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조금만 더 행복해질래요?
메스티아에 왔어요. 이번엔 제대로 내려야지. 구글맵을 켜요. 숙소가 가까워지네요. 내려요. 이렇게 미리미리 내리면 되는걸. 바보처럼 끝까지 가서, 되돌아오곤 했죠. 어? 사람들이 모른대요. 참나. 구글맵에서는 맞다는데, 그 숙소가 아예 없어요. 종종 있는 일이죠. 옮겼거나, 주인이 주소를 잘못 입력했거나죠. 난감합니다. 전화를 걸 수도 없어요(인터넷만 가능한 요금제를 써요). 전화를 걸어도 영어로 설명해 줄 집주인은 많지 않아요. 제가 예약한 부킹닷컴으로 들어가요. 거기에도 주소가 나와 있어요. 주소를 치니까요. 1.7km를 더 걸어가라네요. 참 어이없죠? 구글과 부킹닷컴. 두 곳의 위치가 다른 건 주인이 제일 먼저 알아야죠. 수정을 해 놔야죠.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골탕 먹었을까요? 조지아의 스위스라는 메스티아에 드디어 왔어요. 미니밴을 타고 산길을 구불구불. 다섯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인데요. 여섯 시간 걸렸어요. 중간에 독일 할아버지가 자기 숙소 주소를 들이밀고는요. 운전사에게 찾아달래요. 어르신! 택시 아니잖아요. 일단 내리셔서 헤매셔야죠. 착한 운전기사가요. 물어물어서요. 헤매고 헤매서요. 숙소 앞까지 딱 데려다주네요. 다른 승객들은 다 똥 씹은 표정. 저도 똥 씹은 표정 반은 있었지만, 또 반은 신기했어요. 일단 어르신 자체가 참 밑도 끝도 없죠. 민폐 끼치는 게 절대악 아닌가요? 특히 유럽 사람들은 그런 거 더 철저하잖아요. 본인도 말도 안 통하는 깡촌에서 불안했나 봐요. 불안하면 그냥 남들 다 묵는 시내에 묵든가요. 스스로 한적한 곳을 찾아 놓고는, 거기까지 안전하게 데려다 놔라. 생떼를 쓰는 거죠. 그 생떼를 따뜻한 시선으로 보는 사람도 있군요. 싸늘한 냉대가 당연한 사람이, 배려의 온기에 무사한 걸 좀 보세요.
어떻게든 살게 되어 있다.
이 무모한 말이 어쩌면 참말일 수도 있겠어요. 저는 언제쯤 무모해질까요? 저는 캐리어를 굴리면서 여행해요. 장기 여행자 중에서 희귀한 생명체죠.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애물단지가 되죠. 숙소 앞까지는 비포장길이군요. 저는 번쩍 들고서요. 낑낑낑 숙소에 도착해요. 어떻게든 찾았어요. 어떻게든 찾게 되어있는데, 늘 못 찾을 것처럼 동동거려요. 어떻게든 살게 되어 있어요. 저에게도 해당되는 얘기네요. 저만 아니라고 도리질하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키가 껑충한 이탈리아 남자가요. 밥을 같이 먹으러 가재요. 러시아 여자친구 마르가리따랑 같이요. 가만, 사람이 더 늘어나네요. 이탈리아에서 온 여교수 키아라와 영국 남자 네이슨. 리카르도가 가이드, 네이슨과 키아라는 여행자. 셋은 4일 트레킹을 끝냈어요. 힘들고 지친 티가 확 나네요. 배야 고프죠. 같이 먹으러 가야 하나? 같이 먹으러 가고 싶나? 생각할 겨를도 없이 휩쓸려 버렸네요. 아, 그러고 보니까 오스트리아에서 온 친구, 그 친구는 어디에 있을까요? 숙소에서 같이 출발해서, 같이 미니버스를 탔어요. 비가 와도 트레킹을 하겠다는 친구예요. 왠지 이 친구와 같이 개고생을 하겠구나. 직감했죠. 그런데 얼떨결에 먼저 내려버렸네요. 잘못된 주소만 믿고 허둥지둥 내려버린 거죠. 너무 싱겁게 찢어졌어요. 연락처도 안 나눈 채요. 사실은요. 제 의지가 반쯤 꺾였어요. 고생도 고생인데요. 트레킹을 하려면 비용이 또 만만치 않더라고요. 산을 타고 깊이깊이 들어가면 밥값, 방값 다 비싸진대요. 얼추 4일 트레킹에 십만 원? 십오만 원? 정도 들겠더군요. 그 돈 써도 돼요. 제가 겁쟁이일 뿐이죠. 돈 이야기에 일단 뒷걸음질 치게 되네요. 가만가만. 뭐라도 대책을 만들고 트레킹을 하더라도 하자. 8월 15일부터 2주간 한국에 있잖아요. 일단 합정역 다산 북살롱에서 글쓰기 강연이 있을 거예요. 8월 21일이요. 군산에서 8월 23일 일정이 있고요(회사 강연). 제주도에서 일정도 잡힐 것 같아요. 아직 날짜는 안 정해졌고요. 두 개 정도의 일정이 더 있었으면 해요. 그러면 조금은 맘 편히 여행할 수 있겠죠? 백만 원 정도가 더 있으면 참 행복할 텐데. 그 생각을 하다가요. 그것도 사실 거짓말이란 생각을 해요. 백만 원이 생기면 사서 고생하는 거죠. 트레킹은 정말 사서 고생이죠. 풍경이야 좋겠지만, 끝날 날만 기다려요. 늘 그랬어요. 추억 보정해서, 행복한 시간이었다. 사실 내내, 투덜투덜. 끝나고 나면 절뚝절뚝이었는데 말이죠. 없으면 없는 대로, 트레킹 못하면 못하는 대로 행복해요. 갑자기 주머니가 두둑해진다고 절대로 더 행복해지지 않아요. 행복할 것 같긴 하죠. 교묘한 속임수죠. 이래도, 저래도 저는 저이고, 제 앞의 무수한 노화, 병, 심란함, 후회는 끊임없이 교차해요. 조건이 좋아지면 다 사라질 거야. 악마가 꼬드기죠. 좋은 조건은, 행복을 들이미는 게 아니라, 더 좋은 조건을 욕심내게 할 뿐인데요. 하여튼요. 저는 리카르도 일행과 밥을 먹으러 가요. 리카르도는요. 놀랍게도 숙소 사장이더군요. 그것도 제가 머물던 쿠타이시요. Dingo backpackers 호스텔 사장이라네요. 가격도 저렴해서 저도 고민 좀 했던 곳이에요. 시내에서 멀어서 포기했지만요. 쿠타이시 별로 안 좋아한다는 말까지 해요. 굳이요. 피곤하니까 느슨해졌는지, 막 나오네요. 바투미에서 바가지 쓴 일까지 다 이야기해요.
-성수기라 올려 받는 걸 수도 있어
제 차비가 바가지가 아닐 수도 있대요. 성수기면 그렇게 가격을 올린대요. 그랬다가요. 가을로 접어들면 다시 내리고요. 제가 바락바락 성수기 가격을 못 내겠다. 진상을 피운 걸 수도 있죠.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죠. 성수기 가격 올리는 게 조지아뿐일까요? 물론 차비가 달라지는 건, 조지아 빼고 아직 못 보긴 했지만요. 제가 어리석었고, 반성해야 할 일이라면 반성하고 싶어요. 리카르도도 바가지 한두 번 당한 게 아니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지아가 좋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타이시에 숙소를 차려요. 메스티아에 수도 없이 왔지만 즐거워요. 여행자를 인솔하고 비를 맞으며 트레킹을 해요. 봐도 봐도 안 질리는 산이고, 풍경이래요. 리카르도가 제 접시에 먼저 음식을 담아요. 음식이 나올 때마다 제 접시부터 챙겨요. 너무 대놓고 그래서요. 여차 친구 마르가리타 눈치를 다 봤다니까요.
-너무 말라서 더 먹어야 해
그래요. 리카르도가 저를 챙긴 이유로군요. 매일 밤 모기 때문에 깨고, 또 깨면서요. 과음으로 속이 뒤집어지면서요. 거울을 볼 때마다 더, 더 처참해지더군요. 내가 얼마나 불쌍하면, 이렇게 챙기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요. 행복할 수 있는 자격에 대해 생각해요. 행복할 수 있는 자는 토를 달지 않아요. 이래서 행복하다가 아니라요. 행복하니까 행복하다죠. 저는 24시간 토를 달아요. 친절하면, 왜 내게 친절하지? 무슨 속셈이야? 불친절하면 왜 불친절하지? 나를 무시해? 안 행복하려고 기를 써요. 찌들고, 마른 볼품없는 몰골은 제 마음이죠. 그래서 다행이에요. 제가 더 행복해질 수 있거든요. 조금 더 내려놓고, 조금 더 받아들이면 살도 더 찌겠죠? 오늘 저 독방이에요. 도미토리 가격으로 일단 빈방을 하나씩 배정해 줘요. 예약이 꽉 차면 누군가와 나눠써야 하지만요. 오래간만에 숙면 좀 할게요. 덥지도 않고, 모기도 없어요. 시원한 주방에서 여러분께 편지를 쓰고요. 네이슨이 페트병 맥주를 가져와서 한 잔 따라줘요. 밤늦게 뭐 마시면 안 되는데요. 역류성 식도염에 백해무익이지만요. 행복해요. 마셔요. 어떻게든 되겠죠. 불완전하지만, 행복해질 자격이 아예 없는 저는 아닐 거예요. 여기 시간으로 밤 열두시네요. 잘게요. 다운로드했던 영화가 있어요. 그걸 볼게요. 트레킹으로 산 정상에 오르는 것 보다요. 이어폰 깊숙이 꽂고 나만 들리는 영화를 보는 한 밤이요. 이게 진짜거든요. 컵 신라면 하나가 좀 아쉽지만요. 물 흐르는 소리가 큼지막한 밤입니다. 우리 조금만 더 행복해져요. 굿나이트, 아니 굿모닝
PS 매일 글을 써요. 저만의 오체투지입니다. 아프지 않은 오체투지입니다. 즐겁고, 유쾌한 오체투지입니다. 천천히, 지구 구석구석 닿고 싶어요. 매일 한 권의 책이 더 팔리면 족해요. 지금은 '입 짧은 여행작가의 방콕 한 끼'로 오체투지 중입니다. 방콕 가시는 분들은 강추. 제 책이라서 아니라, 좋은 책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