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번 버스를 타고, 모란역에서 지하철을 탄다. 왕십리역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고 홍대역에서 내린다. 왕십리에서 홍대역까지는 자비가 없다. 아현역쯤이면 다 온 것 같은데, 이대역, 신촌역을 더 간다. 말도 안 되는 투정이다. 몸이 피곤하다는 증거. 전날 구례를 돌고 밤기차를 타고 집으로 왔다. 피로가 쌓여있다. 이틀간 별 다섯 커피를 못 갔다. 임 대표, 장 대표, 김이사에게 열심히 살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싶다. 서울에서 가장 핫한 연남동, 연남동에서 가장 핫한 카페 두 곳을 가보기로 한다.
맛있는 걸 좋아한다. 내가 맛있다고 누구나 맛있나? 절대 아니다. 충무로의 뼈대 있는 평양냉면집은 충격이었다. 이게 왜? 사람들이 열 번 먹으면 그 맛을 안다고 했다. 아무리 못 생긴 강아지도 열흘 보면 정든다. 못 생김이 사라지고, 모든 윤곽이 부드러워진다. 나를 핥고, 애절하게 바라보고, 꼬리를 흔드는 꼬소꼬소 애교로 가산점이 붙는다. 이 아름다운 강아지를 못난이 시궁창 개새끼라고 했나요? 제가요? 나는 죄책감에 24시간 쓰담쓰담한다. 열 번 먹어야 맛있는 음식은, 거짓말.
맛은 그러니까 거짓말이다. 누가 맛있다면 맛있다. 10년 사이에 한국 음식은 말도 못 하게 싱거워졌다. 짜다 싶은 음식을 먹은 손님들은 한결같이 찌푸린다. 10년 전엔 분명 맞는 간이었다. 본인들이 싱거움을 택하고, 옛맛을 저주한다. 어제 맛있고, 오늘은 맛없다. 어제는 옳고, 오늘은 틀리다. 그게 맛이다. 그러니까 내 혓바닥도 옳지 않다. 나도 이런저런 편견에 오염됐다. 늙었다. 심지어 오늘은 피곤하다.
그래서 커피 리브레에서 일부러 순한 커피를 골랐다. 산미가 이미 싫었다. 태국에서도 신맛 즐겨 마셨다. 별 다섯 커피를 알고는 바뀌었다. 최근 커피로는 맥도널드 커피와 던킨 커피가 좋았다. 뉴욕에서 파리바게트 커피를 마시고 전율이 돋았었다. 뉴욕까지 와서 무슨 파리바게트인가 싶지만, 노트북 전원을 연결할 뉴욕 최고의 카페는 단연 파리바게트였다. 외국인들은 단팥빵에 열광했지만, 나는 은혜로운 콘센트에 감사했다. 감히 스타벅스에서 전원 연결을? 타임스퀘어에선 꿈도 꾸지 말 것. 그래서 비싼 맥북 충전 가득 해서 오는 거지. 뉴요커는 콘센트 찾아 쥐새끼처럼 두리번거려선 안 된다. 한국의 던킨과 파리바게트는 같은 SPC 계열사다. 블루보틀을 비롯해 날고 기는 커피에서 못 느꼈던 균형감이었다. 거의 완벽. 신맛이 덜한 대신 은근히 뚫고 오는 바디감이 내내 이어졌다. 커피맛도 모르는 놈이 함부로 지껄이는 거 맞다. 내가 안대를 하고 맛 순위를 정했다면 블루보틀보다는 파리바게트다. 파리바게트가 한참 위다.
-그래도 산미가 좀 있어요
산미 적은 걸로 부탁했다. 커피 리브레에는 좀 죄송한데, 커피를 5분의 1만 마시고 나왔다. 수요 미식회에서도 극찬했던 커피집이다. 산미가 아예 없을 수는 없다. 첫맛은 나쁘지 않았다. 약하게 볶는다고 한다. 원재료의 맛을 최대한 살리는 착한 커피. 얼핏 생두의 풋내가 느껴진다. 좀 억지다. 커피 리브레가 그렇다고 하니, 그렇게 느껴질 뿐. 어쨌든 살짝 풋내가 나고, 살짝 시고, 살짝 쓰다. 그리고 우러나오는 당연한 커피맛. 테이크아웃 잔에 담아드릴까요?라고 물을까 봐 서둘러 나왔다. 근처 테일러 커피에서도 10분의 1 마시고 도망치듯 나왔다. 테일러 커피는 그전에 불만 없이 마셨던 곳이다. 그땐 케이크와 같이 먹었다. 달착지근한 뭔가와 함께였다면 먹을만했을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별 다섯 커피를 접하고 취향이 바뀌었다. 별 다섯 커피는 처음엔 묽은 건가? 싶다. 첫맛만 한정하자면 위의 어떤 커피보다 묽다. 묽다 싶은데 두 번째부터는 꽉 채워진다. 마지막 퍼즐은 두 번째 모금에서 완성된다. 그리고 완성형의 맛과 향이 끝까지 유지된다. 내내 지겹지 않고, 까칠하지 않다. 임 대표 말로는 커피가 숙성 과정에서 산미가 오르락내리락한다고 한다. 신맛이 가장 강할 때조차, 그 어떤 커피집보다 순하다. 연남동 커피를 기준으로 하면 나사 빠진 맛이다. 이 맛에 익숙해지니까 다른 커피로 돌아갈 수가 없다. 열 번 먹고 정든 평양냉면과는 다른 게, 처음부터 훅 들어왔다. 나사 빠진 맛인데 모호하지 않다. 나사 빠진 맛인데, 꽉 찬 맛이다. 적고 보니, 무슨 마법의 커피구만. 커피만 마시면 속이 쓰린 임 대표가 수년간 로스팅해서 얻어낸 결과물이다. 내 입에 안 쓰고, 내 속이 편한 커피. 지금의 별 다섯 커피는 그렇게 탄생했다. 일단 나는 이 맛에 홀라당 반했다. 내 입맛은 과연 옳은가? 아니, 옳지 않다. 진짜 옳은 맛은 뭘까? 그런 건 없다. 단, 백 명이 마시고 여든 명이 다시 찾는 맛은 있다. 나는 그걸 순리라고 하겠다. 굉장한 커피인 것도 같고, 내가 너무 주관적인 것도 같다. 이 커피를 백 명에게 먹이고 싶다. 아니, 천 명. 나와 같은 반응으로 흥분하는 사람들을 보고 싶다. 장 대표가 나를 불러서 별 다섯 커피에 와 있다. 이미 굉장한 커피에 마지막 퍼즐이 나였다. 아, 소름 돋아. 어벤저스 실사판이다. 아, 맞다. 어벤저스도 보러 가야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