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이면 한국 거지인, 나를 골랐니?
"돈 좀 부쳐줄 수 있어? 지금 당장, 제발!"
페이스북으로 이런 메시지가 왔어요. 참, 기억도 가물가물하네요. 인도 자이푸르에서였어요. 바람의 궁전 하와 마할에서 한 번 본 게 전부죠. 떼로 와서 사진 찍고 하던 인도 친구들이었어요. 인도에서는 한국인이 신기해서인지, 같이 사진 찍자고 자주 그러죠. 페이스북도 알려달라고 졸라서 알려줬죠. 일 년에 한 번 메시지를 주고받는 정도죠. 어제는 갑자기 돈을 부쳐달래요. 이 친구도 참 운이 없네요. 하고 많은 한국인 중에 통장 잔고 이십만 원짜리가 친구라뇨. 돈이 없다고 했죠. 오죽하면 저에게까지 부탁을 했겠어요. 짠하긴 하더라고요. 친구들도 다들 어렵다며 거절했겠죠. 제게 사기를 치는 걸 수도 있고요. 그냥 사기 치는 거였으면 좋겠어요. 무탈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저는 돈이 없어서 얼마나 다행인가요? 돈이 많았다면 죄책감에 시달렸겠죠? 5만 원이라도 부쳐줬을까요? 안 그랬을 거예요. 진의를 의심하며, 너와 나의 관계를 생각하며, 합리적으로 쌩깠을 거예요.
아쉬운 소리를 하는 삶이 가장 두려운 삶이죠. 부탁은 제겐 마치 자살처럼 느껴져요. 혹시 돈 좀 있냐? 이 말을 하는 순간은 벼랑에서 무릎을 구부리고, 훌쩍 공중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죠. 이어질 답이 제게 도달하기 전에 죽고 싶을 것 같아요. 요즘 힘들다, 미안하다, 어떻게든 빌려주고 싶은데. 이런 답이 기다릴 테니까요. 우린 모두 힘들 거든요. 엄연한 사실이잖아요. 힘들어서 힘들다는 거니까, 정말 아픈 거절이죠. 진실하고, 좋은 친구들을 잔인한 시험대에 올린 제가 용서가 안될 것 같아요. 서로가 너덜너덜해지는 상황으로 몰고 간 거니까요. 그런 사람이 안 되도록, 바짝 긴장하고 삽니다. 안 믿기시겠지만요. ㅎㅎ
-야, 방콕 언제 왔어? 내가 내일 프랑크 푸르트 가거든. 갔다 와서 보자. 꼭 보자.
하, 이놈은 또 뭔가요? 레이건이라는 영국 친구인데요. 역시 반나절 인연이죠. 우린 둘 다 캄보디아 국경선에서 쫓겨났어요. 태국에 장기 체류하는 외국 놈이고, 육로로 비자런을 하려 했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저는 현금 500달러가 없다는 이유로, 레이건은 얼마 전에도 육로로 비자런을 하려 했다는 이유로 재입국이 거절됐죠. 하아. 진짜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어요. 영구 추방인 건가? 내 방에 있는 짐들은 어쩌지? 입이 바짝바짝 말랐죠. 비행기로는 재입국이 가능하다더군요. 우리는 캄보디아 여행사를 뒤져서 그날 가는 비행기표를 끊어요. 당일날 뜨는 비싸디 비싼 항공권을요. 여행 비자로 머물면서 비자 연장을 하고 싶다면, 육로로는 시도하지 마세요. 저처럼 쫓겨날 수 있으니까요.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같이 있을 수도 있었죠. 싫더라고요. 그냥 다 짜증 나더라고요. 앙코르왓이 있는 씨엠립에 와서는, 쫓겨났다는 공포감에 머리가 하얘졌으니까요. 식당 가서 혼자 먹고, 혼자 커피 마셨어요. 한 치 앞을 모르는 제 처지를 비관하면서요. 비행기 시간에 맞춰서 공항에서 다시 만났죠. 그때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죠. 인삼과 동충하초가 들어간 순수 생약 성분의 발기제를 개발했다더군요. 태국에서 열심히 팔고 있대요. 천연 비아그라를 파는 거죠. 영국에서는 헬스 트레이너도 하고, 은행에서도 일했대요. 뭔가 있어 보이기도 하고, 없어 보이기도 하는 묘한 놈이었어요. 방콕에 무사히 재입국을 했죠. 이후에 자주 연락이 왔어요. 한 번 보자. 맥주나 한 잔 하자. 그럴 때마다 거절했죠. 너무 젊은 거예요. 나이가 젊다는 게 아니라, 유흥의 방식이요.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부어라 마셔라 하는 스타일이더군요. 태국 여자 친구도 있는데, 딱히 얽매이는 것 같진 않더라고요. 제 페이스북을 열심히 보고 있었던 거죠. 댓글이나 좋아요는 안 눌러도요. 방콕에 온 걸 알고, 귀신같이 연락이 왔네요. 제가 정말 엄청 반가운가 봐요. 신기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요. 반나절 본 게 다인데, 몇 번 까이기까지 했는데도, 줄기차게 연락을 하다니요. 그런다고 내가 비아그라 사 줄 것 같으냐, 이 놈아. 하하하!
새로운 인연이 참 안 늘어요. 이런저런 이유로 쳐내고, 숨죠. 요즘 SNS를 열심히 하면서요. 뭔가 걷잡을 수 없는 큰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에요. 인연의 실이 갈라지고, 합쳐지면서 거미줄이 됐어요. 거미줄이 엄청 커지고 있네요. 두렵지만, 젊어진 느낌도 들어요. 새로운 인연을 궁금해하면서, 주말을 기다렸던 이십 대가 떠올라요. 살랑살랑, 간지럽고, 달달했는데 말이죠. 제가 어떤 놈인지 궁금하시죠? 인연은 분명한 방향성이 있어요. 그래서 만날 사람은 만나죠. 어떤 때는 너무 쉽게요. 너무 당연하게요. 그때를 한 번 기다려 보자고요. 반갑게 수다를 떠는 그 날을요.
PS 매일 글을 써요. 글로 하는 작은 오체투지입니다. 저를 만나고 싶으신가요? 일단 글로 먼저 만날까요? 저에겐 좋은 책들이 많아요. 박민우 작가로 검색해 보세요. 글로 친해지고, 그 힘으로 얼굴도 보고 하자고요. 아, 2019년은 '입 짧은 여행작가의 방콕 한 끼'를 알리고 있어요. 먹는 이야기지만, 먹는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다들 어찌나 좋게 읽었다고 칭찬을 하시던지요.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