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도 같지 않나요? 월급날이나 카드 값나갈 때요, 울화가 확 치밀지 않나요? 허리끈 그렇게 조였는데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면요. 다 때려치우고 싶잖아요. 어제 제가 그랬어요. 들어오기로 한 돈이 왜 안 들어오냔 말이죠. 제가 서류에 약해요. 신고에 약해요. 연수입이 2천만 원 이하던가? 그거 아래면 환급금이 있다면서요. 굴욕이 뭐가 중요해요? 돈이 생긴다는데. 나라에서 가난뱅이 챙겨준다는데요. 그래서 빈칸 채워서 신고했어요. 그 돈이 이쯤이면 들어와 있겠지. 제가 여행 시작한 지 한 달 반이 지났으니까요. 안 들어와 있는 거예요. 욱하더라고요. 한국 가서 또다시 방콕으로 넘어가야 하는데. 방콕에서 빈둥거려야 하는데요. 비행깃값, 생활비를 계산하다가요. 치밀어 오르는 거예요. 나름 최선을 다하잖아요. 종일 글도 쓰고, 유튜브도 준비하고, 제 책 홍보도 하고. 부끄럽지 않게 살고 있거든요. 세상 여행자 5% 이내로 열심히 살아요. 물론 한국에서 월급 받는 분들과 경쟁하면 하위 5% 정도겠지만요. 그래서 욱, 그래서 억울. 슬픈 글이 나오더라고요. 어쩌겠어요? 청승맞아도요. 그런 글이 나올 땐, 그런 글이어야죠. 글을 딱 쏘고 나면요. 아, 올리고 나면요. 별생각이 다 들어요. 꼭 이렇게까지 써야 했어? 지질해도 말이야, 낄낄댈 수 있는 정도에서 끝내야지. 진짜 울컥해서 신세 한탄을 하면 어떻게 해? 내 마음 좀 풀어주려고 쓴 글인데, 더 후회가 되더라고요. 스티븐이란 친구가 그때쯤 얼쩡대요. 배낭 하나 들고서요. 잘 생긴 벨기에 총각이더라고요. 아시잖아요. 호구조사 일일이 하는 거 무례하고, 촌스러운 거. 그냥 여자 친구 이야기 안 하고, 아내 이야기 안 하니까 총각이라고 할게요. 해군이에요. 벨기에가요. 코딱지만 한 바다 끼고 있는데요. 해군이 있대요. 잘 몰랐지만, 아주아주 작은 나라일 거라고 좀 제가 무시했나 봐요. 해군까지 있는 나라였어요. 다 갖춘 나라군요. 너무 싱글벙글이라서 더 부아가 치밀더라고요. 제 기분을 이 새끼는 모르니까요. 토해낸 글 싹싹 핥아서 다 먹고 싶은 심정을 알 턱이 없으니까요. 좋은 일이 있나 봐요. 싱글벙글
-공항에서 짐이 없어졌어. 40명 승객 짐이 몽땅 사라졌어. 칫솔도 없어. 사야겠지? 내 짐은 폴란드 어디쯤에 있나 봐.
빈손으로 탈래탈래 숙소로 온 거예요. 속으로 피눈물 흘리면서 태평한 척은... 아시죠? 이렇게 구김 없이 자란 애들 좀 얄미운 거. 쩔쩔매는 꼬락서니 안 보여주는 애들 딱 싫어요. 천국에서 미끄러져 떨어진 천사라도 되는 줄 알아요. 서양 사람의 외모는 두 가지죠. 한국에서 굉장히 추앙받는 외모와 자기 나라에서 인기 쩌는 외모. 한국은 무조건 비율이죠. 키 크고 팔 다리 길고, 순정만화에서 쏙. 반대로 서양 사람들은 각진 얼굴에 남성미 뿜뿜, 턱수염도 빼곡을 좋아해요. 이 자식은요. 동서양 고루 통할 외모군요. 190cm에서 1cm 모자란대요. 190cm가 아니라서 약간 아쉽대요. 그래서 이리 해맑나 봐요. 어디서나 관심받고, 사랑받아서요. 희끗희끗 머리털만 보면 사실 좀 중후한데요. 대충 저보다 열다섯 살 정도 어린 것 같아요. 노키아 폰을 꺼내기 전까진 상당히 거슬렸죠. 너덜너덜 가죽 주머니, 빨간 자판 조명. 은붙이처럼 화려한 노키아 폰이 쑥 나오는 거예요.
-2005년 부모님이 선물로 사주셨어. 이것도 갖기 싫었어. 배낭은 2009년 10월에 산 거야. 물건은 한 번 사면 끝까지 써.
호스텔 벽에 붙은 지도를 찬찬히 보네요.
-택시 기사가 아예 돌아온 건 아니군. 맞아. 여기를 지나쳤네. 지도에서는 잘렸지만 이쪽 길로 온 거네.
스마트폰이 없는 사람이군요. 메시지로 안부를 전하는 군인이로군요. 집에 컴퓨터는 있대요(휴, 아예 정글북은 아니었어요). 컴퓨터 구글맵으로 동선을 외웠대요. 지도 위의 선을 현실의 길과 연결시킬 수 있는 사람도 있군요. 공간지각력 천재인 거죠. 실제로 배에서 지뢰, 장애물을 탐지하는 일을 한대요. 8개월간 집에 못 간 적도 있다더군요. 스티븐은 피곤해서 약간 뇌가 흐물흐물해졌나 봐요. 수다를 못 멈추겠나 봐요. 제가 저 병에 걸려서 아는데요. 그냥 지껄이게 놔둬야 해요. 막을 방법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나 지금 좀 바쁘거든. 내 우울함에 몰입 좀 하게 놔둘래? 차를 렌트했대요. 한 달간 아르메니아를 다닐 거래요. 스페인, 스위스, 프랑스, 오스트리아, 마케도니아, 크로아티아 이런 나라들을 자전거로 다녔대요. 세상에! 텐트도 없이 숲속에서도 잤대요. 맨몸에 옷만 걸치고, 숲속 모기떼와 자는 거죠. 사람이 제일 무섭대요. 고요하고, 어두운 세상은 괜찮대요. 그러니까 아르메니아 숲 한가운데서 숙면을 취할 놈이란 거죠. 나도 따라갈래. 이 말이 쑥 들어가더군요. 한 놈은 짐을 몽땅 잃어버렸고요. 한 놈은 먹고 살 걱정으로 심란한 아침이었죠.
-좀 조용히 해줄래?
기억하시나요? 새벽 다섯 시에 문을 두드렸던 러시아 처자. 남자 친구는 아르메니아 사람. 제가 문 열어 준 덕에 숙소에서 잘 수 있었잖아요. 아침 여덟 시에, 우리 보고 조용히 해달래요. 자기 잔다고요. 좀 얄밉지 않나요? 머리 검은 짐승 거두는 게 아니라니까요. 흠, 머리가 금발이긴 했어요. 스티븐은 소리만 낮추고는요 계속 떠들어요. 입 다물고 소파에서 눈 좀 붙이라고 해도요. 눈치가 더럽게 없어요. 그렇게 조잘조잘. 그래요. 제가 이런 사람들 사이에 있어요. 머물면, 못 만날 사람들이죠. 곧, 영영 헤어질 사람들이죠. 이 순간이 마지막인 인연들이 숙소에 우글우글. 저만 생각했어요. 저만 봤어요. 지금을 못 봤어요. 지금의 가치를 못 봤죠. 새소리가 엄청나게 크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아요. 공터에 평행봉을 발견한 아침이기도 했죠. 운동 좀 하려고 해도요. 그 흔한 것들이, 아르메니아 예레반에는 없어요. 하긴, 미국 뉴욕, 샌프란시스코에도 변변한 철봉 더럽게 없더이다. 좋은 아침이었네요. 왜 이리 불만이 많았을까요? 이 세상의 진동을 감지하며 살려고요. 흔들려야죠. 흔들리지 않고, 어떻게 울림을 전하겠어요? 스티븐이 짐을 결국 못 찾고, 2009년 배낭을 땅바닥에 던지는 꼴을 보고 싶어 하면 안 되겠죠?
-지금 트빌리시 가는데 같이 갈래?
와, 방금 소름. 러시아 친구인데요. 말이 없는 친구였어요. 절 싫어하는 줄 알았거든요. 며칠 사라지더니, 오늘 아침에 보이네요. 어디를 다녀왔나 봐요. 반갑게 제게 인사를 하네요? 저도 반갑더라고요. 오래된 친구라도 되는 양.
-내 차가 있거든. 지금 조지아로 가. 너도 가고 싶으면 같이 가자.
아니, 이 미친놈아. 정말 데려갈 마음이 있었으면 어제 이야기해야지. 무조건 따라갔다면 저의 여행은 어떻게 됐을까요? 저는 확실히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나 봐요. 같이 여행하고 싶을 만큼요. 스티븐이 반짝반짝 수다를 떠는 것만 봐도요. 내가 가진 것들을 알아요. 내가 볼 수 있는 것들을 봐요. 쉬운 것 같죠? 어려워요. 열심히 훈련해야 해요. 저는 지금 봐요. 들어요. 누구나 할 수 있죠. 대부분이 또 못 해요. 오늘은 오래간만에 양배추 수프를 끓여야겠어요. 새 가스레인지가 들어온 날이거든요. 호스텔 사장 양반, 큰돈 썼어요. 불쏘시개 없이 불을 켜는 가스레인지는 처음이네요. 이번 여행에서. 아, 행복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