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조지아, 안녕 코카서스
와인을 일곱 병이나 사요. 조지아 와인 싸잖아요. 저 정말 뭐 안 사요. 아니 못 사요. 돈도 없고요. 저가 항공을 주로 타다 보니까요. 무게도 15kg면 끝이에요. 원래 짐에다가 뭘 더 못 넣어요. 이번엔 카타르 항공으로 집에 가요. 저렴한 시베리아 항공권을 결국 못 사요. 인터넷 결제가 돼야 말이죠. 다른 항공권을 찾다가요. 같은 날 왕복 항복권을 끊는 대참사가 발생하죠. 그날 가서, 그날 오는 항공권을 끊어 버린 거죠. 몇십만 원을 날리며 환불하고요. 홧김에 카타르 항공을 끊어요. 여러분 조금 싸게 사려고 해외 여행사(특히 go to gate) 이용하지 마세요. 그냥 우리나라 와이페이모어나 노랑풍선 정도면요. 크게 손해 보실 일 없어요. 프로모션 하는 항공권을 싸게 사는 거면 몰라도요. 멘털 완전히 나가서요. 홧김에 카타르 항공권 질렀어요. 비싼 항공권 사니까요 수하물 30kg까지 가능하다네요. 그래서 마트 와인을 사요. 한 병만 면세니까요. 나머지는 세금을 내야 해요. 4천 원, 6천 원 와인들이에요. 세금 만 원 조금 더 내면 돼요. 그 정도 세금이야 낼 수 있죠. 추석에 늘 해외에 있어서요. 이번에 사촌 형님들께 작은 도리라도 하고 싶어요. 좋아하겠죠? 또, 또 뭘 해야 할까요?
마지막 점심으로 제가 뭘 먹었게요? 안 믿기실 거예요. 도시락면을 먹어요. 러시아에서 만든 팔도 도시락면요. 오이 피클 사둔 게 있어요. 남기면 버려야 하잖아요. 그꼴 또 어떻게 봐요? 오이 피클 해치우려고 라면을 먹어요. 무게로 재서 파는 웨하스도 사요. 제겐 큰 의미가 있는 과자니까요. 위산 역류로 내내 고생했잖아요. 속이 부대끼는데, 식욕은 더 맹렬해지는 거예요. 과자 한 봉지를 사면 무조건 다 끝내요. 단 게 그렇게 당기는 거예요. 무게로 재는 과자는 무게만큼만 사면 돼요. 조금 사서, 조금 먹죠. 그렇게 먹었던 웨하스가, 크림 과자가 정이 가요. 가장 맛있는 한 끼를 장담해 놓고는요. 라면과 웨하스로 끝내요. 그런데 이 만족감은 또 뭘까요?
잠이 쏟아져요. 과식을 했으니, 왜 안 그러겠어요. 자다가 악몽을 꿔요. 이럴 때가 아닌데. 곧 출국인데. 끝의 끝. 막다른 골목이라고. 박민우 어서 일어나! 눈이 번쩍 떠져요. 여섯 시까지 이방에 머물러도 돼요. 보통 열한 시면 체크 아웃을 해야 하잖아요. 집주인에게 오후 여섯 시까지 있게 해달라고 했어요. 흔쾌히 그러라네요. 반나절을 공짜로 내주다니요. 에어비엔비라 가능한 게 아닐까 싶어요. 허락해 준 집주인 부부에게 뭐라도 해드리고 싶어요. 샤워기까지 고장 냈잖아요. 아니요. 억울해요. 샤워기 호스에서 물이 새면, 이용자 잘못인가요? 아니죠? 주인이 옆에 있다면, 현장 보여주고, 빨리 새 샤워기로 교체해라. 나 샤워해야 한다. 큰 소리 칠 상황이죠? 주인 없을 때 일어난 사고라 마음이 쓰이네요. 그냥 50라리(2만 원)를 탁자에 올려놔요. 요렇게 밑에 숨겨 놔요. 팔랑팔랑 날아가지 않게요. 사진으로 찍어서요. 꼭 챙기라고 당부해요. 억울해요. 이건 순수한 선물이라고요. 샤워 호스 수리비 아니라고요. 제 순수한 호의를 집주인이 알아봐 줘야 해요. 알겠어요. 마테 엄마?
마테가 누구지? 제 글을 내내 읽으신 분들도 가물가물하실 거예요. 이 집 막내아들인데요. 요놈을 못 보고 가요.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아이라서요. 심장이 저릿저릿해요. 마테 생각만 하면요.
그래요. 이럴 때가 아니죠. 꿀을 사야 해요. 어머니는 전 세계 꿀을 모으는 게 낙이라서요. 어디를 가든 꿀은 챙겨요. 세계의 꿀벌들이 모은 세상의 향기, 요거에 어머니가 맛을 들이신 거죠. 봐 뒀던 꿀 가게에서요. 꿀을 무사히 샀어요. 휴, 이제 다 끝났어요. 끝났겠죠? 심장 철렁하는 일 없겠죠? 그걸 안 샀어? 그걸 안 했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후회뿐인 그런 뭔가가 없겠죠? 그때 한 남자와 마주쳐요. 어디서 봤더라? 아, 맞다. 카즈베기에서 트빌리시로 오는 미니버스에서 봤었죠. 두 명의 선생님. 그중 한 명을 또 이렇게 보네요. 메스티아에서 이제 막 왔대요. 왕복 8km를 걸어 빙하를 봤대요. 너무 힘들어서요. 오늘은 쉬엄쉬엄 다니는 중이랍니다. 또 다른 한 명은 여전히 쌩쌩해서요. 어딘가로 투어를 갔대요. 하나라도 더 보겠다고요. 우리는 카페에서 시원한 레모네이드를 마셔요. 시간이 없어요. 이렇게 노닥거려도 되나요? 그런데도요. 늘 새로운 이야기는 즐거워요. 세계사 선생님이라서요. 풍부한 지식을 담아 전쟁 이야기, 문명 이야기, 신화 이야기를 쉴 틈 없이 들려줘요. 책을 읽는 기분이 네요. 다큐멘터리를 보는 기분이에요. 길에서 늘 누군가를 만나요. 우연이라고 생각했는데요. 가끔 일어나야 우연이죠. 우연이 거의 매일이에요. 신비로워요. 여행이 아니면 평생 모르고 살았을 사람이, 한 겨울의 그리스를 왜 가야 하는지, 스위스의 알프스 말고 오스트리아의 알프스를 가야 하는지를 멋지게 설명해 줘요. 제가 오스트리아를 간다면, 굳이 겨울에 그리스를 간다면 다 선생님 덕이죠.
네, 지금 트빌리시 공항이에요. 체크인까지 끝냈어요. 출출해서요. 면세점에서 초콜릿 하나 사요. 그것만 사면 정 없으니까요. 건포도와 견과류로 만든 추첼라도 사요. 조지아 대표 특산품이죠. 추첼라. 질겅질겅 건포도에 견과류가 들어간 간식이에요. 총 합쳐서 25라리니까요. 만 원 정도네요. 공항 물가가 이렇게 싸도 되나요? 4라리 동전까지 쓰면요. 몇 천 원에 또 선물 몇 개가 생기는 거예요.
-80라리입니다.
응? 잘못 들은 거겠죠? 갑자기 왜 숫자가 불어나죠? 유로였어요. 숫자는 모두 유로였어요. 달러도 아니고. 유로요. 이 공항은 유럽 병 걸렸나요? 자기네 나라 돈 놔두고 유로를 써놓는 거죠? 싸게 보이려고 사기 치는 거죠? 거기에 제가 말려든 거죠? 손이 벌벌 떨려요. 이렇게 돈 쓰다가요. 금방 또 거지되겠죠? 제 여행기 심심하지 말라고, 조지아 공항님이 사기까지 쳐주네요. 아이고, 감사해라. 그래요. 그렇게 사기 친 덕에 어머니께 이런 걸 또 가져다 드릴 수 있게 됐어요. 가격 알면 안 샀겠죠. 그런 걸 뭐하러 사 오니? 그래 놓고 성당 친구분들과 나눠 드실 걸 알아요. 자식 잘 둬서 이런 것도 먹어 보네. 으쓱하실 걸 아니까요. 잘 샀어요. 잘했어요. 제가 조지아에 있었던가요? 정말요? 공항에 오니, 지나온 석 달이 믿기지가 않아요. 내일이면 한국이라는 것도요. 공중에 붕 떠서는 나른한 낮잠을 자는 건 아닐까요? 꿈속 풍경처럼 느껴져요. 이제, 가야죠. 집에 가야죠.
참, 조지아 택시 어플 볼트(Bolt)로 공항 왔는데요. 추가로 8.5라리를 더 받아갔어요. 단말기에는 15라리가 나왔고요. 사기는 아닌 느낌이라 드렸어요. 시내에서 공항까지 어플 택시로 올 경우 만 원 정도 차비 생각하시면 됩니다.
PS 매일 일기를 써요. 저만의 오체투지 방식입니다. 매일 글을 쓰면, 언젠가는 지구 반대쪽 독자까지 닿을 수 있으리라 믿어요. 동네 도서관에 박민우의 책들을 추천해 주시겠어요. 2019년은 '입 짧은 여행작가의 방콕 한 끼'로 오체투지 중입니다. 방콕에 가면서 이 책은 안 가져가시다뇨? 후회하실 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