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이 없어요가 아니라, 침대가 없어요다. 나는 또 5천 원에 하루 누울 곳을 찾아 나섰다. 애초의 계획은 바다 도시 바투미였다. 또 여섯 시간을 버스로 어떻게 가? 트빌리시에서 하루 자고 간다. 이미 봐 둔 숙소도 있다. 버스 터미널에서 걸어서 오분 거리. 아, 나는 어찌도 이리 유능한지. 그런데 없다. 내 몸 하나 누울 곳이 없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 수백 개의 게스트 하우스 중 한 곳일 뿐이다. 가격 저렴하고 입소문 괜찮아도 매진이라니. 러시아 관광객이 훅 줄었다. 러시아 하원 의원 가브릴로프는 조지아를 방문해 러시아어로 연설을 한다. 러시아 의원이 러시아 말로 연설을 하는데 왜? 그는 조지아 출신이다. 조지아 말을 엄연히 알지만 러시아 말로 연설을 하다니. 러시아는 조지아 땅을 강제로 점거하고, 친서방 정책을 펴지 말라고 대놓고 협박한다. 배은망덕 러시아 의원 때문에 반러 감정이 들불처럼 번진다. 연일 시위가 벌어지고, 양국의 직항이 끊겨버렸다. 조지아 여행 산업의 큰 손인 러시아 관광객이 훅 줄었다. 조지아와 러시아의 국제 정세를 면밀히 파악한 후, 예약의 필요성을 무시했다. 그런데 침대가 없어? 혹시 내가 예전에 방만 보고 간 걸 기억한 거야? 아쉬우니 기어들어 온 손님은 무조건 사절? 알고 있는 곳들은 다시 택시나 지하철을 타야 한다. Brobro 호스텔이 유력하다. 4천 원에 선풍기만 있고, 특유의 화목함도 있다. 지하철을 탄다면, 계단을 오르내리고, 십오 분은 족히 걸어야 한다. 택시를 타면 어쩐지 억울하다. 택시비나 방값이나다.
-120라리요(5만 원)
아, 다행이다. 십만 원은 아니구나. 내 전 재산의 30분의 1, 아니 다음 달 카드값까지 계산하면 20분의 1. 20분의 1을 쓴다. 그냥 눈에 보이는 어엿한 호텔로 직진했다. 0으로 달려드는 공포, 돈이 바닥나면, 내가 먼지가 되는 공포. 그 공포로 뛰어들어야 한다. 바닥일수록 내면의 심지에 불이 붙는다. 불길이 된다. 불길로 젊어지고, 불길로 용솟음친다. 불길을 믿어야 한다. 불길함이 아니다. 불길이다. 활활 탸올라라. 205호. 와이파이 패스워드는 welcome2kmm. kmm은 4성급 호텔 이름. 욕조가 없다는 사실이 실망스럽지만, 나는 5만 원을 쓴 전사다.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다. 스마트폰 유심칩부터 바꾼다. 손톱만 한 유심칩을 잘 간직하고 있었다.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아르메니아 유심칩을 모두 가지고 있다. 돌아가게 되면, 쓴다.
-오늘만 찬스. 4라리에 4기가 바이트.
4기가면 한 달도 쓴다. 4라리(천육백 원)라니. 싸면 좋지. 하지만 폭력적으로 싸다. 누군가의 큰 희생이 없으면 불가능한 가격이다. 아니야, 기억하는 거지. Beeline 새끼들아. 20라리를 꿀꺽하고 내심 미안했냐? 정확히는 15라리. 5라리만 충전할 거였는데, 지폐를 넣었더니 꿀꺽. 조지아, 아르메니아는 길바닥 어디에나 충전기가 있다. 교통카드도 충전하고, 세금도 내고, 데이터도 충전한다. 말도 못 하게 세련된 나라다. 단, 이런 충전기는 잔돈 안 거슬러 준다. 알아서 잔돈을 준비하거나, 꿀꺽하게 놔둬야 한다. 몰랐던 나는 15라리를 잃었다. 단말기를 폭발시키기 위한 합법적 방법을 구글로 찾아본 게 전부였다. 데이터를 죽을 때까지 배 터지게 쓰겠군. 화는 났지만, 데이터 부자가 됐다. 웬걸? 며칠 지났더니 다 썼다. 없다. 배 째라. 이런 메시지가 뜬다. 당장 아쉽고, 급한 건 나다. 15라리(6천 원)에 고객 불만 센터를 직접 방문하는 게 훨씬 끔찍하다. 5라리를 넣고, 다다음날 같은 메시지가 또 떴다. 5라리를 또 바쳤다. 총 만 원으로 내 이마 힘줄은 터지기 직전이었다. 그리고 아르메니아로 떴다. 아르메니아에서도 Beeline을 썼다. 문제없이 깔끔하게 쓰다 왔다. 조지아 beeline과 아르메니아 beeline은 전혀 연관 없는 회사라고 아르메니아 직원이 강조했다. 믿어 의심치 않는다. 개과천선한 조지아야, 4기가를 다오. 침을 꼴깍 삼키고 단말기에 5라리를 넣었다.
-돈이 부족하답니다. 예전에 데이터를 썼나 봐요. 그게 차감된 것 같아요.
호텔 프런트 직원이 내 메시지를 또박또박 확인해 줬다. 넣으라는 만큼 돈을 넣었더니, 아이쿠, 손님은 모르시겠지만, 저희만 아는 외상이 있었네요. 그걸 제가 미리 말해야 아나요? 떼어간 돈 이렇게 챙길게요. 몰랐던 당신이 등신이지요. 자, 이제 외상을 갚았습니다. 다시 거래를 할까요? 4라리 4기가 바이트. 다시 단말기로 간다. 5라리를 넣는다. 4라리인데 왜 5라리를 넣느냐면 단말기 수수료가 있다. 그것까지 감안해서 넉넉히 넣는다. 딱 4라리만 넣으면, 4라리가 아니라 3.8라리가 된다. 당하고 사는 게 뭐 힘들다고. 쥐새끼처럼 어딘가에 쭈그려 앉아 고단한 한 끼 처먹고 나면 또 졸리고, 잔다. 아침이면 몽롱 개운해진다. 굴욕감이나 분노는 희미해지고, 공복에 채울 기름진 음식을 찾는다. 가난할수록 기름기를 찾고, 희망이 없을수록 폭식한다. 소화제나 입에 털어 넣으며 늙어 죽는다. 자, 하라는 대로 할게. 단말기 강도에게 5라리를 또 바친다. 나는 두 손들고 항복했다. 아니 두 손을 싹싹 비볐다. 이제 4기가 바이트를 제발 주세요.
-네, 드디어 1기가 바이트 서비스가 시작됩니다.
조지아 문자는 포도 넝쿨을 닮았다. 동글동글 글자 사이에 1이라는 숫자가 보인다. 4가 안 보인다.
-예전에 손님이 4라리에 1기가 바이트 충전을 했대요. 그래서 자동적으로 1기가 바이트만 충전된 거래요. 다음에는 4기가 바이트가 충전될 거래요. Beeline 쓰지 마세요. 저도 ....
호텔 직원이 M으로 시작하는 통신사를 이야기한다. 내 귀로 전달되지는 못한다. Beeline. 러시아 회사다. 나, 사실 사회주의, 공산주의에 우호적인 사람이다. 약자 편에 선 속 깊은 이상주의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귓구멍에 콘크리트를 부은 관료들이 얼마나 인민을 개무시했을까를 생각한다. Beeline 때문만은 아니다. 아르메니아의 철도 직원, 러시아 공항에서 환승, 러시아 공항 식당의 차가움을 연결해 보니, 그런 그림이 된다. 대의명분만 있고, 디테일이 없다. 디테일은 공감능력에서 온다. 공감을 모르는 사람, 안 하는 사람이 세상을 움직이려 했던 건가? 공존을 들먹였던 건가?
그날 밤 마트는 줄이 길었다. 할인 행사라도 있는 모양이다. 계산대 직원 한 명이 갑자기 그만! 퇴근을 한다. 나머지 한 줄로 몰린다. 줄이 합쳐진다. 할아버지가 내 뒤 할머니 앞으로 새치기를 한다. 둘은 언성을 높이며 싸운다. 할아버지는 슬그머니 내 앞에 선다. 여자 경찰이 들어온다. 초코바 하나를 들고 오더니 맨 앞 줄로 간다. 마침 계산 중인 노인은 긴 줄을 보며 천천히 동전 지갑을 꺼낸다. 동전을 쏟는다. 손을 떨며 하나, 하나 눈앞으로 가져간다. 얼마 짜리인지가 그제야 보인다. 보인 동전을 하나씩 계산대에 올려놓는다. 도시락 면 하나와 토마토 두 개를 들고 한국 남자 한 명이 서있다. 1기가 바이트는 쌩쌩. 지금은 조지아보다 페이스북이 훨씬 아름답다.
PS 매일 글을 씁니다. 저만의 오체투지 방식입니다. 제가 점점 더 낮아질수록, 제가 점점 더 맑아짐을 믿어요. 하루 책 한 권이 더 팔리면 족합니다. 지금은 '입 짧은 여행작가의 방콕 한 끼'로 오체투지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