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서 통영, 작은 버스 여행
목포 해양대학 강연이 끝났다. 오후 여섯 시. 통영 RCE 세자트라 숲으로 가야 한다. UN 산하 UN대학이 인증한 도시가 통영이다. 통영 RCE 세자트라 숲은 지속 발전이 가능한 교육으로, 미래의 공존을 꿈꾼다. 숲이 있고, 바다가 있다. 통영 RCE가 꾸며놓은 예쁜 정원을 한참 올라가면 나의 방이 있다. 2주간 내 방이다. 세자트라 숲에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세자트라는 산스크리트어로 공존, 균형을 뜻한다.
하지만
한밤에 가긴 싫다. 고라니와 대치하고부터다. 밤의 어둠을 빌려 늠름하게 나를 꼬나보더라. 멸종 위기의 희귀 동물로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천덕꾸러기다. 실물로는 처음이었다. 근육질의 헬스 트레이너 고라니였다. 잠시 꼬나보다 휙, 숲으로 사라졌다. 유니콘을 본 아이처럼, 신비로워해야 마땅하다. 고라니가 있으면 멧돼지도 나오겠군. 멧돼지보다 멧돼지 등에 올라탄 처녀귀신. 야밤의 숲은 귀신의 놀이터. 상식이다. 고라니를 본 날 걸음을 재촉했다. 아니, 왜 방문은 안 열리는 거야. 이 건물이 아닌가? 옆 건물로 간다. 열쇠를 아무리 돌려도 안 열린다. 다시 원래 건물로 온다. 총 두 채의 건물이다. 둘 다 안 열리면, 도깨비의 장난이지. 나는 갇혔다. 밤새 도깨비와 씨름하고, 새벽에 빗자루 하나가 곁에 있겠지. 빗자루가 아니라 도깨비라고 RCE 식구들에게 아무리 호소해도, 나만 미친놈이 될 테고. 결국
문이 열렸다.
당겨야 할 문을 계속 밀었던 것이다. 이게 다 도깨비의 농간이다. 왜 밀어서 열려고 했지? 이토록 멍청했던 적은 처음이다. 망할 놈의 고라니가 도깨비와 한 패다. 한밤에 혼자는 싫다. 고라니 새끼가 날 기다릴 텐데. 내가 그 새끼 좋으라고, 그 시간에 가? 그래서 광주에서 자기로 한다.
광주 선운지구에는 누가 봐도 좀 잘 생기고, 예쁜 신혼부부가 산다. 방콕에서 머물 때, 인스타그램으로 메시지가 왔다. 박민우 작가님 꼭 만나고 싶어요. 그래서 만났고, 맥주와 밥을 얻어먹었다. 위대한 작가는 얻어먹기만 해도, 대단히 고마운 존재가 된다. 언제든지 머물고 가라고 현관 도어록 비밀번호까지 알려준다. 심지어 둘은 제주도 여행 중이지만, 나는 욕조에 몸을 담근다. 목욕까지 허락한 적은 없지만, 나는 위대한 작가니까. 묘한 긴장감을, 투철한 뻔뻔함으로 이겨낸다. 새벽 세 시 반에 일어난다. 전날 마신 커피 네 잔 탓이다. 매일 쓰는 브런치 글을 두 시간 동안 쓴다. 어떻게든 택시를 안 타겠다는 의지로 아파트 단지에서 나온다. 시베리아 칼바람이 광주까지 분다. 입김이 나오는 빌어먹을 4월이다. 14번 버스를 타고 광주 유스퀘어에 무사히 도착. 8시 첫차를 탄다. 첫차는 우등이 아니다. 14,700원이다. 대신 난방은 없다.
"기사 아저씨 추워요"
"춥습니까? 난 덥다꼬, 일부러 껐는데예."
이 양반이 장난하나? 한겨울 날씨다. 4월이지만, 1월이다. 한 시간 내내 허벅지에 무거운 가방을 올렸다. 나만 추운 것 같아서, 가방을 꼭 감싸고 떨었다. 몸에 열이 많은 기사양반이 일부러 끈 거였다. 전국 노래자랑에서 개그로 승부 보는 19번 출연자처럼 생겼다. 휴게소에서 잠시 선다. 춥다고 용기를 낸 아주머니가 엔제리너스 커피를 기사에게 건넨다.
"뭐 할라꼬, 이런 건 주십니꺼. 하하하하."
이제라도 히터를 틀어줘서 고맙습니다? 기사님 덕에 춥게 잘 왔어요? 아무튼 아름다운 풍경인데, 나의 짜증은 졸아든 간장처럼 뭔가 지독하다. 광주에서 통영으로 가는 길은 봄이다. 꽃샘추위가 서서히 녹아내리는 풍경이다. 따뜻한 꽃들이 망울을 터뜨린다. 통역 터미널 옆에 꼭 붙어 있는 다이소에서 손톱깎기와 코털 가위를 산다. 손톱깎기가 천 원이란 사실에 놀라고, 코털 가위는 2천 원이어서 약간 섭섭하다. 세자트라 숲까지 택시를 타면 7천 원. 그래서 버스. 북신시장에 내린다. 416번을 기다린다.
운행정보 없음
무슨 소리야? 첫날엔 분명히 탔는데. 일부러 북신시장을 천천히 20분 돈다. 대저토마토가 만 원. 비싸군. 반찬 세 개에 만 원. 딸기는 5천 원. 가격을 일일이 본다. 시간아 가라, 버스야 와라. 여전히 버스는 없다. 배차 간격이 한 시간 아니, 두 시간 버스인가 보군. 첫날 16분 기다려 탔는데, 대단히 운이 좋은 거였다. 알았다, 알았다. 이제는 과감해져야할 때. 택시를 세운다.
"용남면 세자트라 숲이요. 옻칠 박물관 지나서요."
옻칠 박물관 지나서요. 내 입에서 나왔다. 나 헐렁한 여행자가 아니요. 통영 사람이요. 나를 알아본 택시 기사는 통영시청 뒷골목으로 들어간다. 누가 봐도 지름길이다. 별거 없는 착실한 오르막길은, 통영의 노릇한 햇빛을 반사한다. 동피랑 벽화마을보다 좋다. 평범할 것, 환할 것. 통영 시청 뒷골목은 나만 알아주는 아름다움이다. 시청을 나와서 다시 오르막, 또 다른 다이소가 보인다. 다이소 건너편 골목으로 들어간다. 구불구불 내리막이다. 옻칠 박물관을 지난다. 거대한 바다가 멀리서 일부분만 드러낸다. 깨끗한 집들이 하나씩, 하나씩 나를 거쳐간다. 이때부터는 누구라도 벅차오른다. 코털 가위를 사고, 집으로 가는 길이다. 자잘한 일상은 필요 이상으로 아름답고, 통영의 4월은 4월답게 따뜻하다. 고라니는 얼씬도 안 하는 오전 열한 시. 세자트라 숲 점심 메뉴는 제육볶음이다.
나는 세자트라 숲에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