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책이 시작됐어요. 오호.
올해 세 권의 책을 쓰기로 했어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도전이죠. 다짐만 하고요. 또 사흘을 허비해요. 모든 계획은 허비하고, 허비한 후에 시작되죠. 가득 찬 절망을 끌어안고요. 더 이상 끌면 끝장. 벼랑 끝에서 써요. 벼랑 끝 새벽이 참 싫죠. 자고 싶은데 자면 안 되는 새벽 두 시가 싫어요. 지금까지 제 책은 이야기였죠. 덩실덩실 광대의 글이었어요. 치고, 빠지고, 다시 치고, 뒤로 물러섰다가는 강렬하게 한 방. 깔깔깔, 뭉클, 낄낄낄, 훌쩍. 섞고, 비볐죠. 요즘 친구들은 긴 글을 안 읽는대요. 원 없이 썼다가는 두꺼운 책이 돼요. 젊은 친구들에게도 읽혔으면 해요. 그들의 손에 제 책이 쥐어져야 해요. 그러려면 두껍지 않아야 해요. 간결해야 해요. 간결함 속에 진득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까요? 지금까지도 이 질문에 답을 못 구했어요. 매일 쓴 일기가 버젓이 있어요. 그걸 바탕으로, 아니 그걸 외면하고 여행기를 쓸 거예요.
2천 시간 동안의 코카서스
간결하고, 강렬할 것.
문고판 책에 대한 향수가 있어요. 글자로 빼곡한, 종이 냄새 폴폴. 책 이외엔 아무것도 섞지 않은, 검은색 잉크의 바다. 그런 책이어야 해요. 저는 이 책을 전국을 돌며 팔 거예요. 보따리상이 될 거예요. 국내 최초, 아니 세계 최초일까요? 영업도 필요 없죠. 판매망도 필요 없어요. 커다란 트렁크에 제 책 꽉꽉 채워서 전국을 도는 거죠. 인터넷 서점 어디에도 없어요. 저를 통해서만 살 수 있죠. 편집도, 디자인도 기본 중의 기본. 그걸로 끝. 내용이 뜨거워야겠죠. 사진도, 그림도 없이 사막처럼 음산한 책일 테니까요. 사막의 굴곡이 장관이 되려면 기다려야 해요. 동이 트고, 모래알뿐인 세상이 서서히 드러나죠. 부드럽고 거대한 선이 지평선을 메우죠. 동틀 때의 사막 같은 책이었으면 해요. 책의 중간쯤에선 동이 터야죠. 그때쯤 입을 못 다물게 되는 책이요. 아, 장엄하다.
이러니 안 써지죠. 여행기일뿐인데, 지금은 세상을 떠난 백 명의 작가를 욕심내요. 너무 갔어요. 꿈도 꿔선 안돼요. 능력을 말하는 게 아니라요. 그렇게 작심하면 우주가 닫혀요. 요즘 자주 하는 개소리인데요. 우주 어쩌고 하는 거요. 요런 세계관이 제게 도움이 되더라고요. 일단 끝이 없고, 측정도 불분명한 시공간이 우주라서요. 마음대로 규정하면, 그게 저의 우주가 되죠. 그 우주에서 우린 하나같이 몸부림을 치는데요. 애초의 정자, 애초의 난자. 그 불가능한 시작점도 다 우주의 조화잖아요. 도움이잖아요. 그래서 태어났죠. 우리의 의지로 세상 밖으로 나온 게 아니라요. 생명 탄생, 그 어마어마한 힘을 빌려 쓰려면요. 생각이 많아져선 안 돼요. 원대한 포부, 임진왜란의 이순신을 생각하면 안 돼요. 내 앞의 작은 책상과, 헐벗은 시작이 필요하죠. 어쩐지 풀이 죽은 작은아이가 있어요. 섬에 살죠. 글자의 재미를 아는 아이예요. 섬에서 태어났으니 답답하단 생각은 못해요. 애초에 섬이 세상이 전부니까요. 뭍의 아이들이 누리는 즐거움을 모르죠. 그래서 책이 재밌어요. 학교 안 작은 도서관에 새 책이 오면, 가장 먼저 펼쳐보는 아이죠. 그 아이가 2천 시간 동안의 코카서스를 펼쳤어요.
-안녕하세요. 이 책은 바람이 불지 않은 방콕에서 써요. 게으름이 망고가 되어 주렁주렁 열린 도시죠. 우리 혹시 처음인가요? 이건 책이 아니라, 저예요. 숨 쉬고, 걸어 다니는 사람 같은 책이죠. 다음 페이지를 열면, 여기가 코카서스가 돼요. 밤 여덟 시부터 맹렬히 불어오는 바람, 천 년 전부터 저를 기다린 사람, 천국과 맞닿은 풍경이 차례로 다가올 거예요. 네, 사실 여기까지 읽었으면 덮기가 힘들 거예요. 그러니까 왜 이 책을 집으셨어요? 기분만 약간 좋아지는 책인 줄 알았죠? 선을 넘는 재미까지는 기대 못하셨죠? 코카서스의 바람이 훅. 진짜 바람이죠? 괜한 허풍이 아니죠? 두려워 마세요.
풍덩!
숨 쉬는 게 귀찮을 만큼의 '황홀'을 준비했어요.
2019년 9월 5일 방콕
PS 매일 글을 씁니다. 왜겠어요? 여러분께 다가가고 싶어서죠. 막 대단하고 싶지 않아요. 천천히, 스며들듯이 끝까지. 닿고 싶어요. 닿아야 해요. 가까운 도서관에 박민우의 책이 없다면요. 신청해 주실래요? 객관적으로도 엄청 좋은 책들이거든요. 2019년 <입 짧은 여행작가의 방콕 한 끼>라는 책을 냈어요. 방콕 여행을 준비 중이시라면, 얼른 업어가셔야 해요. 방콕이 두 배는 즐거워질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