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으로 무기력해지다
성당 건물로 유명한 도시. 한 때의 수도. 작은 마을. 기념품 가게로 빽빽. 완벽하게 내 취향이 아니다. 이제 5일 남았다. 출국 날을 빼면 4일. 시간이 없다. 가장 현명해지는 순간. 뭐라도 하자. 빈 시간은 안 된다. 이미 싫은 곳은 더 싫어질 게 없다. 그러니까 간다.
가기 전에 최고의 만찬부터. 나는 지금 돈에 대한 압박이 없다. 이런 순간은 백일에 하루나 되려나? 한 끼에 2만 원 이상을 쓸 수 있다. 얼마 전까지 바닥날까 봐 덜덜 떨었다. 무려 80만 원이 씨티은행에 있다. 80만 원을 번 거나 마찬가지. 이 세상에 80만보다 더 큰 액수는 없다. 나보다 부자는 없다. 극도로 평온하다. 5점 만점에 5점인 식당에서 차콘드릴리(Chakondrili)를 먹었다. 밥알이 들어간 수프다. 그러면 카르초잖아. 카르초, 오스트리, 차슈슐리. 조지아에서 늘 시키는 메뉴. 다 육개장과 비슷하다. 따뜻하고, 든든하다. 카르초엔 밥알이 들어가 있다. 뭐가 어떻게 다른지, 국물 맛만 보면 그게 그거. 차콘드릴리도 결국 육개장 류다. 한 그릇에 5천 원. 손바닥만 한 토기에 나온다. 5천 원을 받으면서, 그릇 크기가 이게 뭐야? 양부터 틀려 먹었어. 구글맵 총 스물아홉 명 모두가 만점을 줬다. 사람 수가 적긴 하지만, 희귀한 경우다. 왜 그랬지? 차콘드릴리는 그냥 그랬다. 고기가 부드럽기는 하다. 토마토와 오이, 간 호두가 들어간 샐러드는 맛있다. 식초, 소금 넣고 버무렸을 텐데 양념이 오이 속에 쏙쏙 잘 스몄다. 이깟 채소 샐러드가 특출 날 수가 있어? 이 샐러드는 특출 나다고도 할 수 있겠어. 화이트 와인(Kakhetian kondoli white dry)도 딱 좋다. 달지 않고, 가볍지 않다. 심지어 부드럽다. 완벽하다고 해도 되겠어. 그래도 5점 만점은 아니지. 난 죽어도 5점은 못 주겠다. 식당 이름은 ketsi - ethno 카페다. 하차 푸리(화덕에 구인 조지안식 치즈빵)를 시켰다면 만족도가 더 높지 않았을까 싶다.
지하철역에서 제이콥을 만났다. 히치하이킹을 해 보겠다더니, 소원을 이뤘다. 보르조미에서 오는 길이라고 했다. 카즈베기에서 보르조미로 갔었구나. 보르조미는 온천으로 유명하다. 우리에겐 삼다수가 있다면, 조지아엔 보르조미가 있다. 내가 늘 마시는 생수이기도 하다. 제이콥은 앳된 인상과 달리 상남자다. 말수가 적지만, 끝까지 남는 평생 친구 같은 느낌이랄까.
지금도 갸우뚱. 우리에게 그런 순간이 있었다. 취하고, 엉겨서 이별을 두려워하던.
특정한 나이 때만 가능한 감정이라 여겼다. 성호르몬이 왕성하게 혈관을 흐를 때만 가능한 감정. 우정도 마찬가지. 다 늙어서 만나면 잔잔하기만 할 뿐. 평생을 다짐하는 닭살은 생뚱맞다. 제이콥은 카즈베기에서 배탈이 났다. 그래서 예정보다 오래 머물렀단다. 우리랑 끝까지 마셨어야지. 독한 브랜디로 위장을 샅샅이 살균했어야지. 먼저 자리를 뜨더니, 쯧쯧. 제이콥은 고리라는 도시로 간다. 나는 므츠헤타로 가고. 안녕, 안녕. 이별이 너무 잦다. 싫다. 혼자가 된 후로, 무덤덤하다. 이들과의 시간이 너무 강렬해서, 차라리 통증이다. 오늘까지 만이다. 나의 24시간에 집중해야지. 다짐하고 나니까, 또 통증이다. 아프다.
디두베역은 우리나라로 치면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이다. 전국으로 가는 마슈카(미니버스)가 다 있다. 그것만 똑같다. 쓰레기 같은 곳이다. 가짢고, 어수선한 곳에서 최소 열 번은 물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어떤 사람은 모른다고 한다. 열 번을 묻고, 드디어 므츠헤타행 버스를 찾았다. 기사가 심드렁하게 표부터 끊으라고 한다. 바로 옆 창구에서 표를 샀다. 그 1분 사이, 기사는 부르릉 내뺐다.
므츠헤타는 트빌리시에서 30분이면 간다. 차비는 고작 1라리(4백 원). 조지아 고대 왕국 이베리아의 수도. 지금은 인구 만 명이 채 안 되는 작은 도시. 미니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스베티츠호벨리 대성당(Svetitskhoveli Cathedral)이 보인다. 므츠헤타? 므츠헤타? 버스기사에게 몇 번을 확인했다. 무사히 잘 내릴 수 있었다. 알아서 종점에서 내리면 되겠지. 쿠타이시에서 그랬다가 20km를 되돌아와야 했다. 므츠헤타는 그냥 스베티츠호벨리 대성당 자체다. 성당을 중심으로 다닥다닥 카페, 식당, 기념품 가게가 몰려있다. 내가 가장 안 좋아하는 풍경이다. 삶이 중심이 아니라, 관광이 중심이 된 마을. 견딜 수 없이 지루하다. 그깟 삼십 분, 그깟 1라리가 아까울 만큼.
짧은 바지는 입장 불가. 다들 나눠주는 헝겊으로 허리를 두른다. 모자도 안 된다. 모자를 벗는다. 아제르바이잔에서 유대교 교회에 갔더니 모자를 쓰라고 했다. 같은 뿌리의 종교다. 미사 중이었다. 높은 천장까지 성가가 닿는다. 울림이 내게도 전해진다. 20분은 꼼짝 않고 듣는다. 아, 좋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데, 드라이기 냉풍처럼 깔끔하다. 30도의 더위가 딱 좋게 따뜻해진다.
강물이 백 미터 선수처럼 흐르는데, 아슬아슬 끝내 넘어오지 않는, 그런 발코니에 세 개의 테이블이 있다. 카페 Bagneti에서 와인 한 잔을 찔끔찔끔. 므츠헤타에 오길 잘했다. 나른하고, 아늑하다. 취향은 중요하다. 므츠헤타는 내 취향이 아니다. 내 취향이 아닌 곳에서 내 취향의 성가를 듣고, 내 취향의 바람을 쑀다. 빠르게 흐르는 강물을 보며 와인잔을 들었다. 취향을 고집해야 할까? 취향을 무시해야 할까? 남은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냥 조지아면 된다. 여기면 된다. 이렇게 될 줄 몰랐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
PS 매일 일기를 써요. 저만의 오체투지입니다. 세상 모든 독자에게 읽히고 싶어요. 천천히요. 이렇게 글을 쓰면 마치 사막에서 한 걸음을 뗀 기분이 들어요. 막막하지만, 결국 끝이 있어요. 그 끝에 닿고 싶어요. 그 끝이 바로 독자입니다. 여러분입니다. 지금은 방콕 맛 이야기 '입 짧은 여행작가의 방콕 한 끼'로 오체투지 중입니다. 아, 동네 도서관에 제 책이 있나요? 없다면, 신청해 주시겠어요? 미리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