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내 작가를 만났어요, 무지 비싼 식당에서요

악당은 아니지만 지구 정복, 안시내 작가님 잘 먹었습니다.

by 박민우
안시내 작가님, 잘 먹었습니다.

- 작가님, 이번 주에 시간 언제 되시나요?


아이고, 드디어 올게 왔군요. 안시내 여행작가에게서 메시지가 왔어요. 저랑 딱 스무 살 차이입니다. 독자님들 속없는 소리 좀 하지 마세요. 좋기는요? 매일 제 글 제대로들 안 읽으시죠? 통장에 이십만 원 조금 넘게 남은 거는 어떻게든 지켜야 해요. 그래도 곧 교보생명과 연금에서 피라니아처럼 뜯어갈 거라고요. 수중에 있는 이천 밧도 쓰면 안 돼요. 이번 달은 어떻게든 버텨볼 거예요. 도와주고 싶으시다고요? 하도 거지처럼 죽는소리만 해서요? 천만 원부터 받겠습니다. 그 밑으로는 제게 도움 못 주십니다. 안 작가에게서 연락은 진즉에 왔었죠. 방콕에서 한 달 살기를 할 거라고요. 며칠 전부터 방콕 사진이 마구 올라오더라고요. 왜 연락이 없냐? 방콕에 온 걸 환영한다. 이런 메시지 절대 못 보내죠. 삼촌 뻘 늙다리가 먼저 연락하면, 불쾌하잖아요. 느끼하잖아요. 전, 누구에게도 흠 잡히고 싶지 않아요. 인스타그램 팔로워 삼만 명이 넘는 유명 작가에게는 특히요. 그래서 조심스럽게 쌩깠죠. 그런데 연락이 오고 만 거예요.


-작가님 가고 싶은 곳 있으세요?


사주겠다는 메시지죠? 그렇죠? 그 뒤에 제가 쏠게요. 이런 문장이 하나 더 붙었으면 딱 좋은데 말이죠. 이번에 얻어먹으면, 나를 먹인 최연소자 되겠군요. 나름 영광이겠어요.


-쌀국수를 먹을까요? 호텔 뷔페요? 예쁜 플라워 카페는 어떠세요?


저도, 조심스럽게 답을 보내요. 굉장히 비싼 곳을 택하면, 아, 본인이 쏘겠다는 거구나. 나이고, 뭐고 그냥 확 얻어먹어야지.


-여기, 어때요? El mercado.


Mercado. 스페인어로 시장이란 뜻이네요. 스페인 식당이겠네요. 비싼 곳이 확실해요. 얻어먹어도 되겠어요. 되겠죠? 자꾸 나이, 나이 좀 하지 마세요. 저도 스물일곱 살인 적 있었고요. 그때 마흔일곱 어르신 사줄 기회가 없었을 뿐이죠. 오늘 얻어먹고, 예순일곱 살 사주면 되잖아요. 당장 말고, 언젠가요.


사진으로만 보던 작고, 귀여운 아가씨가 먼저 와서 기다려요. 신기하죠? 오기 전까지는, 긴장을 했어요. 글을 쓰는 사람끼리 묘한 긴장감이 있으니까요. 남자, 여자. 늙다리, 젊은 아가씨. 까칠한 걸 자랑으로 삼는, 예민 덩어리 글쟁이 둘. 그런데 너무 예쁘고, 귀여우니까 그냥 예쁘다, 그냥 귀엽다. 그렇게 되네요. 이거 노화인가요? 슬픈 갱년기 증세가 보통 이래요?


-작가님, 진짜 통장 잔고요. 사실이에요?


꺄아. 저는 기다렸다는 듯이 씨티은행 애플리케이션을 열어요. 235,000원 남은 걸 보여줘요. 신한 은행에 3만 원 정도 더 있지만, 그것까지는 안 보여줘요. 극적으로 보여야죠. 더 거지처럼 보여야죠. El mercado 이 식당, 정말 굉장하네요. 역시, 작가는 작가예요. 그냥 제가 추천한 곳에서 먹어도 될 텐데요. 젊은 작가의 촉을 믿었어요. 저도 새로운 곳에서, 소풍 느낌으로 설레고 싶었죠. 플래터라고 하나요? 치즈와 하몽이 가득 올라온 플래터를요, 직접 팬에다가 구워 먹어요. 퐁듀 느낌도 살짝 나요. 지글지글 하몽을 굽고, 치즈가 녹고. 스페인에서도 못 먹어 봤는데, 여기서 먹어 보네요. 강력 추천합니다. 와인까지 곁들이고요. 점심 세트 메뉴까지 먹었어요. 얼추 7만 원 정도 나왔을 거예요. 저는 통장까지 깠으니까요. 이젠 닥치고 먹고, 닥치고 이야기만 하면 돼요. 하우스 와인도 확실히 좋네요. 제가 혀와, 식도는 청담동 상류층과 유전자 배열이 비슷해서요. 좋은 와인, 부드럽게 넘어가는 와인은 귀신같이 알죠.


-아, 재밌긴 한데, 정말 지질하다. 작가님 책을 그렇게 읽었죠. 여행을 떠나기 전에 읽었 거든요. 막상 여행을 시작하니까요. 작기님 글이 너무 와 닿는 거예요. 저도 거지처럼 다녔거든요 좋은 책 써주셔서 감사해요.


안 작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면요. 그 잘 나가는 '여행에 미치다' 대빵이, '청춘 유리' 유리 작가가, 앞길이 창창한 독립영화감독이 다 제 열혈 팬이로군요. 박민우 책을 읽고 무럭무럭 자라서는, 돈도 잘 벌고, 인기도 벌고, 여행의 즐거움도 제대로 전하네요. 샘나냐고요? 샘나죠. 하지만 이런 사람이 열 명, 백 명이 돼 보세요. 관심종자는 존경만 받아도 배불러요. 배가 불러 죽겠는데, 어떻게 까칠해지겠어요. 어떻게 샘을 내겠어요?


-다들 제가 금수저인 줄 알아요. 사진 속 제 모습이 화려하니까요. 지금도 회기동 보증금 백, 월세 십만 원 옥탑방에서 살아요. 한참 책이 잘 나갈 때, 그 돈은 어머니가 또 다 가져갔어요. 종교에 빠져서요. 지금은 어머니 안 본 지 육 개월이 넘네요.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가 없었어요. 어머니를 버리고, 저를 버리고 사라지셨어요. 몇 년 전까지는 돈이 너무 없어서요. 하루하루 피가 말랐죠. 그래서 지금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요. 방콕에서는요. 한 달에 백만 원 넘는 곳에서 지내요. 내일 죽을지 모른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요. 다음 달까지 살 수 있을까?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그런 마음으로 살아요. 작가님, 커피 드실래요? 차?


커피는 제가 살게요. 그 말이 안 나오더라고요. 천 밧이 주머니에 있기는 했는데요. 박민우, 저 놈 참 쪼잔하다고요? 염치도 없다고요? 신한 카드도 들고 왔어요. 여차하면 긁으려고요. 한 달에 백만 원 넘는 곳에서 지낸다잖아요. 저보다 돈도 더 잘 번다잖아요. 나이만 생각하고, 무조건 내야 한다. 그게 꼰대죠. 상 꼰대죠. 안 작가가 저렇게 기뻐하는데, 저는 잘 먹고, 잘 떠들면 돼요. 오늘 돈 한 푼도 안 쓴 게 잘한 거라고요. 저만 믿으세요. 제가 맞다고요. 제가 맞아야 해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지구 끝까지 닿기 위해서요. 저의 작은 오체투지입니다. 그러니까요. 가까운 도서관, 학교, 군부대에 박민우의 책을 신청해 주세요. 2019년은 '입 짧은 여행작가의 방콕 한 끼'를 열심히 알리고 있어요. 방콕 가실 거면, 무조건 데리고 가세요. 이 좋은 책으로, 그 좋은 방콕을 더 열심히 즐기셔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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