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고 싶지 않지만, 한다. 이틀간 머리를 안 감은 적 있다. 머리를 감는 날, 찬웅이 머리카락을 샅샅이 모았다. 샤워를 끝내고 내 머리카락 역시 샅샅이 모았다. 누구의 머리카락이 이틀간 더 빠졌나? 나는 폴리젠 샴푸를 쓴다. 찬웅이는 LG 생활건강 Dr groot 샴푸를 쓴다. 신체나이 나 46세, 찬웅이 30세. 유전적 요인은 모른다. 내 머리카락이 좀 더 빠졌지만, 더 두껍기도 하다. 개수는 더 적을 수도 있다. 설마 직장에서 샤워하고 오는 거 아니겠지? 내 소중한 실험대상이 훼손되길 원치 않는다. 폴리젠 샴푸 괜찮네. 머리카락이 확실히 덜 빠진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왜 이렇게 머리카락이 멀쩡하냐고 샘낸 적도 있다. Dr groot도 찬웅이의 탈모 상황도 양호한 편인 듯.
맨해튼 비바람이 창을 톡톡 치는데, 몸도 쑤신다. 신라면을 끓여 먹고 싶은 아침이다. Essen에서 고개를 처박고 반찬을 훔쳐 먹은 나는 찬웅이의 시리얼을 노려봤다. 주방에 놔둔 거면, 먹으라는 거지. 냉장고엔 사둔 아몬드 밀크가 있다. 아몬드 시리얼을 아몬드 우유에 말아먹으면, 얼마나 맛있을까? 이 시리얼을 건드리면 진다. 이미 도둑, 나는 쓰레기. 포기한 도둑은 자유롭다. 황홀한 바삭함은, 훔쳐 먹는 시리얼에서나 가능하다. 한 줌 입으로 쑤셔 넣는다. 한 번으로 끝내게? 바삭바삭 아잉. 요망한 것. 한 줌 더 털어서 넣는다. 안 들킬 거야. 안 들키겠지. 찌그러진 시리얼 봉지를 판판하게 손바닥 다림질을 한다. 감쪽같네.
“테이블에 있는 시리얼을 조금 먹었어요. 이거 시리얼 값이에요.”
눈에 띄게 홀쭉해진 은박 봉지가 어찌나 신경이 쓰이던지. 시리얼 좀 먹었다고, ‘행복한 멈춤 Stay'를 내민다. 이 책을 줌으로 승부는 모르게 됐다. 죄를 지었지만, 자백했고, 내 방식으로 변상도 했다. 발랄한 박민우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라, 책의 완성도에 비해, 폭발적인 반응이 없었던 걸작 행복한 멈춤 Stay. 마침 한 권이 내 짐에 있다. 요리를 배우러 울산에서 뉴욕까지 날아온 찬웅이는 이 책이 얼마나 감동적일까? 머무는 여행자의 이야기라니, 캬! 저자가 직접 주는 책이다. 싸인까지 했다.
다음날 수제 비스킷을 받았다. 찬웅아, 부담스럽게 왜 이래? 이미 내가 이긴 건가?
찬웅이가 주방에서 뭔가를 한다. 내가 편해졌구나. 내게 뭔가를 먹이고 싶은 걸 수도 있지. 수비드로 삶은 돼지고기를 으깬 감자와 반반씩 섞었다. 저온으로 고기를 오래 삶는 방식, 수비드, 나도 안다. ‘냉장고를 부탁해’를 얼마나 열심히 봤는데. 으깬 감자가 치즈처럼 단단해 보인다. 단단해 보이지만, 감자는 부드러울 거야. 부드러운 고기, 부드러운 감자, 찬웅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양의 소금, 후추.
“먹어 봐도 돼요?”
찬웅이가 깜빡한 거 같아서, 굳이 물었다.
“안 돼요.”
너무 단호하다. 앗, 뜨뜨뜨. 불에 덴 듯 아프잖아. 인마!
“간을 안 봤어요. 드시면 안 돼요.”
긴박한 표정이다. 엄연한 작품. 예술가의 작품에 돈 한 푼 안 내고, 혀로 만져 봐도 돼요? 내가 이런 건가? 불완전한 음식을 먹게 하느니, 혀 깨물고 죽겠어요. 그런 마음인가? 그럼 버릴 건가? 수비드 돼지고기 편육은 일주일 내내 냉장고에서 굳어갔다. 찬웅이는 천재 셰프인가 봐. 보통 사람에겐 미친놈으로 보여야 천재. 이 새끼 미친놈이다. 간을 보라고, 그럼. 먹든가. 버리든가.
“떠나기 전에 한 번 대접할게요.”
뉴저지로 간다는 말에 찬웅이 눈빛이 촉촉해졌다. 나는 와인을 준비했다.
“저는 술을 안 해요. 교회를 다녀서요.”
다진 랍스터와 아보카도를 채운 부드러운 샌드위치다. 핫도그 빵을 데워서 그 안에 가득, 부드럽게, 채웠다. 채소도, 소시지도, 고기도 없다. 랍스터와 아보카도에 견과류를 뿌렸다. 약간 싱겁다. 다 계산된 간이겠지. 최고의 재료로 빵을 채웠어. 하지만 싱거워. 앞으로 먹을 음식에 대한 예고편인 거지. 시작은 담백하고, 가볍게. 찬웅이는 시나리오 작가를 해도 되겠어. 기승전결을 아는 요리사라니. 크게 될 놈일세. 이러다가 화려한 메인 메뉴가 나오면 정신을 못 차리겠군.
“빵이 부드러워서, 식감이 좋네요. 랍스터가 들어간 아보카도니까, 맛있는 건 당연한 건데. 이렇게 비싼 재료를 썼다면 씹혔으면 해요. 비싼 재료니까요.”
찬웅이는 더 훌륭한 셰프가 되어야 하니까, 진심을 전한다. 와인을 땄다. 혼자만 홀짝.
“집이 잘 살아요. 잘 사는 것도 재능이라고 생각해요. 아버지를 졸라서 뉴욕에서 공부했어요.”
“클럽에는 한 번도 간 적이 없어요.”
“동생이랑 싸운 적은 없어요. 때린 적도 없고요. 게임도 안 해서요. 보통은 컴퓨터 서로 쓰겠다고 싸우잖아요.”
“중학생 친구가 작가님 오시기 전에, 그 방에서 지냈어요. 그렇게 큰 똥은 처음 봤어요. 세 번이나 똥으로 막혀 있더라고요. 펌프로 뚫었어요. 남한테 싫은 소리 못 해서요. 펌프질 여러 번 하면 내려가요.”
남의 똥을 세 번이나 군소리 없이 내리다니.
“찬웅 씨 이야기 써도 돼요? 여행을 하면서, 글로 남기는 중이거든요.”
“막 욕 하셔도 돼요. 다 쓰세요.”
이게 다예요? 물어볼까? 못 묻겠다. 드셨잖아요? 이 새끼, 이렇게 답하겠지?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뉴욕의 셰프가 박민우를 초대했다. 샌드위치(혹은 핫도그) 하나가 끝이다. 이게 메인이면 두 개를 만들든가. 손님 초대하고 핫도그 하나로 끝내라고 요리학교에서 시키던? 생일 파티에 초대받았는데, 호떡 한 장만 접시에 담아주고 주방을 치우는 친구 엄마를 떠올려 봤다. 굉장히 화가 났다. 먹기 전보다 더 배고픈 핫도그는 또 처음이다. 욕할 건 알았냐? 이 미친놈아? 인연을 끊어 마땅한 놈과
롱아일랜드 선생님 댁을 간다.
롱아일랜드만 간다.
PS 매일 글을 씁니다. 작은 오체투지입니다. 글로 천천히 세상 끝에 닿고 싶어서요. 가까운 도서관, 학교, 군부대에 박민우의 책들을 신청해 주세요. 저의 오체투지가 덜 외롭게 도와주실래요? 2019년은 '입 짧은 여행작가의 방콕 한 끼'를 알리고 있어요. 9년간 방콕에 머물면서 먹은 이야기, 단골집 이야기니까요. 소소한 재미를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