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는 안 와요. 그렇게는 못 봐요
당근 하나, 토마토 한 개(굉장히 뚱뚱하고 빨간), 양파 한 개, 마늘 한 통, 양배추 작은 거 하나. 이렇게 천오백 원. 양배추 수프를 두 번 끓일 수 있다. 한 번 끓이면 두 끼를 먹는다. 총 네 끼 가격이 천오백 원.
-재키 챈, 재키 챈
채소 가게에서는 내가 재키 챈(성룡)이 된다. 이소룡이 되기도 한다. 아뵤오. 권법 흉내를 내면 주인장 부부가 너무 좋아한다.
-조지아 복숭아가 열 배는 더 싼데
조지아를 다녀온 아르메니아 남자는 조지아 물가가 훨씬 싸다고 했다. 아르메니아에서 체리가 3kg에 2,400원이다. 조지아의 절반, 아니 반의반 가격이다. 나는 아르메니아 물가가 더 싸다고 했다. 아르메니아 사람에게 아르메니아 물가를 우겨댔다. 날이 더워지고, 체리가 무성하고, 체리가 시원찮게 팔리는 날 내가 예레반 변두리에 있었다. 날이 더워지고, 복숭아가 무성하고, 복숭아 가격이 폭락한 날 아르메니아 남자가 조지아에 있었다. 이곳이, 그곳이 각각의 정답이 된다.
-민우, 여기야, 여기
스티븐. 내가 한 시도 쉬지 않고 떠들어 봐서 아는데, 너도 좀 지나쳐. 그래서 카페 간다며 나온 거야.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란다. 내가 글 좀 쓰긴 하지만, 나불대면서 자판 두들길 정도는 아니야. 그러니까 네가 말 안 시키는 곳으로 도망 왔던 거야. 카페에서 잠깐 노닥거리다 나왔더니 또 너냐? 이란에서 온 녀석이랑 둘이서 여자들 점수를 매기고 있었니? 노천카페에서? 썩 보기 좋지는 않다만, 내가 선비질로 분위기는 안 깰게. 어울리는 게 그리 간절하지도 않은데, 나도 몇 번은 맞장구를 쳤어. 화난 사람처럼 보일 필요 없잖아. 무리에서 외톨이가 되는 게 좀 무섭긴 해. 이란 녀석은 곧 텍사스로 유학을 가. 이란에서 미국 유학을 갈 정도면, 꽤나 사는 집 아이겠지. 자기네 나라에선 이렇게 못 놀잖아. 머리카락도 얼굴도 가릴 필요 없는 여자들을 보니까 얼마나 눈이 뒤집히겠어? 네가 너무 적극적으로 맞장구를 치니까, 내 행동반경이 더 줄어들잖아. 나는 너희들과는 달라. 박민우는 꼴에 이런 자부심이라도 챙기고 싶은 걸까? 결국 같이 낄낄대고 있잖아. 나는 무능하고, 나는 졸려.
공화국 광장 분수쇼를 또 보러 갔어. 너희들에게서 빨리 빠져나오고 싶기도 했고. 처음 분수쇼의 감동이 여전해. 영화 음악, 클래식, 팝송이 골고루 분수와 섞여서 출렁댔잖아. 불꽃이 아니라, 물꽃을 봤지. 저녁 아홉시가 되면 쟁여놓았던 바람이 한꺼번에 예레반으로 들이닥쳐. 더위를 기억하는 몸뚱이에 빙수 같은 물방이 흩뿌려지지, 격정 바람이 뺨을 비벼대지. 물꽃이, 물기둥이 치솟고, 흔들려. 때마침 음악이 흐르고. 그런데 오늘은 첫날과는 다르네. 내내 교향곡에 아르메니아 노래만 나와. 모르는 노래들 뿐이라서, 어째 시들해. 세상에 없는 그 낭만이 아니었어. 토요일의 분수쇼와 목요일의 분수쇼가 이렇게나 다르다니.
예레반의 토요일 분수를 보세요. 우리의 상식은 나이만큼이나 오염됐죠. 뉴욕 타임스퀘어의 밤이 끝내줘라고 말하면 안 돼요. 왼쪽으로 삼성 광고판, 오른쪽으로 애플 광고판이 번쩍이는 오후 열한 시 십오 분의 타임 스퀘어가 진짜야. 이젠 이렇게 말해야 해요. 그냥 봤다고, 그냥 갔다고 거길 본 게 아니죠.
-헤이, 마이 프렌드, 컴컴
예레반에 며칠 있었다고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다 있다. 첫날 봤던 아이와 아이 아빠가 찡긋 눈인사를 하고 지나갔다. 그런데 또 나를 찾는다. 인도에서 온 친구들이다. 기억한다. 자기네 집에 가서 밥을 먹자고 했었다. 당연히 거절했다. 인도 음식이야 먹고 싶지. 밤늦게 먹으면 또 배앓이를 하니까. 역류성 식도염 때문에 정중히 거절했다. 또 그 친구들이다. 매일 오나? 나처럼 한가한 여행자가 흔치 않은데...
-우리랑 같이 세르비아에 갈래? 우리가 비행깃값이랑 다 댈게.
인도나 중국 부자들은 천문학적 부자지. 재벌 2세들인가 봐. 세르비아를 다 가보나? 잠시 솔깃했다.
-네 여권 밑에 우리 여권을 깔아줘. 우리는 아주 가까운 친구라고 해줘. 한국 여권은 아무도 시비를 안 걸잖아. 한국 사람 친구라고만 해줘.
여행자가 아니다. 보따리 상이다. 인도 물건을 가져와 팔고, 아르메니아 물건을 인도에 판다. 최근에 천만 원을 날렸다. 아르메니아 사기꾼이 열심히 모은 돈을 가지고 튀었다. 빈털터리로 집에는 못 간다. 체류 기간이 다 되어간다. 비자를 연장해야 한다. 세르비아를 다녀오면 비자 연장이 된다. 며칠 전 인도 친구 두 명이 세르비아 입국도 못 하고 쫓겨났다. 어떻게든 다녀와야 한다. 내가 그들의 희망이다.
-안돼, 나는 여기서 조지아로 갈 거야. 미안해.
고민도 안 되는 부탁이다. 나는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마음은 남았다. 잠깐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도 생각했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내 소원은 한국에 가는 거야. 내 친구가 한국에서 한 달에 백오십만 원을 번대.
나는 그들의 소원인 나라에서 왔다. 한 달에 백오십만 원. 한국이라면 어렵지 않다. 그들에겐 내가 꿈이고, 부러움이다. 나는 매일 행복해야 하고, 불평을 입에 담으면 안 된다. 하지만 나는 심란하다. 나보다 잘 나가는 이들이 얄밉다. 내가 제대로 살고 있나 의심스럽고, 저녁마다 온몸이 가려운 이유가 궁금하다. 치명적인 병을 키우고 있나? 내 수명이 두렵다. 어머니, 아버지가 갑자기 눕게 되면 어떻게 하지? 나 하나 책임 못 지는 가난뱅이가? 검고 진한 '만약의 공포'에서 매일 허우적댄다. 그들이 생각하는 나는, 무조건 행복이다. 백오십만 원을 벌 수 있고, 천만 원 사기도 안 당해본 나는 완벽한 부러움이다. 우리는 그 어떤 존재가 되어도, 행복할 수 없다. 가진 것들은 금세 당연해진다. 결핍을 우선 솎아내서는, 우선 괴로워한다.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한다가 나를 괴롭힌다. 어떤 존재도 같다.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그러니까 내 안의 결핍을 안기로 한다. 결핍에도, 소유에도 곁을 내준다. 하나만 갖는 건 불가능하다.
PS 매일 여행기를 씁니다. 저만의 오체투지입니다. 글로 더 낮아지고, 글로 더 널리 닿고 싶습니다. 매일 책 한 권이 더 팔리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입 짧은 여행작가의 방콕 한 끼'로 오체투지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