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마음은 한없는 진실이었음을 잊지 말기로 해요.
선생님은 기차역에 나와 계셨다. 저 약간 떨려요. 찬웅이가 무대에 오르는 배우처럼 침을 삼킨다. 선생님의 아침도 오늘은 좀 달랐을 것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반가움이고, 그리움이고, 기다림이다. 돼먹지 못한 나의 감정을 차근히 살핀다. 오늘 하루가 재빨리 지나가는 것. 그게 나의 바람이다. 나이 드신 분이 역까지 차를 몰고 왔다. 내 불편함이, 나는 몹시 불편하다.
이제 갓 서른인 찬웅이는 떨릴 만도 하다. 요리에 인생을 건 남자가, 요리에 인생을 걸었던 남자를 만난다. 외교관이란 직업까지 포기하고, 초밥을 만든 여든의 남자. 롱아일랜드 전설의 초밥왕. 인생의 커다란 전환점이 되겠어. 엄청나고, 엄청난 작가와 기차를 타고 온 건? 나랑 기념사진 하나 안 남겨두는 멍청이. 골프장 주차장에 차를 세우신다. 바다가 깨끗하게 펼쳐져 있다. 선생님 댁에서 걸어서 십분, 최고의 골프장이 있다. 작심하고 떠난 그 어떤 여행보다 더 아름다워져 버렸다. 긴장도 해야 하고, 감탄도 해야 한다. 와, 좋아요. 정말 아름답네요. 찬웅이는 빤한 말만 반복한다. 모든 미국인이 꿈꾸는 동네다. 바다와 녹지가 이곳에 몰려서, 일방적으로 아름답다. 잔디가 촘촘한 선생님 댁으로 간다. 큰 딸이 맡겨 둔 강아지가 꼬리를 세차게 흔들고, 사모님은 생각보다 건강한 얼굴로 활짝 반기신다. 얼마 전 종기 제거 수술을 하셨다. 그깟 종기에 다 늙은 노인네 전신마취까지 하누. 사모님은 전신마취 후유증으로 힘겨워하신다. 찬웅이는 개에 마음을 빼앗겼다. 연어 베이글을 사 왔어요. 나는 연어 베이글을 풀고, 찬웅이는 수제 쿠키를 건넸다. 이런 거에 왜 돈 쓰고 그래요. 이런 거 안 사 와도 밥 줘요. 사모님이 웃으셨다. 나는 연어 안 먹는데. 몰랐군요. 선생님은 한국에 계실 때도 뉴욕 베이글을 그리워하셨다. 최고의 연어 초밥을 만드는 남자다. 연어 베이글은 깊은 고민 끝에 고른 거다. 선생님의 연어 초밥은 구름 위의 바이올린처럼 풍성하고, 팽팽했다. 연어 초밥의 일인자가 연어를 안 드신다고? 내 귓불이 뜨겁다. 아무 연어나 안 드시는 거겠지. 내가 가져온 건 아무 연어가 들어간 베이글이 되었다.
선생님 내외는 찬웅이에게 이것저것 물으셨고, 찬웅이는 성실하게 답했다. 요리를 하는 젊은이다. 찬웅이의 마음가짐이 궁금하고, 찬웅이의 미래가 궁금하다. 찬웅아, 고맙다. 나는 안심하고 구형 노트북을 연다. 매일 일기를 쓴다. 오전에 완성하는 게 이상적이지만, 이상적인 하루는 열흘에 하루다. 선생님은 뭘 쓰는지 물으셨다. 일기를 써서 팔아요. 약간 뜨끔했다. 선생님 부부에 대한 글을 보여드려도 될까? 될 것도 같고, 안 될 것도 같았다. 문학, 음악, 예술에 대한 이해가 남다른 부부다. 글은 글로서 봐주실 분이다. 아니다. 못 보여드린다. 묵묵히 웃고, 먹던 아들 같은 손님이 내내 불편했다고 뒤통수를 친다. 예전의 박 작가로는 안 보일 것이다. 내키지 않았지만 도리라 생각해서 왔다고? 큰 상처가 될 것이다. 전날부터 양념에 쟀다는 돼지고기가 알맞게 구워져서 식탁에 올라왔다. 양념 물이 좀 많아서 버렸더니 고기가 말랐어요. 사모님은 속상해하셨다. 지난번에 먹었던 닭고기보다 확실히 덜 촉촉했다. 잡냄새도 남았다. 바비큐는 지방이 있는 편이 낫다. 살코기는 육즙이 사라지면, 종이처럼 퍼석하다. 맛술과 생강을 좀 더 넣어야 했을까? 찬웅이가 오랜만의 집 밥이라며 허겁지겁 먹는다. 일류 요리사라는 놈이, 중등부 씨름 선수처럼 퍼먹는다. 연어 베이글을 손도 안 대는 선생님 내외나 덜 촉촉한 돼지고기를 품평하는 나나 비슷한 부류다. 언뜻 서글서글하고, 나비처럼 예민하다.
어, 가야 할 시간이네요. 막차가 네 시에 있네요.
우연히 생각난 듯, 좋았어. 자연스러웠어.
-저녁까지 먹고 가야지. 무슨 소리야.
막차는 4시 6분. 아침부터 나는 4시 6분을 기다렸다. 닷새 동안 이 집에 머물고 나는 차가워졌다. 아프고, 약해진 노부부는 나의 서두름에 충격을 받는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나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불길함일까?
-정말 또 올 거예요? 박 작가. 나 죽기 전에?
놀랍게도 사모님은 같은 말을 또 하셨다. 나를 미국에 오게 했던 말. 죽기 전에 올 건가요?
아니요. 못 올 겁니다.
마음의 소리는 서늘했다. 박민우 작가는 막 편하고 그런 건 아니죠. 사모님이 진료를 받으러 가던 날. 우린 같은 차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사모님은 내가 편치 않다고 했다. 나는 사력을 다해서 알랑댔지만, 결국 불편한 존재였다. 닷새 내내 잘 보이려고 몸부림쳤다. 차라리 능글맞게 안겼어야지. 저도 성민이처럼 예뻐해 주세요. 어머니, 아버지. 이마트 정육 코너 담당처럼 달려들었어야지. 그걸 잘했던 아이가 있다. 두 분에게는 양아들 같은 아이. 성민이가 좋아하는 토마토소스, 냉장고에 넣어뒀죠. 소스도 숙성되면 더 맛있어요. 성민이 오면 해줘야죠. 성민이는 아들 같아. 그래서 성민이 방이 우리 방 옆이에요. 그 방은 비워둬야 해요. 박 작가는 지하 방이 편할 거예요. 필요한 건 성민이가 다 부쳐줘요. 성민이는 사람이 됐어요. 결혼하면 아내는 꼭 우리 집에 묵었다 가야 해요. 며느리라고 생각하고 내가 다 가르칠 거예요.
집에서, 학교에서, 큰집에서 눈알을 굴리며 자란 아이가 있다. 사랑받는다는 확신이 늘 고팠다. 그런 아이는 롱아일랜드 링에 올라가기도 전에 완패했다. 사모님은 고추 장아찌를 커다란 유리병에 담으셨다. 그들은 나의 사랑을 원한다. 더 머물기를 원하고, 또 오기를 바란다. 이제 샌프란시스코로 떠난다. 고추 장아찌는 맛있지만, 무겁고, 국물이 흐른다. 샌프란시스코 비행기에 실을 수 없다. 장아찌는 찬웅이의 것이 될 것이다. 연어 베이글과 고추 장아찌는 완벽한 시다. 사랑의 시. 사랑은 늘 최선을 다하지만, 방향은 대개 뒤틀린다. 우린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고, 성큼성큼 멀어져 간다. 우리의 사랑은 그토록 어리석어서, 영문도 모르고 늙어간다.
PS 매일 글을 씁니다. 글로 하는 작은 오체투지입니다. 가까운 도서관, 학교, 군부대에 박민우의 책들을 신청해 주시겠어요? 아이고, 신나라. 신바람 오체투지로군요. 2019년은 '입 짧은 여행작가의 방콕 한 끼'를 알리고 있어요. 9년간 방콕에 머물면서 사랑했던 단골집, 태국 음식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입니다. 소소하고, 즐거운 책이니까요.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