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의 여행, 아름답기만 할까요?
(평생 기억에 남을 밤, 2019년 12월 31일)
(2019년 12월 31일 빠이 거리)
-그런데, 치앙마이가 뭐가 좋다는 거냐?
미니 버스를 타고 세 시간. 빠이(Pai) 터미널에 도착한 우리는 점심부터 먹기로 한다. 시장하지 않다는 어머니와 아버지는 새우죽 하나를 나눠 드신다. 나는 바질이 들어간 닭고기 볶음밥을 시킨다. 태국 바질은 언제나 향긋하다. 치앙마이가 어디가 좋다는 거냐? 다시 물으신다. 왜 빠이에서 치앙마이를? 치앙마이에서 5일을 머물고, 빠이에 도착한 아버지는 치앙마이가 영 성에 안 차신 모양이었다.
-대단한 볼거리가 있어서라기보다는, 날씨도 좋고요. 물가도 저렴하고, 사람도 좋고.
아버지는 같은 질문을 사흘 전에도 하셨다.
-그리고, 아버지. 죄송한데요. 국물 드시고, 꺼어어. 이러시면 여기 사람들이 안 좋아해요.
참기로 했던, 못 본 척하기로 했던 내 약속을 깬다. 아버지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신다. 욱 올라오는 뭔가를 꾹꾹 아래로 누르신다. 아차, 후회한다. 아니, 후회하지 않는다. 나도 살아야지. 참는 게 능사는 아니다. 자잘한 복수는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된다. 새로운 숙소는 좋아야 한다. 시내에서 2.9km 떨어진 곳에 스코틀랜드 여자 카렌이 작은 집을 예쁘게 꾸며놨다. 방이 환하고, 근사하면 화해는 필요 없다.
식당 옆 여행사에서 친절히 택시를 불러 준다. 기사는 100밧만 달란다. 카렌은 120밧에서 150밧 정도가 나올 거라 했다. 카렌의 이십 년 지기 호세가 카렌 대신 우릴 맞는다. 카렌은 지금 피피섬에서 가족과 휴가 중이다. 갈리시아 출신 호세는 스페인 억양이 전혀 없는 영어를 한다.
-태어나긴 영국에서 태어났으니까. 지금 네가 보고 있는 풍경이 내가 빠이에서 가장 좋아하는 풍경이야. 나도 가끔 이 방에서 묵어. 시내에 내 방이 따로 있지만.
넓은 방이다. 깨끗하고, 최선을 다한 방이다. 열 병의 무료 생수도, 노트에 남겨 놓은 자잘한 동네 정보도 따뜻하다. 오성급 호텔에도 없는 풍경이 펼쳐진다. 방을 고를 땐 도박하는 심정으로 결제를 하다. 카지노에서 잭팟이 터진 것처럼, 우린 모두 부둥켜안고 비명을 질러야 한다. 해냈다.
한 시간을 걸어 재래시장을 찾아내서는 싱싱한 배추와 삼겹살을 샀다. 마침 가져온 다시다를 마구 뿌린 겉절이와 제육볶음이 완성됐다. 조미료가 들어가야 안 느끼하다는 아버지 입맛을 적극 반영했다. 어머니와 나는 합심해서 뚝딱, 어엿한 저녁상을 차렸다.
-이런 더러운 숙소가 좋은 방이라고? 여행 좀 했다는 놈이 이걸 방이라고 골라?"
잠깐 눈을 붙이신 아버지는 팔뚝을 긁으며 다른 사람으로 변신했다.
-왜, 그러세요?
-모기가 물었잖아. 이딴 방을 방이라고.
-다른 방을 찾아볼까요?
-또 돈 쓰게? 그럼 진짜 안 참는다. 백 프로 환불을 받아오면 모를까.
-아버진 여행이 안 맞는 분이었네요. 며칠만 참으세요. 다시는 여행 이야기 안 꺼낼게요.
-백 프로 환불 감이야. 자식 놈이니까 참는 거야.
-내일이라도 한국으로 가세요.
-방이 싫다는 거지, 이 놈아.
-자식 놈이니까 참는다고요? 와, 아버지 대단하십니다. 저는 일단 나갈게요.
불빛 하나 없는 숲길을 걷는다. 성큼성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활활 타는 마음만 까매지고 있다. 2019년 12월 31일. 내 모든 혈관이 급격히 좁아지는 밤. 위산은 빠른 속도로 역류하고, 내장은 누군가의 손가락이 쑥 들어와 쥐어짜는 기분이다. 선을 넘었다. 선을 넘었다. 아니야, 아니야. 아버지는 아이야. 아이는 너무도 특출나게 나를 찌른다. 나는 이런 아이를 감당할 수 없다.
-엄마도 좀 조용히 해. 왜 나만 나쁜 놈이어야 해요? 참기는 뭘 참아요?
참으라는 어머니에겐 이렇게 맞받아쳤다. 두려웠던 순간은, 이토록 일찍 찾아왔다. 선의지로 똘똘 뭉쳤던 아들은 숲 속에 부모를 내팽개치고, 홀로 카페에서 자판을 두들기고 있다.
2019년 12월 31일.
유일한 기대는 2020년이다. 1월 1일. 처음을 의미하는 1. 1이라는 숫자가 나를 지켜줄 것이다. 지켜줄 수 있을까? 잘 끝내고 싶다. 행복해지고 싶다. 잘 끝내는 게 뭘까? 방으로 돌아가기 싫다. 가족의 품이 두렵다. 2019년 마지막 밤이 무의미하게 진해진다. 내일이 오지 말기를. 어색한 침묵이 사라지고, 아들아, 아버지. 잘 못했다. 잘 못했습니다. 그 순간이 싫다. 끊은 담배가 간절하다.
PS 매일 글을 씁니다. 글로 세상에 작은 재미이고 싶습니다. 작은 기다림이고 싶습니다. 제가 이렇게나 야심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