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아르메니아를 저주해? 폴란드놈아

흥미로운 논쟁, 여행지 호불호

by 박민우
그림으로 보는 아르메니이 육류 가치, 아이스크림은 150드람(370원)

여섯 시간 미니밴 타기. 아르메니아 예레반에서 조지아 트빌리시까지 여섯 시간 걸린다. 우리나라에서 차로 여섯 시간 거리는 없다. 남미에서 30시간 이상 버스만 탄 적도 있는 나다. 여섯 시간? 우습다. 아니, 우습지 않다. 거리가 길어도, 짧아도 다 '길다'. 목적지는 늘 멀고, 지루하다. 30시간 거리도 생각보다 견딜만하다. 가혹함을 예상한다. '예상' 하는 순간부터, 받아들임이 시작된다. 길어질 걸 아니까, 불평도 시간을 배분해서 띄엉띄엄. 내내 불평하면 '가혹한' 시간을 못 버틴다. 알아서 긴다. 30시간이 잘 갈 리는 없지만, 안 갈 리도 없다. 무릎을 폈다, 오므렸다, 간식을 먹고, 음악을 듣고, 휴게소에서 기지개를 펴고, 밥을 먹는다. 잠은 어찌 그리 잘 오는지, 잘수록 피곤한 잠을 끝도 없이 처잔다.


아르메니아를 떠나서 슬프지 않나요?


전혀. 국경선을 넘어야 하고, 숙소를 잡아야 한다. 나약한 자는 쉽게 예민해진다. 국경선을 넘을 때마다 예민하고, 사나워진다. 조지아의 바다 도시 바투미로 간다. 원래는 예레반에서 기차를 타고 가려 했다. 정전으로 표를 아예 안 팔았다. 기차역 창구 직원이 굉장했다. 두 팔로 X자를 만들며, 노노만 외쳤다. 더 물어보면 죽여버릴 거야. 사납게 으르렁댔다. 아르메니아에 이런 사람도 있구나. 나처럼 표를 찾던 폴란드 청년이 안절부절 다른 창구를 돌아다니며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표 못 사나요? 오늘 못 가나요? 미친개 직원이 국제 편 담당인데 너무 으르렁 대니 다른 창구에서 고개를 조아린다. 모른다. 저 사람에게 물어봐라. 기계적인 답뿐이었다. 어떻게 저런 직원이 안 잘릴 수 있을까? 다른 직원들도 저런 태도를 그냥 보기만 해? 아르메니아 맞아? 기차 타는 사람들이 죄인이야? 표를 못 산 아르메니아 사람들이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다. 묻는 것도 포기한 채, 속으로만 발을 동동 구른다.


-그냥 버스 타고 가지 그래?


-버스? 조지아에서 아르메니아 올 때 차 멀미를 얼마나 했는지 몰라. 이틀 전에 쓰러져서 내내 물만 마시고. 나, 아르메니아를 뜨고 싶어. 아르메니아는 최악이야. 이란이랑 완전히 딴판이야. 이란으로 돌아가고 싶어.

이란이 천국, 아르메니아가 지옥? 아니지, 이란이 지옥이고 아르메니아가 천국이지. 이봐, 폴란드 총각! 아파서 돌았어? 더위 먹었어? 어딜 감히 이란을 들먹이며 아르메니아를 능욕해? 요즘 유튜브에서 인도 여행이 인기다. 사기, 더러움으로 점철된 인도가 자체로 놀라움이다. 젊은 친구들은 인도를 서커스 보듯 한다. 인도 안 가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신 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댓글이 주를 이룬다. 심지어 인도를 안 가본 사내가, 인도를 가지 말아야 할 이유에 대해 열변을 토한다. 인도는 안 가본 당신이 욕해도 싼 나라입니다. 이런 식의 댓글 천지다. 흠! 가본 나는 인도가 막장임을 인정하지만, 그래서 안 가야 할 나라인가에 대해서는 수긍할 수 없다. 나는 인도에 꼭 다시 갈 것이다. 그런 인도가 최고인 사람도 많다. 여행 고수들 중에 특히 많다. 열대의 바다부터 히말라야 고산 지대까지 즐길 수 있다. 지구의 축소판이 인도다. 물가가 싸고, 최고의 피사체인 인도 사람들이 있다. 사진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인도는 꼭, 꼭 가야 한다. 그 귀하고 아름다운 피사체들이 사진 찍어달라고 팬클럽처럼 달려든다.


여행의 호불호. 나뉘는 게 당연하다. 누구나 좋아하는 나라는 불가능하다. 눈앞의 폴란드 남자가 아르메니아를 저주할 때 약간 충격이긴 했다. 창구의 미친개는 몰래카메라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무례하다. 왜 나는 밉지가 않을까? 그냥 이상하고, 웃기다. 사랑 듬뿍 받은 자의 오만이자, 여유다. 나는 호의적인 아르메니아인의 베풂과 미소로 코팅되어 있다. 내 안의 예민함과 연약함을 지키는 보호막이다. 조지아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그럴 줄 알았다며 발끈했겠지. 아르메니아의 철도는 러시아 자본으로 운영된다(숙소 사장 에이샷의 말이 맞는다면). 러시아인의 서비스다. 구별해서 봐도 된다. 대표적 막장 서비스의 좋은 예다. 아르메니아에서 정을 떼고 싶다면 기차역에서 조지아로 넘어가는 표를 사면 된다. 폴란드 친구는 이틀 전 담배를 피우다가 갑자기 쓰러졌다. 의식을 잃은 것이다. 탈수증이었다. 가까스로 추슬러 기차역에 왔다. 미친개가 짖어댄다. 나라도 저주하고, 나라도 테러를 꿈꾸겠다. 이 폴란드 등신아. 천국인 이란에서 넘어오자마자 왜 쓰러졌는지 넌 모르지? 먹을 게 없었다며? 샌드위치랑 꼬치뿐이었다며? 충분한 채소와 과일을 은근 먹을 기회가 없지. 방심하고 눈에 보이는 것만 먹으면, 이란에선 아플 수밖에 없어. 사람들이 신기해서 달려들고, 친절해서 천국이었다? 미국과 단교하고 외국인은 눈을 씻고 찾아도 없는데 당연히 반갑지. 신기하지. 물가가 네 배 폭등하고, 원리주의 독재로 찌든 사람들이 잠시 널 보면서 해방감을 느끼는 거야. 이란 정부는 그런데 외국인이 싫거든. 비자 발급도 어렵고, 비싼 이유야. 거리가 흑사병 처럼 칙칙해. 그걸 눈치 못 채고, 천국 타령이야, 이 등신아?


누군가를 사랑하면 한없이 어리석어진다. 누가 흉이라도 보면, 네가 뭘 안다고 함부로 나불대냐며 발끈한다. 사랑에 빠진 자가 가장 모른다. 가장 어리석다. 기차역의 미친개는 내게 좋은 공부가 됐다. 아르메니아도 완벽할 수 없다. 새삼스럽게 명심하게 해줬다. 이란에 다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이란에 대한 내 증오는 어리석다. 아픈 사람들 사이에서 철없이 맛집만 내놓으라고 했다. 그들에게 다가가고, 듣고 싶다. 얼싸안고 울고 싶다. 이란이 내게 오고 있다.


조지아도 내겐 아픈 나라다. 그토록 천국이라 칭송하는 조지아가 내겐 이란이다. 이란과 닮았다.


웰컴 투헬


지옥문을 열어놓고 트빌리시가 나를 기다린다.


PS 매일 여행기를 씁니다. 저만의 오체투지 방식이에요. 저를 낮추고, 깨달음에 닿고 싶어요. 매일 이 글로 한 권의 책이 더 팔리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입 짧은 여행작가의 방콕 한 끼'로 오체투지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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