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염 증상일까요? 속이 쓰르르하고, 미열이 있네요. 화장실도 몇 번 들락날락. 어제저녁부터 이러네요. 이러다 앓아눕겠어요. 감이 안 좋네요. 뭘 잘못 먹었을까요? 어제 사르바, 타마다(어제 일기 참조)와 우쉬굴리(Ushguli)를 다녀왔어요. 우쉬굴리는요. 유럽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마을이에요. 2천 년 전부터 살기 시작했고요. 지금도 250여 명이 산대요. 유네스코에도 등재된 마을이에요. 저야 횡재했죠. 어제, 오늘 십만 원 이상은 절약한 셈이네요. 시긴이 없어서, 돈이 없어서 못 오는 곳을요. 저는 또 이렇게 오네요. 마을 자체는 작고 평범할 수 있어요. 날씨만 좋다면요. 천국이 거기 있어요. 말을 타는 관광객들, 컴퓨터 배경화면 같은 푸른 산, 푸른 산 뒤로 장엄한 설산. 어쩌면 이렇게 매번 새롭게 놀라울까요? 날씨가 정말 중요해요. 겨울에는 눈이 10미터도 쌓인데요. 못 온다는 얘기죠. 제가 감탄했던 코룰디 호수도요. 흐린 날은 또 아무것도 아니에요. 구름을 반사하는 웅덩이 같은 호수가 그냥 웅덩이가 돼요. 어이없이 작고, 꾀죄죄해요. 저는 계시처럼, 운명처럼, 완벽한 메스티아를 본 거예요.
조지아 전통주 차차를 보는 사람마다 권하는 샤르바. 까이기도 많이 까임 ㅠㅠ
샤르바가 흐르는 개울물에 씻어준 자두를 맛나게 먹었어요. 비로 흙탕물이 된 개울물 때문일까요? 흙탕물 몇 방울에도 장이 뒤집어지나요? 매일 산을 오르고 내리면서 쌓인 피로 때문일까요? 좁은 방에 누워서 말똥말똥. 그러다가 시름시름. 자다가 깨다가. 이 먼 곳까지 와서 뭐 하고 있는 걸까요? 까맣게 타고, 삐쩍 곯은 얼굴이 거울 속에 있네요. 2019년 가장 못생긴 얼굴이로군요. 뭐라도 먹어야 살이 찔 텐데요. 허기도 안 느껴져요. 마트에 가서 싸구려 초콜릿만 몇 개 사요. 아, 꿀도 사요. 작은 거 한 병에 10라리(4천 원). 생강가루가 있어서요. 꿀 생강차를 만들어 먹으려고요. 메스티아 꿀이 유명하대요. 왜 안 그렇겠어요? 야생화 천지고, 벌 천지인데요. 꿀 생강차는 분명 효험이 있을 거예요. 저는 이제 어떻게 하죠? 몸이 회복될 때까지는 뒹굴거려야겠죠? 차라리 떠날까요? 아파도 차에서, 기차에서 앓을까요?
사르바와 타마다는 지금쯤 바투미로 가는 중이겠네요. 몰랐는데 아들이 있더라고요. 할머니랑 바다 도시 바투미에 먼저 가 있대요. 워낙 수영을 좋아하고, 할머니, 할아버지를 잘 따라서요. 부부만 이렇게 메스티아에 온 거래요. 주말에 클럽도 간대요. 아이는 할머니가 맡아 주고요. 새벽 세 시까지 춤추고 논대요. 정말 귀여운 커플이죠? 저요. 드론 카메라를 선물로 줬어요. 아예 뜯지도 않았네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유튜브에 공중샷이 담긴 멋진 영샹을 올리려고 했죠. 아이고, 말도 마세요. 여행하고, 글 쓰면요. 하루가 가요. 시간이 힘차게 떠밀려 오고, 떠밀려 가요. 휩쓸리게 돼요. 중심을 잡고 해야 할 것들을 차근차근. 독하고, 냉정하게 했어야 했죠.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줬어요. 타이어가 터지지만 않았어도요. 그냥 바이바이하고 말았겠죠. 타이어가 터진 거예요. 카센터에 들러요. 저보고는 괜찮으니까 먼저 가라고요. 아니, 이렇게 허무하게 헤어지는 건가? 선약이 있기는 했어요. 숙소에 저녁 식사를 예약했거든요. 20라리(8천 원) 만찬이 기다린다고요. 음식 해놓고 저만 기다릴 텐데요. 우물쭈물 쭈뼛쭈뼛하다가 자리를 떠요. 자리를 뜨자마자 걸음이 빨라져요. 생각보다 수리가 빨라져서요. 혼자 내뺀 나를 따라잡을까 봐요. 배신자의 뒷모습을 들킬까 봐요. 열심히 걷다가요. 쌩. 샤르바의 닛산 자동차가 저를 앞 서가네요. 뭔가요? 저를 보고도 그냥 모른 척한 건가요? 그놈이 배신자네요. 끝까지 남아 있어야 했어요. 타이어 값이라도 손에 쥐어주고 왔어야 했어요. 신세는 신세대로 지고, 아쉬울 땐 내빼는 천하의 얍삽이. 지질한 배신자가 됐어요. 모든 인연은 무거워요. 그래서 다들 손사래를 친 거였군요. 샤르바는 산에서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물이 필요하냐고 물어요. 혼자, 혹은 둘이 걷는 사람에게 태워줄까? 물어요. 저만 빼고 모두 도리도리 고개를 저어요. 왜 다들 냉정하게 거절할까요? 지치면, 목마르면 신세도 질만 하잖아요. 흙먼지 산길이 마냥 행복하기만 하겠어요? 끝까지 차를 안 타더군요. 그들이 옳았어요. 머리 검은 짐승 거두는 게 아니야. 부부가 제 험담을 하겠죠? 그런데 부부가 연락이 와요. 우쉬굴리에 갈 거냐고요. 타이어가 터진 건 첫날이었거든요. 저를 진짜로 못 봐서 지나쳤던 거예요. 저만 비참해했던 거죠. 혼자 소설 쓰고, 괴로워했던 거죠. 제 마음이 편해질 방법을 찾아요. 한 번도 쓰지 않은 드론 카메라. 십만 원 조금 넘는 제품. 줄까? 주는 건 상관없어요. 애물단지가 되면 어쩌죠? 저처럼 사놓고 방치할 수도 있잖아요. 조지아 방방곡곡을 자기 차로 누비는 걸 보면요.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것도 같고요. 그런데 우쉬굴리에서 누군가가 드론 카메라를 날리는 거예요. 작은 헬리콥터가 하늘을 빙글빙글 도는 거예요. 처음 봤어요. 이번 여행에서요. 아, 이 카메라는 샤르바, 타마다 거구나.
제가 매일 이런 사진 보여준다고 이런 풍경 쉽게 생각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착하게 살아야 이렇게 날씨가 돕는다구욧
-드론 카메라 혹시 필요해?
처음엔 얘가 무슨 소리를 하나? 눈만 말똥말똥해요. 사놓고 개봉도 안 한 부끄러운 사연을 다 말해요. 너무 좋아하더군요. 공짜로 여행하고, 과일에, 빵, 술까지 얻어먹은 저는요. 그렇게 한시름 놔요. 관계가 돈으로, 물건으로 셈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요. 저는 어쨌든 자유를 얻었어요. 아빠가 하늘 높이 드론 카메라를 올리고, 아이는 고개를 꺾고 입을 벌려요. 그들의 여행이 좀 더 색달라지겠죠? 그들의 추억에 제가 있겠죠?
이제 저는 성스럽게 아프려고요. 변태인가 봐요. 아픈 게 좋아요. 오히려 잔걱정이 없어요. 끙끙 앓으면서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막상 아픔의 가운데에 있으면, 겁은 나지 않아요. 내 아픔에 집중해요. 우리의 모든 두려움은 그 안으로 들어가기 전까지만이죠. 들어가면 허둥댈 뿐인 걸요. 그래도 죽을병은 아니라는, 믿음이 있어서인가 봐요. 저는 죽지 않을 정도의 가벼움으로 끙끙끙 앓아 봐야겠어요. 참, 그 드론 카메라요. 쇼핑 목록을 봤더니 20만 원 짜리더군요. 한국에 가져와서 팔 걸 그랬나요? 속물 박민우가 입맛을 다셔요. 그래도 자유가 더 커요. 마냥 가벼워요. 아픔이 시들해질 때, 싹처럼 틔울게요. 새롭게 새로워져서 또 어딘가로 떠날게요.
물건도 인연이 있나 봐요. 고맙다. 멋진 커플 타마다, 샤르바
PS 매일 글을 써요. 저만의 오체투지입니다. 더 많은 분들께 천천히, 끝까지 닿고 싶어요. 매일 한 권의 책이 더 팔리면 족합니다. 지금은 '입 짧은 여행작가의 방콕 한 끼'로 오체투지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