는 아르메니아인을 잔인하게 죽였다. 인구(300만)보다 많은 500만 명이 전 세계로 흩어졌다. 아람 하차투리안이 쩌렁쩌렁, 헤드셋이 땀으로 축축하다. 사장은 괜찮다며 자기 손으로 내 땀을 닦는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몇 번을 말했다. 아람 하차투리안이 내게 찾아왔다.
- 짜이는 우유를 넣는 것과 크림을 넣는 두 가지가 있어요. 카다몸을 넣은 걸로 드실래요? 계피만 넣은 거요? 차가운 게 되는지 물어볼까요?
짜이를 고르지 말 걸. 인도에서나 마시는 짜이가 반가워서 시켰다. 인도에는 이렇게 복잡한 짜이가 없다. 짜이를 시키면, 짜이를 준다.
-그냥 클래식한 걸로 드릴게요. 짜이는 차갑게는 안 된대요. 이렇게 찾아 주셔서 감사해요.
서빙을 하는 여자가 활짝 웃었다. 내가 땀 흘리는 걸 보고 차가운 것도 가능한지 물어봐 줬다. 손님들이 내 주변 테이블부터 앉는다. 나에 대한 호감이 느껴진다. 강하게. 점심때도 그랬다. 식당을 동영상에 담는데 직원들이 손으로 V자를 그리며 활짝 웃었다. 지금 뭐 하는 건지부터 보는 게 아니라, 일단 환영이고, 일단 우리도 찍어 주세요였다. 카페테리아 식당이었는데, 뭘 고를까 고민하는 내게 아르메니아 전통 요구르트를 추천했다. 터키 아이란 같은 거. 시디신 무설탕 요구르트. 중동지방 어디에나 있다. 그녀가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아서, 먹겠다고 했다. 여러 스푼을 담아서 먹어보란다. 먹어보고 고르란다. 먹어보고, 먹겠다고 했다. 돌마도 달라고 했다. 돌마는 포도잎으로 돌돌 만 잎 만두 같은 거.
-이건 그냥 밥알만 들어가 있어요.
만두를 기대하는 내 마음을 읽었다. 조지아에서 내내 나를 못마땅해했다. 너무 불만이 많아. 너무 평가하려 들어. 아르메니아에 오니, 내 불평들이 설득력을 얻는다. 이곳 사람들은 내 주문을, 질문을 듣는다. 기억한다. 조지아에선 가끔은 무시당하고, 가끔은 아예 잊힌다. 다시 묻고, 다시 확인해야 한다. 길에서 한 아이가 사진을 같이 찍고 싶다고 했다. 아이답지 않게 정중했다. 온 가족이 택시를 기다리는데 나를 보더니 함께 손을 흔든다. 우리는 보통 꿈보다 시시한 삶을 산다. 꿈은 현실보다 위다. 꿈이니까, 멋대로 황홀하다. 조지아가 이런 느낌일 거라고 꿈꿨다. 다가오고, 악수하고, 웃고, 흥분하고. 나는 그냥 있을 뿐인데, 반가움이 되고, 활력이 된다. 피리 부는 소년처럼 현지인을 홀린다. 조지아가 아니라 아르메니아다. 현실일 리 없다. 꿈은 꿈일 뿐이다. 이런 느낌을 왜 다들 쉬쉬했을까? 이게 나만 황홀하고 말 일인가? 시리아가 파키스탄이 내겐 꿈이었다. 뜻밖이었고, 열렬했다. 꿈의 나라를 한 곳 더 추가한다. 아르메니아. 예레반.
네 번째 황홀을 찾았다.
PS. 매일 글을 쓰고 있어요. 저만의 오체투지 방식입니다. 매일 글을 쓰면 책 한 권이 더 팔리겠지. 작은 소망으로 씁니다. 차곡차고 조금씩 다가가겠습니다. 지금은 '입 짧은 여행 작가의 방콕 한 끼'로 오체투지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