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에서 방콕으로
여행의 로망이 있나요? 1초, 2초, 3초, 4초, 5초. 딱 5초만 셀게요. 5초 안에 떠올려 보세요. 여행하면 떠오르는 가장 황홀한 장면이요. 저는 아침밥이요. 호텔 조식이 떠올라요. 로망이니까요. 비싸도 되죠? 따뜻하게 덥혀진 모닝롤 반을 가르고, 살짝 녹은 버터를 발라요. 잼을 덧바르고요. 절반만 씹어요. 그때쯤 뜨거운 아메리카노가 테이블 위에 놓이죠. 커피는 마시는 게 아니라, 맡는 거죠. 맡으려고, 마셔요. 평소에 커피를, 잼을 딱히 더 좋아하지도 않아요. 하지만 로망에선 꼭 잼까지 바른 빵이어야 해요. 그런 조식이 있던 아침은 환했어요. 좋은 냄새와 좋은 잠도 있었죠. 작정하고 기억하지 않아도, 그런 순간들은 차곡차곡 쌓여요. 커피는 꼭 한 템포 기다렸다가, 코끝으로 다가와요. 요망한 것.
불타는 저녁놀이나, 스쿠버 다이빙이 로망인 사람도 있죠. 야자수와 그물침대일 수도 있겠고요. 설산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고된 트레킹일 수도 있죠.
밤기차가 로망인 사람도 있나요? 로망도 비싼 기차 얘기죠. 저는 돈 아끼려고, 밤기차 타요. 로망 없어요. 방값 굳죠. 앉아서 가는 것보다 딱히 비싸지도 않아요. 인도에서 침대칸은 더 싸요. 가격에 따라 칸이 달라져요. 가장 저렴한 칸은 SL칸이에요. Sleeper Class 약자죠. 만 원도 안 되는 돈으로 24시간 이상 태워줘요. 자리를 접었다 폈다 해요. 낮에는 앉고, 밤이면 펼쳐서 3층 침대를 만들죠. 어느 층에서 자면 좋을까요? 누구나 가운데 층을 싫어해요. 답답하고, 불편하죠. 위, 아래에 갇힌 느낌은 누구라도 싫겠죠? 아래층도 딱히 더 좋지는 않아요. 날강도들이 언제 내 귀중품을 채갈지 모르니까요. 그래서 배낭 여행자용 철사로 둘둘 말아서, 묶어놔요. 그 안에 귀중품 넣어서요. 어딘가에 걸쳐서 묶어놔야 해요. 그냥 가방 입구만 못 열게 해 놓는 사람들이 있어요. 아휴, 바보들. 그래서 가방이 통째로 사라져요. 하루아침에 거지가 되죠. 누가 권하는 짜이(인도의 밀크티)도 절대 마시면 안 돼요. 수면제를 섞어서 먹인대요. 그런 사람을 한 번도 못 봤지만요. 인도에서 나눠주는 걸 드셨나요? 수면제도 안 든 짜이를요? 인도는 비슷비슷한 아시아 나라 중에서도, 더 팍팍해요. 마음의 여유가 없죠. 손님에게, 타인에게 나눠주는 사람은요. 큰 덕을 베푼 사람이에요. 더 고마워하셔도 돼요. 있으면, 끼니 걱정 없으면 다 나눌 사람이에요. 배고파서 사기꾼이 돼요. 전 인도 사람을 못 미워하겠어요.
치앙마이에서 밤기차를 타기로 했어요. 방콕으로 돌아가요. 설레기는요? 그냥 타요. 비행기보다 싸서요. 치앙마이를 이렇게 덤덤하게 떠나네요. 호텔에서 체크아웃하고요. 건너편 식당으로 들어가요. 하나라도 더 먹고 가려고요. 하나라도 더! 이 느낌이 좋아요. 제게도 아직 그런 감정이 남았군요. 시간이 없다. 그 쫓김이 맞아요. 우리의 인생 통째로 보면요. 시간 별로 없어요. 체감하기 어렵죠. 어제와 같은 하루가 오늘도 왔으니까요. 내일도 올 테니까요. 여행은 좀 다르죠. 집으로 돌아갈 시간, 비행기를 타야 해요. 뭘 더 사야 하지? 빼먹은 건 없나? 공항에서도 쌀국수를 팔까? 가까운 곳에 박물관이 있었네. 그거라도 볼까? 그 마음으로 매일을 산다면요. 우리의 일생은 꽉 찰 거예요. Healthy b라는 식당인데요. 브런치 카페로 평이 좋더군요. 가게 이름답게 건강한 메뉴들이 많더라고요. 생강에다 파인애플, 복숭아를 갈아 넣은 주스를 시켜요. 몸 챙겨야죠. 에어컨 바람 으슬으슬 침대칸에서 잘 건데요. 아, 그리고 핸드폰도 더 충전해 놔요. 충전할 곳이 없을 테니까요. Grab을 켜요. 카카오 택시랑 비슷한 서비스죠. 어허, 기차역으로 가는 차가 안 잡히네요. 카카오 택시도 항상 잘 잡히는 건 아니지만요. 없어요. 기차역으로 가겠다는 차가 아예 없네요. 기차역으로 가는 버스나 썽태우(트럭버스) 같은 건 알아보지도 않았어요. 저는 부자거든요(며칠 전 일기를 참조하세요). 땀 한 방울 안 흘리고, 쾌적하게 가려했죠. 상황이 이러니 어쩌겠어요. 길바닥으로 나와서 툭툭을 세웠죠. 마침 지나가는 툭툭은 있군요. 오토바이 택시예요. 태국의 대표적인 교통수단이죠. 미스 유니버스 태국 대표로 나간 여자 가요. 툭툭으로 된 드레스를 입은 적이 있어요. 우리나라 대표가 조선시대 가마를 형상화한 드레스를 입은 느낌이랄까요? 그 귀여운 파격이, 상당이 즐거웠죠. 어쨌든 툭툭을 잡아요. 툭툭은 정말 부르는 게 값이에요. 흥정을 해야 해요. 피곤하죠. 200밧을 내놓으라네요. 그랩 택시로도 140바트면 간다는데, 툭툭은 왜 200밧인가요? 150밧! 저도 좀 목소리를 높여봐요. 톰보이라고요. 남자 복장을 한 여자 운전사가요. 그러면 안 되는데.... 표정으로 끄덕끄덕 합니다.
잠깐만요.
충전기를 카페에 꽂고 왔군요. 운전기사는 기다리겠다고 합니다. 300m 정도 왔어요. 좀 돌아가 주지. 기다리겠다네요. 뜁니다. 짐을 툭툭에 놔두고요.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짐을 질질 끌고 가실래요? 새 툭툭을 잡으실래요? 그냥 믿고, 맨몸으로 뛰실래요? 운전기사가 도망가면 저는 모든 걸 잃어요. 당장은 충전기뿐이에요. 맨몸으로 뜁니다. 충전도 어느 정도 해놨겠다 당장 없어도 큰일 안 나요. 그래도 충전기뿐이죠. 그게 전부가 돼요. 그건 꼭 있어야 해요. 뜁니다. 힘이 빠져도, 속도를 늦춰선 안돼요. 충전기도, 툭툭도 놓쳐선 안 되니까요. 땀으로 옷이 다 젖었지만, 충전기가 무사해요. 다시 뜁니다. 더 빨리 뜁니다. 제 짐은 무사해요. 툭툭은 그곳에 꼭 있어야 해요. 어떤 선택이 답일까요? 저는 이 선택 말고는 모르겠어요. 다시 툭툭을 잡거나, 짐을 끌고 올 수는 없어요. 저는 어쩔 수 없이 어리석어야 하나 봐요.
기다려줬으니 200밧 줘야겠지? 에이, 툭툭으로 데려다준 것도 아니잖아. 150밧과 200밧 사이에서 치열합니다. 원하는 것들을 다 지켜낸 순간, 다시, 내 안에서, 새롭게 복잡합니다. 어리석음은 걱정을 당기는 힘이 있어요. 170밧. 어리석음이 내린 결론입니다.
2층 침대의 2층에서요. 저는, 잘도 잡니다. 좁아터진 2층 침대고요. 캐리어를 놀 수 있는 칸은 이미 다 찼군요. 캐리어를 어떻게든 2층으로 올려요. 굳이 발밑에 두고, 그 위에 발을 얹어요. 좁아터진 곳에, 캐리어까지 올려놨으니까요. 얼마나 불편하겠어요. 덜컹덜컹. 규칙적인 기차의 소음이 묘한 안정감을 줘요. 규칙적이니까요. 불규칙적인 소음이 아니라서요. 얼마든지 자요. 여러분도 저처럼 잘 잘 수 있어요. 미리 걱정하는 자신과, 그곳에 놓인 자신은 달라요. 생각이 키운 나보다는, 현장에서 키운 내가 늘 더 강해요. 그게 좀 쾌감이 돼요. 쌔근쌔근 잡니다. 방값이 굳었어요. 비행기 값도 굳었죠. 2만 원밖에 안 해요. 밤새 저를 태우고, 그 먼 방콕으로 데려다주는데도요.
여행자의 몸이 됐어요. 오랜 단련으로 이룬 건가? 작은 성과를 조금 대견해합니다. 늘 어리석었는데, 그래도 어떤 성장이 있었나 봐요. 그 누구보다 안정적으로 잠이 들어요. 아늑함까지 느껴가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