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력이 갑자기 떨어져서 더 심란하다고 했지? 사십 대 중반에 눈 한 번 침침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안경을 썼는데도, 예전에 안경을 벗었을 때 수준으로 뿌예지는 거야. 이러다가 시력을 잃는 건 아닐까? 돈은 없고, 시간은 많은 글쟁이라서 유튜브를 뒤져 봐. 시력이 확 좋아지는 비법은 안 찾아지더라. 고만고만한 동영상들을 봐. 그중엔 촛불 심지를 눈물 날 때까지 보라는, 탈북 의사의 제안이 솔깃하더라. 북한에서 암살단 시력 특훈을 촛불로 한대. 위험하지 않나요? 댓글로 그거부터 묻는데, 나는 해볼 생각부터 해. 얼마나 마음의 여유가 없고, 귀가 얇은 사람인 줄 알겠지?
-안경을 아예 벗고 지냈더니, 5년 만에 정상 시력을 찾았어요.
그런 댓글을 본 거야. 목뒤가 서늘해지더라. 깨달음이 올 때 느껴지는 특유의 차가움. 그 생각을 왜 못했지? 안경부터 벗자. 안경 벗는 생각을 몇 번 해보긴 했지. 군대에 있을 때 안경이 박살 난 적이 있어. TV로 농구 경기를 봐야 하는데 뭐가 보여야 말이지. 렌즈를 누군가가 가져다주는 거야. 야, 드디어 나도 소프트 렌즈란 걸 끼어보는구나. 눈 몇 번 깜빡이면 쑥 들어가는 건 줄 알았지. 자꾸 감지 말라고 하는데, 눈이 어떻게 안 감겨? 무서우니까 눈꺼풀에 힘이 더 들어가는 거야. 내 양 다리, 양 팔, 목을 후임병들이 하나씩 잡고, 동기가 눈꺼풀을 찢어질 듯 밀어 올려서 욱여넣었어. 처음이자 마지막 '렌즈 체험'이었지. 눈이 작아도 너무 작은 사람은, 렌즈도 어처구니 없이 힘들게 넣어야 해.
-아들아, 너는 안경 벗으면 절대 안 된다.
아들 하면 껌뻑 죽는 어머니가, 용기 내서 내게 하신 말씀이 충격이었지. TV에서 탤런트를 봐도, 우릴 아들이 더 잘생겼다 생각하시는 왜곡된 모성애의 상징, 우리 어머니가 말이야. 새겨 들어야 했지. 시력과 상관없이, 멋으로 문신을 하듯, 성형을 하듯, 나는 안경을 꼭 끼고 살아야 해. 눈이 신동엽보다도 훨씬 몰려 있어서, 안경으로 가려줘야 해. 안경도 안 긁은 복권이잖아. 안경 벗으면 갑자기 초미녀, 초미남 되는 만화, 드라마, 영화가 좀 많니? 나는 해당 사항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아. 이목구비가 어느 정도는 뚜렷해야, 복권 자격이 있는 거지. 그런데 이제는 벗어 보려고 해. 멋이고 나발이고. 내 안구의 원시적 생명력을 믿어봐야 할 때야. 시력 측정판 가장 큰 숫자도 안 보이는 이 눈으로, 안경 없는 하루가 가능할까?
노트북 앞에서 안경을 벗었는데, 헛웃음만 나더라. 하나도 안 보이는 걸 둘째 치고, 전혀 다른 배열과 번짐으로 한글이 아름다운 암호가 되는 거야. 흥미로운 형체더라. 이게 내가 번 돈인 거지. 돈이라고 할게. 평생 조금씩 저축해서 집을 사고, 빌딩을 올리는 억척 할머니 뉴스를 본 적이 있니? 매일 페트병 모으고, 폐지 모아서 어마어마한 재산가가 되신 거지. 내 눈도 그런 유의 기적이지. 매일 컴퓨터, 스마트폰을 야금야금 즐겼더니, 시력이 아예 없는 지경에 이르러 버린 거야. 글을 쓸 때는 얼굴을 모니터에 밀착시키고, 더듬더듬 한 글자씩 쳐야 해. 안경 없이 살기. 하루만 해보자. 이왕 하기로 한 거.
밤의 세상이 더 무섭더라. 어두운 곳은 구분되는 게 거의 없어. 버스에서 창밖을 봐. 다른 차들의 헤드라이트가 동그랗게 번져서 불꽃같고, 별 같아. 헤드라이트들이 공처럼 부풀어 올라. 다들 동글동글해져. 불꽃놀이던데? 알록달록 예쁘고, 허망한 불꽃들이 눈앞에서 끝없이 터지는 거야. 또 웃음이 나더라. 웃을 때가 아니지. 이 지경이 되었구나. 한숨이라도 쉬어야지. 그런데 진짜 빛들이 너무 예쁜 거야. 내가 눈을 혹사해서 번 돈이야. 불꽃으로만 환전이 가능한 돈을 벌었어. 반성을 해야겠지만, 나라 막 허비한 건 아니잖아. 그렇게 눈 버려가면서, 쓰고, 또 썼잖아. 세상과 두런두런 담소를 나눴잖아. 그러니까 나는 엄청난 돈을 번 거야. 짐작도 못했어. 안경 없는 막막한 세상에, 멍청하게 감동씩이나 할 줄은. 제륭아. 공짜는 없어. 이제 우리 몸은 다 돈이야. 게임을 하건, 컴퓨터를 하건 비싼 돈 내고 해야 하는 나이야. 그러니까, 돈 없으면 눈 감고, 눈 아끼고, 풀이나, 꽃을 보게 해 줘야지. 그러라고, 늙는 거야. 이런 눈이 가능하다니. 어릴 때 눈이 지독하게 나쁜 아이들이 시력검사판 가장 큰 글자를 더듬더듬할 때, 장난치는 거라 생각했거든. 웃기려고 오버한다고 생각했어. 그런 눈을 내가 가졌어. 참 막막한데, 생각보다 절망적이진 않아. 걱정보다는 덜 아프고, 걱정보다는 내가 조금은 더 강하고, 그렇더라. 이제 나도 이 눈으로 애를 좀 써볼까 해. 모든 게 번져버린 세상이라, 눈 굴릴 일이 적어졌어. 집중력이 높아지네. 덤으로 건진 효과야. 모든 예측은 무의미해. 눈앞의 문제를 하나씩 하나씩 해결하자. 해결이 안 되면 조금이라도 순해질 수 있도록 작고, 작게 노력하며 살자.
PS 매일 글을 씁니다. 세상에 1cm씩 가까워진다고 믿으면서요. 가까운 도서관, 학교, 군부대에 박민우의 책들을 신청해 주세요. 글쟁이는 읽혀야 사니까요. 2019년은 '입 짧은 여행작가의 방콕 한 끼'를 알리고 있어요. 9년간 방콕에서 머물면서 찾았던 단골집, 카페 이야기, 태국 음식 이야기를 담았어요. 여러분의 방콕이 두 배는 즐거워지길 바라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