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올게요. 그날을 같이 기다리자고요.
이 방에서 도저히 못 잘 것 같더니요. 닷새를 잤네요. 침대 보, 베개 보에서 나는 섬유 유연제 냄새에 머리가 지끈지끈했죠. 더운데 에어컨을 안 켤 수는 없고, 에어컨을 켰으니 창문을 열 수도 없고. 대신 새벽에 눈을 뜨면 에어컨부터 꺼요. 창문을 열죠. 5일간 이렇게 열대의 초록에 푹 파묻혔죠. 삼시 세 끼 꼬박 챙겨 먹어도 소화 잘 되고요. 혈색도 좋아지네요. 자연의 힘, 좀 막연하잖아요. 그냥 기분이 좋아서일 수도 있잖아요. 며칠 지내보니, 그 힘이 너무 분명해서 창문을 열 때마다 두근거리더군요. 감싸는 기운이 나를 살리는 기운이네요. 보살펴지고 있어요. 꼬나보는 고양이들이 너무 좋아요. 뭐, 어쩌라고? 너나, 나나 꼬나만 보죠. 이런 무익한 순간이 좋네요.
마당에서 아침을 먹어요. 메뉴는 늘 비슷해요. 죽을 먹거나, 돼지고기 꼬치에 찰밥을 먹죠. 모든 음식을 천천히 먹게 돼요. 인간은 나약하니까 여행이 황홀하죠. 바뀐 시공간이 금세 자신을 지배해 버리거든요. 덥고, 느린 곳에서는 저도 나른해져야죠. 나른해져서는 고기 한 입, 찰 밥 한 덩이. 오물오물 씹다가, 삼킬 때가 되어서는 숨을 몰아 쉬어요. 삼키는 것조차 큰 일이거든요. 좋다거나, 싫다거나 하는 감정도 느리게 따라와요. 대부분의 시간은 멍해져서 오물거리죠. 그러다가 문득, 좋다아 합니다. 느리게 와도, 오긴 와요. 좋으니까요.
태국 형님이 여기저기 맛집으로 저를 데리고 가요. 저는 맛있게 먹으면 돼요. 태국 맛은 신맛이죠. 쏨땀도, 똠양꿍도 다 시죠. 이곳은 꽃도 쏨땀에 예쁘게 올리네요. 더위에 늘어져 있다가도, 이런 신맛 때문에 반짝 생기가 돌아요. 촌동네 구석구석 정갈한 집들이 참 많네요. 늘 우거지고, 시장이 넘치고, 색색 과일이 지천인 태국이 진짜 부자나라죠. 한 번도 배고픔이 없었던, 특이한 나라. 촌동네 식당이지만, 왕실 음식처럼 기품이 넘쳐요.
밥 먹으러 가다가 우연히 지나쳤던 곳인데요. 문을 열었나 좀 수상하더라고요. 식당에 물어봤죠. 문을 열었다네요. 저보다 태국 형님이 더 열심입니다. 조금이라도 특이하고, 예쁘면 다 가봐야 해요. 네, 저는 이리 대접받으며 지내고 있죠. 식당 겸 카페 이름은 Ban hom klein din. 땅 냄새가 나는 집. 멋대가리 없이 번역하면 그렇고요. 의역하면 대지의 향기 정도 되겠습니다.
경이적 모멘트. 중고등학교 때 국어 시간에 배웠던 용어인데요. 국어 수업인데, '모멘트'가 뭡니까? 그래서 더 잘 외워졌어요. 알퐁스 도데의 '별'에도 경이적 모멘트가 있었어요. 그 부분이 어디였더라? 목동과 소녀가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이랬던 장면이었나요? 이렇게 나무다리 팍팍 밝아가며 카페 안으로 들어갑니다. 경이적 모멘트죠. 태국의 식당, 카페 좀 다녀보면 다 그게 그거죠. 통유리에 치렁치렁 나무와 이파리들. 네, 믿는 구석이 있으니 뻔해도 돼요. 뻔한 나무들이, 이파리들이 그렇게 주변을 꽉 채우는데 어떻게 감동을 안 하냐고요. 자연은 가장 든든한 빽이죠.
농장에서 일하는 새 식구 다오예요. 다오는 별이란 뜻이죠. 스타. 새 스타 다오입니다. 고향에서 가족들과 등지고 집 없이 떠돌아다녔어요. 월급도 남 주는 만큼 주면서, 먹여주고, 재워주죠. 오늘은 스마트폰을 선물로 줬어요. 그동안은 통화만 가능한 2g 폰을 썼거든요. 무선 인터넷으로 매일 음악을 듣고, 동영상을 볼 수 있게 됐어요. 그런 세상이 있지만, 그런 세상이 남 이야기인 사람도 많죠. 신세계가 펼쳐지는 순간이네요. 저는 아직도 신기해요. 스마트폰만 있으면 세상과 연결되고, 온갖 재미난 영상과 정보를 한 번에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이요. 그게 어떻게 당연하냐고요. 두 개의 요구르트 병에 구멍 뚫어서 실로 매달고, 그 줄이 튕겨지면서 소리로 전해질 때 충격이 여전한데 말이죠. 다오 씨. 어마어마한 재미를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참 따뜻한 사람들이 운영하는 농장입니다. 저도 이 농장의 식구니까요. 드림팀이로군요. 드림팀.
그만, 그만요. 번번이 좋은 음식을 먹으면 저도 지쳐요. 점심 거하게 먹었으니까, 저녁은 쌀국수면 충분하죠. 그런데도 또 여기는 꼭 가봐야 한다면서요. 맛집으로 데리고 갑니다. 뿌 팟퐁 커리 양념에 게 대신 새우, 해산물이 들어간 카레로군요. 맛이 없을 수가 있겠어요? 매일 제가 지루해하진 않을까? 맛없는 걸 먹지는 않을까? 잠자리가 불편하진 않을까? 온 가족이 신경을 써요. 그래서 저는 한 끼도 대충 먹어본 적이 없어요. 쌀국수 집도 엄선한 집들만 갔죠. 매번 맛있고, 놀라웠죠.
쌈마이틱한 붉은 조명도, 따뜻해요. 우호적인 온기를 느끼면, 그때부터 그곳은 남이 아니죠. 소금사막이나, 이과수 폭포는 엄청나지만, 남이에요. 현지인들과 복작복작 어울릴 시간이 없죠. 내가 맛있다고만 하면 너무너무 좋아하는 사람들이 수코타이에 살아요. 여행이 아니라, 살러 가야죠. 저는 관종이라서, 관심받는 게 좋아요. 식탐이 많아서 맛있는 게 좋죠. 가난하고, 무능해서 관대한 곳이 좋아요. 지긋지긋한 더위도 그럭저럭 참을만해요. 태국 사람이 되려나 봐요.
방콕으로 돌아가는 길에 또 뻔한 카페를 발견해요. 카페 이름은 mundee. 재밌다는 뜻이에요. 핏사눌록(Phitsanulok) 주에 있어요. 대로변에서 바로 보이죠.
보세요. 이렇게 뻔하다니까요. 뻔히 보이는데도, 번번이 놀랍군요.
이렇게 아기자기하고, 열대 열대 하고, 나른 나른한 시골이 태국 말고 또 있을까 싶어요. 철딱서니 없는 막내 같으면서도, 유치하지 않죠. 찌든 느낌도 없죠. 권태로운데, 달아나고 싶지 않아요. 권태와 눌러살고 싶어요. 다시 방콕이네요. 글감옥에 갇혀서 글을 써야겠어요. 돈 벌어야죠. 머무는 것도 다 돈이니까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글로 세상 끝까지 닿고 싶어서요. 저만의 오체투지입니다. 저를 도와주고 싶으신가요? 가까운 도서관에, 학교에 박민우의 책을 신청해 주세요. 저의 오체투지 길이 외롭지 않게요. 2019년은 <입 짧은 여행작가의 방콕 한 끼>를 세상에 알리고 있어요. 방콕이 인생 여행지가 될 수 있도록 이 책이 무척이나 애를 씁니다. 한 번 펼쳐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