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이 예레반 변두리라고 해서, 우울하냐고? 전혀 아니다. 가격만 생각하고 방을 찾았다. 그랬더니 변두리다.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나 유서 깊은 장소는 언젠가는 가게 돼있다. 나는 시간이 좀 많다. 뭘 보게 될까? 두근두근. 뭘 먹게 될까? 두구두구두구두구. 내 심장 반응이 이렇다. 가장 흔한 한 끼 가격이 무엇보다 궁금하다. 조지아 사람들처럼 이곳 사람들도 큰 빵 하나가 밥이다. 온 가족이 빵을 뜯으며 한 끼를 해결한다. 빵만 먹는다면 한 끼 가격은 몇백 원이다. 빵에다가 오이와 소금만 곁들인다. 거기다 짜디짠 치즈 추가. 나는 그렇게 먹기 싫다. 나의 한 끼는 아니다. 슬프게도 케밥(여기 사람들은 슈와르마라고 부른다)만 보인다. 케밥은 천 드람 전후. 2,400원. 잘 익은 고기와 양파가 가득. 한 개면 두 끼도 가능하다. 또 이거냐? 맛있지만 지겹다. 싸구려 라면 두 봉지에 토마토와 양배추만 넣어 끓인다. 몇 번을 먹었다. 나름 주식이다. 처음만 빼고는, 심드렁해서는 먹는다. 며칠 만에 아르메니아에 대한 애정이 급격히 식고 있다. 내가 베트남과 태국을 사랑하는 이유는 수많은 한 끼 때문이다. 쌀국수와 볶음밥이, 샌드위치와 반찬가게가 빼곡히 펼쳐져 있다. 아이스크림, 과일주스, 바나나 튀김. 후식도 무궁무진하다. 저렴하지만 풀코스로 단백질, 섬유질, 비타민, 수분을 섭취할 수 있다. 이런 나라가 지구에 열나라도 안 된다. 동남아시아는 축복이다. 싼 맛에 가는 사람들은 좀 더 자부심 가지길.
아르메니아도 풍요롭다. 마트에선 모든 걸 가득 쌓아놓고 판다. 비닐봉지에 담아서 무게로 판다. 원두커피도, 과자도, 초콜릿도, 양념도, 밀가루도, 설탕도 가득가득 시각적 효과가 무섭다. 파는 방식일 뿐이지만, 넘쳐나는 식재료의 나라가 된다. 생강가루와 마늘가루를 발견했을 때 특히 기뻤다. 일반 마트에서 그런 가루까지 가득가득 쌓아놓고 판다. 꿀 한 스푼, 생강가루 반 스푼. 훌륭한 생강차가 뚝딱. 라면에 마늘가루만 톡톡. 싸구려 라면이, 수제 라면이 된다. 최상등급의 빨간 토마토 840그램에 5백 원, 어깨 빠질 것처럼 묵직한 양배추 한 통이 3백 원이다. 마트 옆 길바닥에서 체리를 판다.
-3kg에 천 드람이요.
멀쩡히 걷는 나를 막는다. 딴엔 용기를 낸 듯.
-됐어요.
이미 손에 한 짐이다. 지나치다가 발길을 돌렸다. 굉장히 싼 가격이잖아? 아르메니아 돈은 아직 가늠이 안 된다. 가늠이 안되는데도 싸다. 너무 싸면, 이해를 넘어, 각성으로 직행한다. 3kg은 많다. 2kg만.
-600드람만 줘요.
심지어 깎아준다. 얼마지? 환율 계산기 어플을 켠다. 600드람, 천오백 원이다. 체리가 2kg에 천오백 원? 알이 좀 작고, 뭉개진 것도 섞였지만 2kg에 천오백 원이다. 절반은 뭉개지고, 완두콩 크기의 체리여야지. 천오백 원에 너무 멀쩡하신 체리다. 체리의 천국 칠레에서도, 캘리포니아에서도 이 가격은 어림없다. 전 세계 기자들은 백 날 천 날 누가 죽나? 폭탄이 어디서 터지나만 기다린다. 천 원에 묵직하게 체리를 담아주는 예레반을 왜 취재하지 않는 걸까? 나라도 호들갑을 떠는 이유다.
-세반 호수에서 잡은 거예요.
세반 호수는 코카서스에서 가장 큰 호수다. 나의 다음 장소가 될 확률이 높다. 민물 생선이다. 민물 생선을 훈제를 해서 판다.
-요리할 필요 없어요. 빵이나 감자랑 먹어요. 맥주와도 잘 어울려요.
민물 생선이면 가시도 많을 텐데... 망설이다가 한 마리만 산다.
-500드람이요.
천이백 원이다. 체리만큼 충격적이지 않을 뿐이지, 마음에 쏙 드는 가격이다. 맛이 좋다면, 그땐 충격받겠다. 케밥뿐인 걸까? 낙심하던 차였다. 이게 맛있어지면 내 여행은 활기를 띤다. 토마토와 양배추. 두 가지 채소에 생선이다. 아르메니아 사람이라면 양배추 대신 오이를 준비했을 것이다. 난 역류성 식도염이니까 양배추. 살점을 뜯는데, 바삭 껍질은 비닐 같다. 씹히지 않고, 잘리지 않는다. 그냥 버린다. 아깝다. 이 부분이 제일 맛있는 부분일 텐데... 짜니까 감자나 빵이랑 먹으라고 했다. 짜게 먹는 사람들이다. 도저히 못 먹을 정도로 짠가? 우리네 고등어자반과 비슷하게 짜다. 살점에서 훈제 향이 올라온다. 가시에서 쉽게 분리되는 살이 거뭇하게, 반지르르하게, 아래쪽으로 갈수록 뽀얗게 토실하다. 생선의 지방이 살점에 골고루 스며서는 전체적으로 촉촉하다. 그래서 껍질이 그 지경으로 말라비틀어졌구나. 오호, 오오오. 점점 진폭이 상승하는 중저음의 스피커처럼 내가 스스로 울린다. 모든 살점이 나를 흔든다. 이 나라의 토마토를 주목해 주길. 말도 못 하게 붉고, 진하다. 세상 토마토가 다 같지 않다. 나라를 잘못 만나서 아르메니아의 토마토가 흔하고, 싼 대접을 받는다. 셰프들이 애완견처럼 쓰다듬고 싶어지는 토마토다. 그런 토마토를 한 입 씹는다. 토마토는 외계 행성에서 왔다. 비슷한 게 없는 이유다. 나만 주장하지만, 내 주장에 다들 솔깃할 것이다. 은하계를 닮은 토마토 내장의 착실한 수분이 포동포동 생선 살에 맞선다. 둘 다 사정없이 부드러운 주제에 내 입에서 까불고 있다. 그래서 암팡지게 씹었다. 삼켰다. 한 끼가 아니라, 거룩한 식도락이 된다. 생선 가격 1,200원에 단 돈 백 원(토마토 하나 가격에 양배추 몇 가닥)만 더한 만찬이다. 이런 것만 있으면 된다. 이런 거여야 한다. 내 여행은 더욱더 사소해야 하고, 사소한 걸로 자지러져야 한다. 내가 누군지, 내가 어떻게 다녀야 하는지. 세반 호수에서 자라고, 구워진 생선 한 마리가 일러줬다. 왜, 다섯 번째 황홀이 아닌가요? 이제 내 눈은 더 높아졌다. 더 대단한 황홀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지금은 너무 행복하니까, 다들 따지지 말고, 나만 부러워해 주길.
PS. 매일 여행기를 씁니다. 저만의 오체투지. 더 많은 이들에게 닿는, 가장 낮은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글 하나를 올리면 한 권의 책은 팔리겠지. 작은 소망입니다. 지금은 '입 짧은 여행 작가의 방콕 한 끼'로 오체투지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