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그렇게 답해요. 싸가지 없는 답이죠? 장난도 섞였지만, 저에게 주는 일종의 암시이기도 해요. 너는 누구보다 부러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런...
메스티아에 왔어요. 코카서스 3국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아르메니아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나라가 조지아죠. 조지아에서도 가장 아름답다는 메스티아. 메스티아에 왔다고 끝이 아니에요. 진짜 메스티아를 보려면요. 3,4일 트레킹을 해야 해요.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저 너머엔 굉장한 풍경이 있는데, 언저리에서 시간만 허비해도 될까? 메스티아에 오기 전까지는요. 그냥 메스티아였어요. 사전에 공부도 꼼꼼히 하고, 챙겨서 다니는 성격이 아니라서요. 가면 어떻게 되겠지. 하고 왔어요. 왔더니요. 이탈리아 총각 리카르도가요. 장황하게 여러 코스를 설명해 줘요. 이 친구, 3주간 트레킹을 했더군요. 호스텔 사장이자, 가이드인데요. 손님 데리고 3주간 산에만 있었대요. 저를 보니까 생기가 돌아요. 꼭 가봐야할 곳들이 너무 많은가 봐요. 그곳들을 상상하면 벅차오르나 봐요. 좋아하는걸 하면서 살아야 해요. 몸은 피곤할 텐데도, 신이 났어요. 같이 가자고 하면 얼마든지 달려들 친구로군요. 택시를 빌려서 어디까지 가라. 3일째가 제일 힘들 거다. 꿀 정보가 한가득이네요. 택시를 타라는 말에서 전 이미 마음을 닫았어요. 여려 명이 함께라면 모를까. 혼자서 몇만 원 내고 택시를 어떻게 타나요? 친절한 정보는 고마웠지만, 저는 포기해요. 바보 같죠?
아침이 되니까 온통 트레킹 하는 사람들뿐이에요. 저들은 보고, 저는 못 보겠네요. 애초에 그렇게까지 풍경에 매달리는 사람도 아니면서요. 분위기에서 자유롭기는 힘들더라고요. 커다란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서는 사람들, 트레킹을 끝내고 더러워진 신발로 절뚝거리는 사람들. 부러운 사람들뿐이네요. 온통 비싼 식당들뿐이기도 해요. 음료에 메뉴 두 개 정도 시키면 만 원이에요. 짧게 여행 온 사람들이라면 모를까 장기 여행자에겐 부담스러운 액수죠. 하루 세 끼 만 원짜리를 먹으면 식대만 한 달 백만 원이잖아요. 제 예산은 한 달에 60만 원 정도니까요. 하루 한 번만 식당에 갈 수 있죠. 메스티아엔 식당, 카페가 즐비해요. 전 세계 여행자들이 몰려들고 있어요. 얼마나 빠르게 국제화되고 있는 곳인지 모르시죠? 이 작은 마을에 공항까지 있다니까요. 비행기는 빈자리가 없대요. 유럽 저가 항공사들이 조지아 쿠타이시에 경쟁적으로 취항 중이라서요. 왕복 2,30만 원에 손쉽게 조지아를 와요. 그것도 직항으로요. 2019년 가장 핫한 나라 중에 하나는 단연 조지아로군요. 7월에서 8월로 넘어가는 지금은 1년 중 최고 성수기죠. 이때 벌어서 1년을 살겠죠? 어쨌든 저도 한 끼는 맛있게 먹을 거예요. 아침을 거하게 먹을까요? 아니면 저녁을 거하게 먹을까요? 이런 고민을 할 때마다, 제 삶이 참으로 한가함을 실감해요. 어떤 한 끼냐가 저에겐 너무도 중요해요. 포테이토 칩 한 봉지를 사요. 맛난 식사는 저녁에 하려고요. 2라리네요. 5라리 지폐를 내요.
-잔돈 없어요?
가게 아주머니가 정색을 하네요. 5라리면 잔돈 아닌가요? 3라리 거슬러 줄 동전이 없대요. 여러분 대신 제가 짜증 낼게요. 여러분들은 미리 각오하고 오세요. 자본주의 사회에 익숙한 우리야, 소비자가 갑이지만요.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에서는요. 공급이 갑이었죠. 파는 사람이 갑이었어요. 그런 시대를 경험한 사람들이니까요. 손님이 다 고맙고, 반갑고 그러지는 않나 봐요. 다 똑같다면 사실 왜 여행하겠어요? 풍경만 보려고 여행하는 거 아니잖아요. 달라서 불편한 것도 있고, 달라서 황홀한 것도 있고. 다 좋기만 할 순 없겠죠(어랏, 제가 굉장히 긍정적인 사람이 됐네요. 숙면이 이렇게 중요해요. 독방에서 깊게 잘 잤어요). 다행히 수중에 동전이 있어서요. 포테이토칩을 사요. 못 살 뻔했는데, 샀네요. 그게 중요해요. 이깟 과자 한 봉지도 마음대로 못 사? 이런 짜증이 무슨 득이 되겠어요? 코쉬키(Koshiki)라고 하는 옛날 우리나라 목욕탕 굴뚝처럼 생긴 기둥이 곳곳에 보여요. 적의 침입을 대비해서 지은 집이었대요. 천 년도 더 된 집이라네요. 이런 외진 곳에서도 또 적과 아군이 나뉘여서, 피 말리게 죽고 죽였나 봐요. 적이 쉽게 못 달려들게, 언제든 사다리를 걷어찰 수 있게 좁고, 높은 집을 지었다네요. 외적의 침입도 이렇게 막았겠죠? 하긴, 이토록 시달린 나라가 있을까 싶어요. 로마, 페르시아, 아랍, 터키, 몽고, 구소련, 지금은 러시아까지. 조지아를 침략했잖아요. 여전히 조지아가 조지아인 건, 차라리 기적이네요. 듬성듬성 굴뚝으로 향해요. 자연스럽게 마을로 들어가요. 오르막을 천천히 올라요. 어라? 계속 오르면 정상이겠네? 오를만하겠어요. 오르다가요. 미니버스를 타고 메스티아까지 같이 온 네덜란드 커플을 만나요. 돌담에 앉아서 빵을 먹고 있네요. 잘 사는 나라에서 왔다고 다 식당 밥 먹는 거 아니군요. 일찌감치 짐 싸서 트레킹을 하는 것도 아니고요. 보고 싶은 것만 보니까요. 진짜를 못 봐요. 아이들과 함께 온 이들, 관광버스로 온 노인들. 다 트레킹 못 하는 사람들이죠. 제 눈에 안 보였네요. 이제야 조금씩 보이네요. 숨이 턱턱 막히네요. 꼭대기는 왜 이리 안 가까워지는 걸까요? 날씨는 또 오지게 좋아서, 포기가 안돼요. 꼭대기가 가깝다 싶더니요, 갑자기 오른쪽으로 길이 나네요. 홀린 듯이 따라가요.
아아아
한 시간? 두 시간? 고작 두 시간을 걸었을 뿐인데요.
메스티아(Mestia). 스바네티(Svaneti 조지아의 북쪽이고요. 고유의 언어를 가지고 있었죠)에서 가장 중요한 마을임을 잊고 있었군요.
이곳이 가장 중요한 베이스캠프 중 한 곳임을 몰랐군요.
풍경이 대단해 봤자지. 그런 괘씸한 태도 덕에, 저는 늘 깜짝 놀랍니다. 조지아는 과연 극찬을 받을만한 여행지인가? 극찬까지는 모르겠어요. 이 풍경이 대단하긴 하네요. 아니, 이런 풍경을 보면서도 까칠하려고 애쓰는 제가 이해가 되세요?
저렴한 스위스라고들 해요. 진짜 스위스를 보면 어떤 느낌일까요? 알프스를 못 가봤어요. 지금 이 풍경을 똑똑히 기억해 둬야겠어요.
파키스탄 훈자를 다녀와서는요. 그 어떤 풍경도 내게 의미가 있을까 싶었어요. 이제 저는 모든 풍경에 고개를 조아리려고요. 날씨와, 장소와, 내가 완벽한 합을 이룰 때만 보이는 풍경. 그게 제 앞에 있어요. 비가 흔한 곳이라서요. 구름이 두꺼운 곳이라 지금 저는 백만 원짜리 풍경을 보고 있는 셈이죠. 백만 원 풍경을 비를 맞으면서 보면 십만 원 풍경이 돼요. 저는 지금 90만 원을 벌고 있어요. 어디가 더 좋더라. 늘 비교에 환장한 저죠. 그냥 좋으면 좋은 거예요. 얼마나 더 좋고, 어디보다 더 좋다. 밑도 끝도 없는 잔머리 비교질에서 벗어날래요. 알아요. 또 다른 여행지에선 어디가 더 좋냐? 얼마큼 좋냐? 가본 이들에게 묻고 물을 저를요. 지금만은, 오늘만은 순결해질게요.
입이 안 다물어지는군요.
이 풍경을 봤으니까요. 코카서스의 일곱 번째 황홀, 도장 쾅쾅 찍어줄게요. 이번 코카서스 여행의 숙제. 열 개의 황홀을 찾기. 단 세 개만 남았네요. 아껴야 하는데요. 이 풍경 앞에선 도저히 아낄 수가 없겠네요. 떨리고, 감사하네요.
PS 매일 글을 써요. 저만의 오체투지입니다. 천천히, 우주에 닿고 싶다는 열망이 있어요. 우주는 여러분이죠. 독자입니다. 매일 한 권의 책이 더 팔리면 족해요. 지금은 '입 짧은 여행작가의 방콕 한 끼'로 오체투지 중입니다. 방콕 여행하시나요? 강력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