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넘치는 여행자의 한 끼

이보다 더 지옥일 수 없다

by 박민우


‘비싼 식당에서 가장 비싼 메뉴를 고른다’

치앙마이 숙제다. 내겐 돈이 있다. 10000밧. 약 36만 원. 호텔 방값, 방콕으로 올라가는 기차표 값 빼면 20만 원 정도로 졸아든다. 그 20만 원을 3일 동안 쓰겠다. 아니 꼭 써야 한다. 독자 중 몇 분과 목포 해양 대학 김교수가 보내 준 돈이다. 어떤 독자는 식당과 메뉴를 꼭 집어서, 먹어 달라고도 했다. 내가 내 입으로 먹는데, 돈까지 받다니. 파렴치하게, 행복하고, 감사하다. 3주 전까지만 해도 10만 원이 전 재산이었다. 돈이 생기면 지키고만 싶어지는 이들에게, 나는 귀감이 되고자 한다.


배가 고프지 않다.

내내 속이 부대끼는 중이다. 혼자 다니면 이런 일이 없다. 동행과 보조를 맞추다 보면 사달이 난다. 배가 안 고플 때도 먹어야 한다. 태국 형님이 떠나고, 1.5리터 생수 두 병부터 샀다. 병을 잡고 어깨 높이로 올린다. 그때 숨을 내쉰다. 늙으면서 위장이 비대해지고, 갈비뼈는 내려간다. 위장을 압박하고, 소화를 방해한다. 의사 아니고, 존경하는 유튜버님께서 그렇다고 했다. 무게가 있는 걸 들어 올리면서 숨을 내쉬면 공간이 생긴다. 비대해진 위가 편해진다. 좋은 건 다 해보고, 대부분 때려치운다. 이마에 땀이 흐르지만 멈추지 않겠다. 후우우, 후우우. 하루에 7만 원을 먹는 걸로 쓰겠다. 쌀국수가 천 원인 곳이다. 일기를 세상에 내놓는 마당에, 매혹적인 사치도 필요하지. 내 식탐은 매우 공익적이다.

“웨이팅이 있지만 오래 기다리진 않았습니다. 싼 가격에 맛있는 곱창과 삼겹살, 커리를 먹을 수 있어요~! 303번 미얀마식 커리, 908 스틱키 라이스, 809번 곱창 두개, 703 삼겹살과 패션프룻 주스, 콜라 전부 해서 349밧 나왔어요. 한국 돈으로 약 12000원 가량에 정말 배부르게 먹었네요.”


구글에 올라온 님만해민(치앙마이의 중심가, 치앙마이의 명동) 똥뗌또(tong tem toh) 식당 후기다. 303번 미얀마식 커리? 이거 깽헹레이(Gaeng hang ley)다. 며칠 전 온몸에 경련을 일으켰던, 그 인생 메뉴다. 원래는 미얀마 음식이었구나. 비싼 음식을 내내 먹을 작정이지만, 이건 먹어야지. 가난할 때 눈물겹게 먹었던 음식이다. 재벌이 되니, 가난의 소박함이 그립다.

‘자기 순서일 때 없으면, 새 번호표 뽑으셔야 해요.’


식당 입구에 영어로 쓰인 협박문이 정말 섹시하다. 오후 세 시엔 줄이 없다. 싸니까 어떻게든 먹으려고 세 시에 온 거냐고? 그런 오해 정말 섭섭하다. 배가 이제는 좀 고파지려나? 기다리다, 기다리다, 왔다. 백 개가 넘는 메뉴가 있다. 어떻게 딱 하나만 시켜?

먹겠다. 먹고 죽겠다.

기회는 늘 있는 게 아니고, 배 아파서 죽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303번과 달걀 채소 볶음을 주문했다. 배야 고파져라, 제발 고파져라. 세상 가장 하찮은 꿈이, 어려운 꿈이 됐다. 모든 꿈은 어렵다. 하찮아질 때까지, 어떤 꿈도 멀어진다. 깽항레이에 밥을 비빈다. 약간 짜구나. 맛은 있지만 약간 짜다. 밥 하나 추가. 두 그릇을 다 비볐다. 남들은 짜다고 불평할 때, 밥 두 그릇의 순발력이 어디서 나올까? 천천히, 천천히 신의 비율로 버무려진 카레라이스를, 천천히 입에 넣었다. 터지기 직전의 타이어에 바람을 넣는 느낌으로, 천천히. 속도 조절 잘 못 하면


터진다. 아, 맛있다. 빨리 먹고 싶다. 허겁지겁 처먹고 싶다. 하지만 천천히, 숨을 고르고, 양들처럼 천천히. 스코틀랜드 에딘버러로 가던 새벽 버스 창으로 봤던 그 양 새끼들. 인형인 줄 알았다. 하도 움직임이 없어서…. 양 새끼들처럼 천천히 먹어도, 포동포동 살만 잘 찐다. 그러니까 천천히. 속도에만 집중하라. 속도에만 집중했더니 두 배로 커진 카레라이스가 깨끗하게 사라졌다. 숨은 좀 쉬기 힘들었지만, 배는 안 터졌다. 과식에 몽롱해져서는 술주정을 하고 싶다. 달걀과 함께 복은 채소는 너무 거들떠도 안 봤구나. 삐진 채소볶음을 다정하게 또 다 먹었다. 전혀 배가 안 고플 때 네 접시의 밥과 반찬을 완주하는 인간이 되었다. 돼지 새끼, 개 새끼, 소 새끼도 다 이런 시절을 겪으면서 돼지가 되고, 개가 되고, 소가 된다. 나는 미치지 않았고, 이 배가 왜 안 터졌는지가 궁금할 뿐이다.


그날 밤, 나는 치앙마이를 미친 듯이 돌아다녔다. 비싼 저녁을 먹어야 한다. 점심은 싼 거 먹었으니까, 7만 원을 한 번에 써야 한다. 화려하고, 비싼 식당 위주로 기웃거리며, 와인을 고르는 손님을 째려봤다. 먹어야 해, 어떻게든 먹어야 해. 돈은 있다. 돈은 충분하고, 충분하다. 이런 날은 평생 없었다.

돈은 있지만, 돈만 있다.


방에 다시 돌아와 생수병을 한 시간 이상 들어올렸다. 위장은 더 부풀어 올랐다. 물구나무서기까지 했다. 직립보행을 하는 인간은 위가 바닥으로 쳐질 수밖에 없다. 잠시라도 늘어진 위장을 밀어 올려준다. 물론 의사가 한 이야기 아니고, 존경하는 유튜버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돈만 있는 사람이 되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최초의 밤이, 치앙마이에서 늙어간다.

이제 그만!

식욕에게 정색하고, 그만하라고 했다. 포기를 받아들이자, 몸이 조금씩 이완된다. 숨이 고르게 쉬어진다. 죽기 싫으면, 그냥 자라. 물구나무를 선 나는, 빠르게 후려치는 깨달음이 당혹스럽다. 그래, 그냥 자자. 내일 십만 원짜리 한 끼를 먹자. 물구나무 선 채로 잠들고 싶다. 내일은 새 위장을 단 내가 태어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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