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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우 Jul 09. 2019

내 마음을 뺏어간 죄 - 사랑꾼 아르메니아 사람들

감히 최고의 여행지라고 말하겠습니다

geghard 수도원. 바위를 깎고, 뚤어서 만들었다.


-원래 가기로 했던 날보다 이틀 늦게 가도 될까요?

-그럼요.


이틀을 미룬다.


-한 번 더 연기할게요.  2주 후로요. 너무 늦죠? 그때 묵을 수 있게 해주시면 감사하고요. 안 돼도 괜찮아요. 제 잘못이니까요.


이틀을 조건 없이 연기해 준 에어비엔비 주인장이다. 메시지를 쓰기만 하고, 보내지는 않는다. 2주를 더 있겠다고? 예레반에서? 괘씸하다. 예레반. 그렇게 찾을 땐 없더니, 어디서 개수작이야? 와인을 커피처럼 마실 수 있는 와인바가 열을 지어서 있어야겠어? 사이사이 카페들까지 구색을 맞춰서? 와인 거리가 그렇게 따로 있었던  거야? 진즉에 보였어야지. 여기서 글을 쓰고, 와인을 마셨어야지. 돌풍  같은 여름 바람이 후루룩 뺨을 감싸는데, 포도 넝쿨이 출렁대는 카페 앞이야. 아, 미치게 좋다. 너무 좋으면 눈물부터 글썽여지는구나.


-얘가 당신을 좋아한대요.


타테브 투어를 다녀왔다. 20 명이 한 팀이 되어 미니밴에 올랐다. 예레반 말고는 가본 적이 없다. 원래 계획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이리 친절한 줄 몰랐으니까. 숙소 앞 감자 크로켓이 언제나 따뜻할 줄 몰랐으니까. 순진한 여행자 하나를 제대로 낚았다. 낚인 여행자는 아르메니아를  더 알고 싶다.  제대로 알리고 싶다. 코카서스 3국 중에서 깍두기 취급받는 아르메니아를  박민우의 힘으로 제자리로 돌려놓고 싶다. 아르메니아의 제자리는 코카서스 3국  중 1등이다. 사랑받아 마땅한 나라다. 수백만 명이 죽어나가면서 끝까지 지켜낸 나라다. 박해  받았던 이들이 약자의 마음을 안다. 엄청난 공감력으로 나그네를 포위한다. 친절의 새로운 경지다. 당신은 그 어떤 실수를 해도 혼나지 않는다. 그들이 더 안타까워하고,  그들이 더 조심스럽게 부탁한다. 거기 올라가면 안 돼요. 늦었으니까 좀 조용히 해줄래요? 이런 부탁도 운이 좋아야(?) 들을 수 있다. 대부분 참는다. 즐겁게 참는다. 손님 덕에(?), 잠깐 불편한 게 즐겁다. 사랑받는 거에 익숙하지 못한 이들이라면 불편할 수도 있다. 이런 불편 어디서 느껴보겠나? 아르메니아에서 실컷, 감사히 불편하다 오라. 화색이 도는 그들의 표정이, 수줍게 힐끗대는 눈길이 당신 때문이다. 아르메니아에 방문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콧노래를 부른다. 악수라도 한 번 해볼 수 있을까 망설인다. 망설이고, 대부분은 그냥 돌아선다. 말을  꺼낼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다. 호젓함을 원하는 당신을 자발적으로 헤아려서다. 아르메니아에 오면 갑자기 잘 생기고,  예뻐진다. 사랑의 힘이다. 연예인들이 왜 예쁘고, 잘 생겼냐면 사랑받아서다. 못생긴 개그맨, 개그우먼이 갑자기 선남선녀로 보이면 백발백중 연애 중이다. 양 볼이 붉게 물들고, 입술 역시 더 붉어진다. 눈동자가 커지고, 흰 자가 깨끗해진다. 그 사랑이 시시해지면, 제아무리 연예인이라 해도  못생겨진다. 타인의 시선이 두려워져도 못생겨진다. 사랑을 사랑으로 알고,  콩닥콩닥 소화해야 아우라로 반짝인다. 타테브 투어에서 세 명의 아가씨가 나를 졸졸 따라다니더니


-얘가 당신 좋아해요.


셋 중 한 명이 부정도 안 하고 활짝 웃는다. 내 머리털을 쓰다듬는다. 동양인의 굵은 머리털이 수세미처럼 신기하다. 다 늙어서 주책이라고? 백 번 천 번 욕을 먹어도, 이런 황홀은 다 내 거다. 나눠주지 않을 거고, 토해내지 않을 거다. 저랑 물 뜨러 가실래요? 코카콜라 페트병에 물 담는 걸 그냥 봤다. 아르메니아는 어디에나 약수터가 있다. 물 받는데 왜 나를? 눈치 없기는... 그냥 호젓한 곳에서 눈이라도 일대일로 마주치자는 거잖아. 다 추억이 될 텐데. 잘 생긴 한국 오빠는 그윽하게 웃기만 했다. 나 하나 편하자고, 이런 유치하고 불편한 상황에서 도망쳐야겠어? 내 이름을 백 번은 더 들었던 하루다. 세 아가씨뿐만이 아니었다. 우리 사진 좀 찍어줘요. 당신이 찍으면 잘 나올 것 같아요. 다들 민우, 당신만 좋아해요. 민우 춤을 춰줘요. 강남 스타일 출 줄 알아요? 노래를 해줘요. 당신 머리카락이 너무 신기해요. 타테브의 거룩한 구름 그림자가 푸른 초원에서 일렁였다. 집중이 안 됐다. 연예인들이 퍼스트 클래스에서 안대 쓰고 잠만 자는 이유를 알겠다. 풍경도 귀찮고, 사람도 귀찮다. 그냥 피곤하다. 기대에 부응하는 사람으로 살았던 시간이  다 피로가 된다. 행동 하나에, 말투 하나에 힘이 들어간다. 연예인이 선글라스를  끼고, 콩나물처럼 어두운 곳만 찾는 이유를 알겠다. 관심도 가끔이어야지. 내내 지속되니, 감옥이다. 감옥 1일차 죄수로서, 이 감옥이 너무 좋다.


-아마존을 가시겠어요? 시선의 감옥에 갇히시겠어요?


누가 이렇게 묻는다면? 나는 당연히 감옥이다. 공중 화장실은 절대 못 간다. 똥도 제대로 못 누며 시름시름 앓고 싶다. 99%에게 당연한 학교 앞 떡볶이를 그리워하며 방에 처박히고 싶다. 마스크에 선글라스로 무장하고 붕어빵을 사러 가고 싶다. 청담동 SM 엔터테인먼트 뒤쪽 빌라에 사는 연예인이 되었다. 청담동이 아니라 예레반이긴 하지만... 연예인 병에 허우적대는 기쁨으로도 이미 넘치는데, 포도 넝쿨 카페까지 발견했다. 내 평생 1,2등 여행지가 아르메니아 때문에 위기를 맞고 있다. 조지아로 가면 눈도 안 마주치는 싸가지들에게 구걸하듯 주문하고,  구걸하듯 물어야 한다. 안다. 아르메니아도 여행자로 미어터지면 조지아처럼 되리란 걸.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 사랑받은  것만 기억하겠다. 사랑 제대로 받으면, 변질되어도 내 사랑이다. 나라도 품어 줘야지. 그게 내 보은의 방식이다. 남들 다 가는 곳만 쫓아다니면 냉골 같은 무관심에 메말라간다.


도저히  못 떠나겠다. 며칠만 더 있다가 가자. 며칠 더 있는다고 뭐가  달라져?


너무 좋은 곳과 혹시 더 좋을 수도 있는 곳.


사랑이 깊어지니 울 일이 생기다. 두통이 심해진다. 어쩌냐? 아르메니아야. 어쩌냐? 조지아야.


PS 매일 여행기를 씁니다. 저만의 오체투지입니다. 더 낮은  자세로 닿고 싶습니다. 매일 한 권의 책이 더 팔리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입 짧은 여행작가의 방콕 한 끼'로 오체투지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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