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짐은 개판이다. 다행히 수납 가방을 선물 받아서, 산뜻해졌다. 수납가방 큰 거엔 셔츠와 바지를, 작은 거엔 양말과 팬티를 넣는다. 말아서 넣긴 하는데, 떠나는 날엔 마구 쑤셔 넣는다. 정신의 반만 남아서 겨우 정리한다. 떠나는 날만 꼭 그런 건 아니고, 붕 떠서 산다. 여권이나 지갑을 안 잃어버리는 게 신기하다. 돈은 그래도 예민한 편이어서, 통장 잔액이 얼마 남았나, 주머니에 얼마가 있나를 늘 명심한다. 지금 약 백오십만 원 정도가 통장에 있고, 그중 오십만 원 정도가 다음 달에 나간다. 현금으로 백 달러 조금 넘게 있다. 빙그르르, 빙그르르. 생각이 돈다. 돈을 쓸 때마다, 살점이 도려내지는 것만 같다. 몇만 원 정도를 쓸 때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누가 처음으로 쓴 표현인지 모르지만, 절묘하다.
심장이 철렁
심장 밑엔 한없는 낭떠러지가 있다. 심장 밑 고무줄이 헐거워지면서, 나락으로 떨어진다. 끝내 매달려서 대롱대롱. 공포의 끝은 뭘까? 죽음이겠지. 죽을까 봐 심장이 철렁. 가난해지면 굶어 죽을까? 아니다. 억울해서, 비참해서 살고 싶지가 않다. 대충 살다 죽거나, 작심하고 포기하거나. 심장이 덤덤해질수록 내 성장의 증거. 훨씬 덜 철렁해져서 돈을 쓴다. 여전히 어딘가에서 뛰어내리는 느낌이긴 하지만... 어제는 포도넝쿨 들썩이는 식당에서 2만 원 넘게 썼다. 첫눈에 반한 곳이라 작정하고 갔다. 와인 두 잔에 요리 두 접시, 끝내 디저트는 못 먹었다. 그것까진 차마 못하겠다. 못난 놈. 오후에도 눈여겨본 식당에서 만 원 정도를 썼다. 돈을 쓸 때마다 내가 기특해 죽겠다. 미루지 않고, 지금의 욕망을 헤아린다. 전 재산 50분의 1을 한 끼에 쓴다. 나를 걸고 먹는다.
수중에 5천 드람(1만 2천 원)이 남았다. 하루를 더 머문다. 2천 드람은 방값.
-아니야, 물이 안 나오는 건 우리 책임이잖아.
에이샷이 돈을 안 받는다. 억지로 쥐어준다. 자, 이제 3천 드람(7천 원). 과일가게로 달려간다. 복숭아를 먹을까? 살구를 먹을까? 아냐, 아냐. 산딸기? 체리? 블루 베리 1kg을 산다. 토마토와 당근까지 산다. 사장은 오늘도 안 보인다. 온 가족이 교대로 일을 한다. 잠깐씩 자리를 비우는 건가? 진짜 아픈 걸 수도 있다. 내게 감자 포대를 나르게 한 날, 사실은 열이 펄펄 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픔은 껍질로 잘 안 드러난다. 암으로 이십 대 때 떠난 선배 형은 마지막까지 꽃처럼 화사했다. 남은 돈의 절반을 과일로 탕진하다니. 나는 어찌 이리 현명할까? 아르메니아의 7월은 대자연의 뮤지컬이다. 음악에 맞춰 산딸기, 포도, 토마토, 가지가 퐁퐁 솟아난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드럼 베이스에 맞춰 쉐킷쉐킷. 가벼워지려면 열매를 털어내야지. 모든 나무들이 쉐킷쉐킷, 모든 열매들이 우수수 우수수. 신세계백화점 체리보다 더 좋은 체리가 한 주먹에 오백 원이다. 물 안 마시고 체리 먹는다. 물 안 마시고 멜론 먹는다. 쭉쭉 터지는 과즙은 평생 사무칠 걸 안다. 남은 돈의 절반을 그래서 과일에 탕진한다.
머물까? 떠날까? 물도 안 나오지, 전기도 끊겼지. 지하철과 기차도 죄다 끊겼다. 숙소 사장 에이샷 말로는 이런 적은 처음이란다. 나를 못 가게 하려는 우주적 교태다. 예레반보다 더 좋은 곳이 있을까? 조지아의 카즈베기나 메스티아는 아름다울 것다. 이 여행은 조지아의 풍경으로 시작됐다. 빽빽한 녹지와 생크림처럼 얹어진 만년설, 그 사이에 우뚝 솟은 교회 건물. 휘둥그레지는 사진들을 보고 여행을 결심했다. 풍경에 시큰둥한 편이지만, 이 정도라면 본전 생각은 안 나겠군. 그 풍경이 지금의 나보다 더 행복한 나를 만들어줄 수 있을까?
-더 있다가 가. 더 머물면 방값은 공짜야.
제정신이 아닌 사장이 꼬드긴다. 러시아 미친놈이 잔뜩 취해서는 글 쓰는 나를 방해한다. 들어가서 자라고 했더니, 칼을 들고 나오겠단다. 할아버지가 곰을 때려잡던 칼인데, 나랑 보드카 안 마시면 칼을 가져오겠단다. 찌르지는 않고, 보여주기만 한다는 그 말이 더 섬뜩했다. 한 놈이 말려서 겨우 방으로 사라졌다. 말리던 놈이 다음날 짐을 싸더니, 조용히 차를 마신다. 혼자 떠나는 모양이다. 국적만 같을 뿐, 따로 여행 중이었나 보다. 전날 행동이 너도 좀 부끄럽지? 그렇게 기죽어서 차나 마시고 가렴. 노트북을 놔두고 나는 화장실로 간다. 똥 눈 김에 샤워를 하는데, 어라? 노트북과 카메라가 걱정이다. 짐도 다 싼 마당에 러시아 놈이 들고나가면 끝이다. 샤워를 중간에 끊어야 하나? 불안한 마음에 샤워를 서둘렀다. 러시아 놈은 짐과 함께 사라졌다. 내 짐은?
Good Bie Friend
종이에 쓴 메모가 노트북 자판 위에 얌전히 누워 있었다. 철자가 틀려서 더 절절했다. 내 짐은 물론 무사했다. 예레반을 떠나기로 한다. 새로운 장소에도 기회를 주고 싶다. 이런 러시아 놈을 만나서 뭉클해질 거고, 내 어리석음을 더 자주 볼 거다. 예레반을 떠나야, 예레반에 다시 올 수 있다. 사장 놈아 내 방을 내놓아라. 갑자기 들이닥친 나를 보며 어쩔 줄 몰라하는 에이샷을 보고 싶다.
PS 매일 여행기를 씁니다. 저만의 오체투지 방식입니다. 매일 책 한 권이 더 팔리면 족합니다. 천천히 우주에 닿고 싶습니다. 독자가 제게는 우주입니다. 지금은 '입 짧은 여행작가의 방콕 한 끼'로 오체투지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