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찬란한 순간, 너희를 만났지

추억 소환, 울먹울먹

by 박민우
카즈마, 이찌, 나. 보고타 볼리바르 광정이었지, 아마? 카즈마야 사진 제대로 못 찍냐?


-민우, 생일 축하해

-이찌?


이찌네요. 신기해요. 남미 여행 때가 언제죠? 2005년, 2006? 15년이 다 되어가네요. 파나마, 콜롬비아에서만 잠시 같이 했어요. 그뿐이죠. 이스라엘 대표 관종이죠. 어디서나 주인공이어야 해요. 저도 한국 대표 관종이라고요. 시작부터 완패였어요. 영어실력도 달리죠. 아는 것도 달리죠(이찌는 무슨 대화든 막힘이 없더군요). 그리고 이찌에겐 섹시함이 있어요(있나 봐요). 서양 아가씨들에게 굉장히 인기가 많았죠. 얼마나 재수 없나요? 언제나 꼭 붙어 다니재요. 독재자였어요. 여행 중 잠시 친했을 뿐이고요. 그런 친구는 이찌 말고도 많죠. 2,3년 그리워하다가 흐지부지. 그렇게 소멸된 과거가 되죠. 보통의 여행 친구라면요. 이찌는 1년에 한두 번은 꼭 안부를 물어요. 어제는 두 아이 사진을 보내왔더라고요. 천사처럼 예쁘더군요.


-내 블로그랑 페이스북에 올려도 돼?

-안돼. 애들 사진은 안돼.


천사들은 저만 감상해야겠어요. 이스라엘 군인 출신. 한참 전에 회사 부회장이었으니까요(어떤 회사인지 설명해 줬는데 기억이 안 나요). 지금은 그 이상이 아닐까 싶군요. 잘 살 줄 알았어요. 여행을 할 때도 1등이었거든요. 여행에 무슨 등수가 있겠어요? 그래도 달랐어요. 외진 곳, 소수민족을 특히 좋아하고요. 힘들어야 짜릿해했죠. 숙소 근처만 어슬렁대는 저와는 근본부터 달랐어요. 근본 있는 여행자였죠.


-민우, 언제 이스라엘 올 거야. 너무 보고 싶어. 내 와이프도 너를 보고 싶어 해. 내가 얼마나 이야기를 많이 했으면 그랬겠어?

-이찌. 넌 나처럼 그리운 친구가 백 명이 넘지 않아?


사실일 거예요. 백 명이 뭐예요. 이백 명도 넘을 걸요. 친구 욕심도 많고, 그 모든 친구들에게 애틋하게 굴 거예요. 잊힐 줄 알았죠. 이찌의 에너지로 이렇게 남네요.


저는 사실 과거가 좀 답답해요. 과거에서 자유로워질수록 젊어진다 믿어요. 늘 초짜가 되어서, 어설프지만 발전하고 싶죠.


-와, 다른 블로거랑 다르게 글도 잘 쓰시네요.


어제 제 블로그에 이런 댓글이 달렸어요. 여행 블로그를 이리저리 헤매다 저를 발견했나 봐요. 그러자 다른 분이 이분 작가라며 대댓글을 달아 주더군요. 인터넷도, 스마트폰이 없을 때부터 열심히 다니고 썼던, 화석 같은 존재라고요. 옛날 옛날 여행 작가. 과거의 나를 타인의 댓글로 봐요. 신기해요. 재밌어요.


과거는 과거일 뿐이죠.


그럴까요? 과연 그럴까요? 카즈마는 어떻게 생각할까요? 나와 이찌 사이에서 윤활유 역할을 했죠. 너도 좋고, 너도 좋아. 이런 식으로 요. 내가 더 좋다고 해야지. 저에겐 카즈마가 성에 차지 않았죠. 그때는 내가 왜 얘네들이랑 어울려야 하지? 피곤하고, 좀 억울했어요. 마냥 기쁜 건 아니었으니까. 일본 놈, 이스라엘 놈 꺼져라.


제가 글을 쓰는 사진은 꽤나 희귀사진이군요. 이따위 자세로 글을 씁니다만 하하하
배 가라앉는다. 물을 퍼라. 오오. 섹쉬 사진.

이 아이들이 찍어 준 제 모습이네요. 오래간만에 들춰봐요. 평소에 사진을 잘 안 봐요. 일로도 많이 보게 되니까요. 원고를 쓸 때 어쩔 수 없이 봐야 하거든요. 추억 소환한다며 그냥 보지는 않죠. 제가 <1만 시간 동안의 남미>를 쓸 때요. 사진이 부족했어요. 이 친구들이 사진 파일을 통째로 보내줬죠. 둘 다요. 그래서 책이 나왔어요. 나올 수 있었어요. 가장 까칠했던 제가, 아쉬운 소리를 해야 했죠. 흔쾌히 도움을 주고, 여전히 저를 찾아요. 이놈의 인기 좀 보세요. 시간이 지나도 이리 치명적이라니까요. 제가 차갑다는 생각을 해요. 챙기고, 연락하기. 그걸 못해요. 약하다는 생각을 해요. 드문드문 연락에 뭉클해져요. 존재감을, 영향력을 그런 식으로 확인해요. 먼저 연락하면 지는 거죠. 약해 빠진 놈은, 그런 게 중요해요. 큰 의미죠.


각각의 사진 파일에 같은 장소, 같은 사진들이 있어요. 한 때의 동지였죠. 끓어오르는 한 때였어요. 머무는 게 지긋지긋하고, 남들처럼 늙는 게 무엇보다 두려웠죠. 이찌와 카즈마는 여행을 멈췄어요. 아빠가 됐어요. 저는 떠돌죠. 누구보다 덜 여행자 같던 제가 아직도 떠돌아요. 결말은 늘 반전이죠. 지금도 물론 결말은 아니고요. 지금의 위치는 지금일 뿐이죠. 분명한 힘으로 우리 모두는 반전을 준비해요. 그러니까 사는 거죠. 살아보는 거죠. 궁금하잖아요.


친구들의 생일 축하가 신기해요. 조지아에서 만났던 다리안과 니콜라 커플은 동시에 축하 메시지를 보내네요. 독일의 어딘가에서요. 누가 먼저 민우에게 답을 받나. 내기라도 했나 봐요. 다리안이 몇 초 일찍 왔어요. 그래서 먼저 답을 줬죠. 매일매일 제 생각을 한대요. 한국에서, 이스라엘에서, 일본에서, 독일에서, 벨기에에서 길고 길게 실타래가 풀려서 저에게 닿았어요. 저도 그 실을 꼭 쥐고 있죠. 안 쥐고 있는 척. 가끔씩만 팽팽해지는 정도로 우리는 연결돼 있어요. 사무칠 때도 있죠. 그런 감정은 좀 귀찮고, 좀 어이없어요. 이게 그리 애절할 일인가요? 멍청해서죠. 나약해서일 거예요. 종일 나약해져서는 그때의 남미를, 그때의 저를 봐요. 몰랐는데 이토록 젊었군요. 이토록 예뻤군요. 그래도 왈칵 눈물까지는 안 나네요. 갱년기는 아닌가 봐요. 휴, 다행이다.


콜롬비아 타강가 2006년 1월 1일. 마셔라, 취해라!

PS 매일 글을 써요. 오체투지. 저를 낮추고, 천천히 다가가고 싶어요. 지구의 글을 읽는 모두에게 닿고 싶죠. 그러니까요. 가까운 도서관에 박민우 책이 없다면, 생각날 때 추천해 주세요. 얼마나 많은 이들과 한순간에 가까워질까요. 2019년은 <입 짧은 여행작가의 방콕 한 끼>로 오체투지 중입니다. 방콕 다녀오신 분들이 이 책 칭찬을 어찌나 하는지 몰라요. 네, 그런 책입니다. 헤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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