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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우 Jul 11. 2019

예레반을 떠나는 날, 이 무슨 해괴한 일이오?

나를 잡아두려는 너무도 확실한 징후들

노동으로 이런 푸짐한 한 상을 차렸습죠. 천 원도 안 들었다오. 껄껄껄


감자 크로켓과 왕슈크림빵. 이것만 먹고 가는 거야. 과일가게 사장은 어딜 간 거야? 이소룡 흉내 한 번 내주고, 인증 사진 한 방 찍고, 마지막 인사를 할 참이었는데. 어디 아픈가? 어제는 한국에서 온 귀한 작가님을 부려먹더니, 오늘도 부려먹어 보지 그래? 감자 포대를 나르라는 것이다. 토마토를 사러 온 엄연한 손님이야, 나! 이소룡은 매일 권법 훈련을 할 테니, 체력도 남다르겠지 싶어? 감자 포대를, 토마토 상자를, 오이가 담긴 비닐봉지를 그래서 여기, 여기다  놓으면 되는 거야? 하라는 대로 했다. 사장은 그런 나를 사진 찍으며 낄낄댔다. 5분 일하고 당근과 방울토마토와 오렌지 색 체리를 받았다. 나를 뭘로 보고 이렇게 막 대하는 거야? 내가 쉬워? 만만해? 당신네 부부가 깔깔대며 나를 찍어대는데, 똥 나올 뻔했잖아. 너무 좋으면 나는 똥이 그렇게 마렵더라. 가끔씩 내가 생각나면, 이소룡이나 성룡 영화를 보도록 해. 인사도 못하고 가지만, 잘들 지내쇼. 사장아, 아프지 마. 나도 아프지 않을게.


양념된 감자가 채워진 크로켓을 우선 먹고, 왕슈크림 빵을 든다. 잠깐! 쉽게 먹으면 안 돼. 마지막 왕슈크림 빵이다. 물을  끓인다. 홍차를 한 잔 우린다. 이제 됐다. 크림이 삐져나오는 손바닥 크기 슈크림빵을 껍질부터 천천히 부순다. 바닥에 떨어진 부스러기들도 손가락 표면 장력으로 하나씩 하나씩 다 입에 넣는다. 내일이면, 아니, 오늘 오후면 나는 조지아에 있다. 하지 못했던 모든 순간들이 후회로 남을 것이다. Tavern Yerevan이라는 식당에서 근사한 한 끼를 못했다. 헬스클럽에서 운동 좀 할까? 역시 못했다. 여러 개의 유튜브 동영상을 올려야지. 역시 못했다. 대신 한 밤의 바람,  공화국 광장의 분수쇼, 과일  가게 짐 나르기, 새로 오는 여행자들과 조잘대기를 했다. 벨기에에서 온 프레드릭이 다른 여행자가 남긴 라바쉬를  뜯어먹는다. 라바쉬는 엄청나게 크고, 얇은, 걸레처럼 흐느적대는 아르메니아 국민 빵이다. 슈크림빵을 줄 수는 없다. 어제 남긴 오렌지색 체리를 권했다. 자기가 좀 생겼지 싶은 백인은 주로 머리를 뒤로 질끈 묶는다. 아무나 소화할 수 없다.  이목구비를 과시하기에도 좋다. 자, 내게 어서 말을 걸으렴. 언뜻 도도하고, 빵부스러기만큼이나 나약한 너를 나는 꿰뚫었다. 못 참고 몇 마디를 한다. 둘의 침묵이 식탁을 오가는 건, 어쨌든 불편하다. 동유렵을 내내 자전거로 돌고, 여기는 그냥 버스로 왔다. 자전거가 싫증 나서, 조지아에 두고 왔다. 포기를 모르는 사람보다, 포기를 아는 사람이 끌린다. 그래,  더 이야기해 봐. 중국에서 차 한 잔에 50유로를  쓴 이야기를 한다. 중국 여자가 졸라서 졸졸 따라갔더니, 차 한 잔에 6만 원이라는 것이다. 멍청하기는... 여자 친구에게 차여서 자전거를 탔어? 그래 너 같은 애는 좀 차여 봐야 해. 외모만 빼고, 나머지는 허당이구나. 왜 차였겠어? 외모야 잠시지. 잡아두려면 너의 세계가 있어야지. 곁에 있으면 편하고, 위로가 되어야지. 이제, 그만. 나는 샤워를 하고 조지아로 갈게. 너, 울려 그러더라. 울면 골치 아파져. 난, 오늘 조지아에 가야 한다고. 게이라도 되고 싶다는 말을 왜 갑자기 하니? 이젠 나한테 반한 거니? 너에게 놀란 게 아니라, 내게 놀라는 중이야. 뻑하면 내게 비밀을 술술 푸는 이유가  뭘까? 너만 그렇겠니? 전 세계 거지 여행자들이 신들린 듯이 내 앞에서 주절대. 글 쓰는 거 말고 청담동에서 연예인 상담소를 할까 봐. 그냥 들어만 주는 거지. 연예인이니까 시간당 십만 원씩 받고, 비밀은 철저히. 몇 번의 상담이 끝나면 여행지를 추천해 주는 거야. 나랑 같이 여행까지  가고 싶다고? 그건, 노. 대접만 받던 애들이라 힘들어. 매니저 없이 식당 가는 것도 큰 일인 줄 아는 애들을 어찌 감당하겠어? 나 큰돈 벌 것 같아. 그런데도 안 하겠지만... 좀 생긴 프레드릭아, 잘 들어. 잘 생겨도 까이고, 못 생겨도 까고. 연애가 원래 그런 거야. 아니, 어쩌면 잘 생길수록 까일 확률이 높을지도 몰라. 시작이야 쉽지만, 유지의 힘은 외모에서 오는 게 아니니까. 어렵게 시작하는 사람일수록, 유지의 능력이 우수해지지. 사람 귀한 걸 알거든. 시작이 너무 어려워서, 단 한 번의 시작이 소중하거든. 지금 내가 왕슈크림빵을 먹는 자세와 같지. 이 빵은 이제 내 삶에 다시없어. 왕슈크림빵만 그렇겠어? 대부분이  그래. 그런데도 또 먹을 수 있을 줄 알고, 빵부스러기를 안 주워 먹지. 미안, 이 말은 삼켜야겠다. 나중에 연예인 상담소를 차리면, 그때 할게. 내 체리를 씹는 너에겐 좀 아낄게. 누가 알겠어? JYP 박진영이 1억 드릴 테니, 자기네 아이들만 좀 맡아달라고 애걸복걸할지. 1억 좀 약하지만, 그땐 한 번 해보려고. 트와이스는 좀 버니까, 따로 계약해야지. 잘 버는 애들은 돈 좀 더 써야지. 어허, 박진영 씨 프로끼리 뭘 그리 짜게 구시오.


짐을 다 쌌다. 어제 빤 양말이 덜 말랐다. 캐리어에 넣고 가지, 뭐. 양말 젖은 게 대수야? 젖으면 냄새가 남는데. 설마, 양말 때문에 하루 더 있겠다고? 잠시 흔들렸지만, 갈게. 갈 거야. 샤워를 해야 하는데 수건을 쓸까? 말까? 젖은 수건이 짐에 같이 있는 건 싫은데. 입던 옷으로 닦을까? 찝찝한데. 그냥 수건을 쓰자. 수건 때문에 잠시 또 흔들렸다.  


응?


조금 전 프레드릭이 생수통에 수돗물을 담았다. 그리고 내 차례. 샤워장의 물이 뚝 끊겼다. 아무리  밸브를 돌려도,  물이 없다. 옷을 다시 입는다. 주방에 전구가 윙윙 하더니, 꺼졌다. 전기가 나갔다. 프레드릭까지 물을 썼다. 나부터 물을 못 쓴다.


해석하라


씻지 않은 몸으로 국경선을 넘을까? 그게 뭐 대수라고. 전기가 끊기고, 물이  끊겼다. 심지어 그 순간 예레반의 모든 지하철과 철도가 정지됐다.


해석하라


해석하고, 결정하라. 나의  다음이 궁금하다. 정전이 되자, 나는 일단 과일가게로 달려갔다.


PS 매일 여행기를 올려요. 저만의 오체투지입니다. 더 많은 이들에게 천천히 다가가고 싶습니다. 매일 글 하나를 올려서 책 한 권이 더 팔리면 족합니다. 지금은 '입 짧은 여행작가의 방콕 한 끼'로 오체투지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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