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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우 Jul 07. 2019

눈물로 남을 거야 - 예레반

예레반은 기적, 예레반은 사랑

호스텔 사장 에이샷(ashot)은 밤 열한 시에 퇴근한다. 에이샷의 퇴근 시간을 기다린다. 총 아홉 개의 침대가 있다. 3층으로 세 개. 캡슐형이다. 나는 창가 3층. 가장 좋은 위치다. 오늘은 내 침대에서 자지 않을 것이다. 자기로 했지만, 못 자겠다. 내가 눕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빈대가 기어 다니고 있다. 어제는 오른쪽 팔뚝이, 지금은 왼쪽 팔뚝이 유난히 더 가렵다. 네가 물고, 빨고, 알을 깐 내 몸뚱이는 네 놈들과 한통속이 되어간다. 내 안이 빈대로 꽉 차면, 기어 다니는 빈대에 연민을 느끼게 된다. 우리 몸은 기생충이, 유산균이 지배한다. 침대 빈대가 내 안을 모두 갉아먹으면 내가 빈대다. 뭔 소리야? 내 정신 상태가 의심스러울 것이다. 다른 애벌레에 알을 까고, 그 알은 애벌레 안에서 부화하고, 애벌레를 샅샅이 갉아먹고  뚫고 나온다. 징글징글한 다큐멘터리가 여전히 생생하다(영화 기생충도 이런 이야기가 아닐까? 아직 못 봤다). 자기를 갉아먹는 침입자에게 철저히 조종당한다. 갉아먹는 악마가 결국 자신이 된다. 왜 섬뜩할까? 우린 아닌 것 같아서? 벌레의 세계니까 무자비한 거라고? 피곤하면 폭식을 하고, 술이 덜 깬 아침에 라면 국물이 당기는 게 자발적 선택일까? 아프면 세상을 증오하고, 포만감과 성욕이 동시에 찾아오는데 굉장한 논리가 숨어 있을까? 내가 폭식을 그나마 자제할 때는, 벌레 새끼야 덤벼라. 내 안의 작디작은 괴물들을 인정할 때다. 그 새끼들이 일사불란하게 나를 쥐고 흔든다. 구더기들아, 나는 너희들을 인정한다. '인정한다'를 '품는다'로 오해하지 말고, 꺼져만 다오. 호스텔 사장은 열 시 반에 퇴근했다. 나는 빈 침대 하나를 고른다. 침대 시트는 없다. 새 침대 시트를 달라고 해야 맞다. 나는 손님이니까. 진물 가득한 물집이 수십 군데다. 피해보상을 요구해도 모자랄 판이다. 침대 시트도 없는 곳에서 유배된 죄수처럼 잠을 청한다. 어쩌면 오래전부터 내 몸에 붙어있던 것들이 성충이 된 걸 수도 있다. 내가 이 숙소에 피해를 준 걸 수도 있다. 해가 잘 드는 침대다. 빈대들 서식지로 어째 좀 의심스럽다. 새 침대를 달라, 침대 시트도 새 걸로 달라. 이 말이 안 나온다. 당당하지 못하겠다. 숙소를 옮기는 게 최선인데, 귀찮다. 사흘을 그럭저럭 잘 버티고, 무난하게 떠나고 싶다. 못난 새끼.


아르메니아가 좋다면서, 아는 게 없다. 방에 있다가 과일을 사고, 방에 있다가 빵을 산다. 놀이터에 앉아서 여덟 시 반에 불어오는 바람을 기다린다. 충분한 여행이지만, 아르메니아에게 미안하다. 굉장한 곳들을  세상에 알리고 싶다. 남은 날짜는 사흘. 오늘은 루신 씨를 한 번 더 만난다. 내게 인터뷰를 제의했다. 유튜브를 통해 아르메니아를 알리고 싶어 한다. 내가 첫 번째 게스트다. 2년, 고작 2년을 수원에서 살았다. 그런데 완벽한 한국어를 구사한다. 영어 실력도 엄청나다. 크게 될 사람이다. 여행작가 박민우에게 예레반에 대해서 묻고 싶다. 그녀의 직업은 한국인 가이드. 그래서 처음엔 영업일 거라고 생각했다. 딱히 가이드를 대동하는 여행자가 아니라서, 내키지가 않았다. 돈도 안 되는 나 같은 놈은 시간 낭비니까. 피하고 싶었다. 따뜻한 사람이란 걸 알면, 경계가 허물어진다. 알게 되기까지 시간이 걸려서 그렇지. 첫날부터 배가 고프지  않냐? 뭘 먹고 싶으냐? 피곤해 보인다. 내가 부른 택시를 같이 타고 가자. 1일 투어는 현지 여행사가 좋다. 직접 예약하시라. 여행사 이름은 one way다. 스물여섯의 아가씨가 마흔일곱의 중늙은이를 챙겼다. 본인이 예약할 수도 있지만 일부러 여행사 이름만 가르쳐줬다.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여행사를 일부러 찾아봐 준 것이다. 하루 8,600원에 교외로 나가는 여행 상품이었다. 아프고, 비루한 거지가 되면 먹여주고, 돌봐줄 것만 같다. 예레반이 고향처럼 느껴진다면 그녀 덕이다.


오늘은 친동생 같은 유노나도 함께다. 동생 역시 한국어가 유창하다. 전주에서 석사 과정을 밟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예레반 시내에서 셋은 한국어로만 조잘댄다. 호두가 촘촘히 박힌 전통 과자 바클라바에 아카시야 항이 아찔한 꿀을 맛본다. 주말 시장엔 먹을 것들이 많다. 전통 관악기 '두둑'도 불러 본다. 피리처럼 생겼는데 소리는 오보에에 가깝다. 슬픈 음악을 연주할 때 주로 쓰이는 악기다. '슈쥭'도 먹는다. 조지아에서 본 적이 있다. 포도, 살구, 석류를 말려서 견과류를 돌돌 만다. 겉은 달콤하고, 안은 고소 하다. 말린 과일인데도 이에 달라붙지 않는다. 신기하고, 비싼 맛이다. 채식주의자들에게  아르메니아는 천국이다. 루신 씨가 슈쥭을 먹는 나를 폰으로 열심히 찍는다. 이렇게 나불대는 것도 오랜만이다. 와인 거리로 간다. 와인바와 카페들로 이루어진 거리다. 2층에 있는 와인 바다. 벽 하나를 가로로 끝에서, 끝까지 뚫어놨다. 바람이 경계 없이 그대로 들어온다. 여행가방을 뜯어서 합체한 특이한 의자와 나무 의자가 섞여있다. 세련되고, 독특하고, 발랄하다. 이런 유쾌한 와인바는 처음이다. DJ가 뿅뿅뿅 전자 음을 틀어도 되겠어. 아르메니아 와인을 마신다. 한 잔에 2천 원. 프랑스, 이탈리아 와인과 전혀 다르다. 무겁고, 꽉 차 있다. 진하고, 독하다. 이 와인이 첫 와인이었다면 유럽의 와인들이 장난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물을 탔다며 인상을 썼을 것이다. 셋이지만 두 잔만 시킨다. 전주에서 공부하는 동생은 자꾸 안 마시겠다고 한다. 그래 놓고 언니의 화이트 와인을 홀짝인다. 안주도 시키지 않는다. 둘은 내가 가난한 여행자라는 걸 안다. 나이가 많다는 것도 안다. 평생 제일 예쁠 나이에, 실제로도 예쁜 두 아가씨는 이천 원 와인 한 잔을 나눠 마신다. 두 잔 값 4천 원을 내가 내게 한다. 그리고는  배가 고프지 않냐고 묻는다. 2천 원 와인 한 잔 얻어 마시고 밥을 사려고? 다행히 나는 배가 안 고팠다.


-무화과 사진이에요. 무화과 좋아하시면 한 번 드셔 보세요. 삼거리에 있어요. 체리도 좋네요.


식당 한 칸에서 글을 쓰는 나를 그녀가 우연히 발견했다. 나는 안에서, 그녀는 밖에서 손을 흔들었다. 이런 문자 메시지가 왔다. 내가 온전한 이유는 흩뿌려진 잔잔한 배려 때문이다. 어머니의 기도와 내 글을 한자 씩 읽는 독자와, 무화과를 사실은 사다 주고 싶었을 루신 씨 같은 사람들 덕이다.


예레반


내가 벤치에 앉으면 꼭 누군가가 옆자리에 앉는다. 나와 가깝고 싶거나, 내가 아무렇지도 않거나다. 울컥 눈물로 남을 것이다. 이틀 남았다.


PS. 매일 글을 써요. 저만의 오체투지입니다. 글 하나에 책 한 권이 더 팔리기를 바라면서요. 요즘은 '입 짧은 여행작가의 방콕 한 끼'로 오체투지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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