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인연이지만, 작지 않은 하루를 보냈으니까.
(찬웅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요. 일종의 스핀오프라고나 할까요)
찬웅이는 요리사다. 세계 3대 요리학교 중 하나인 뉴욕 CIA를 졸업하고, 뉴욕에서 손꼽히는 식당에서 일한다. 퇴근하면 무릎이 나온 파자마로 재빨리 갈아입고, 방문을 꼭꼭 잠근다. 방 안에 산소통이 있고, 그걸 재빨리 착용해야 숨이 쉬어지는 인큐베이터 곰 새끼 같다. 집주인은 찬웅이 같은 장기 거주자를 원했다. 결국 못 찾고 뜨내기손님을 받았다. 욕실에 회색 목 늘어난 셔츠가 첫날부터 걸려있었다. 당연히 찬웅이 건 줄 알았다. 찬웅이는 그게 내 것이 아니란 걸 안다.
-제 거 아닌데요. 남의 것을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니까요.
방을 나오는 날 물었다. 찬웅씨 거 아니냐고. 그 전 뜨내기가 놔두고 간 것이다. 조심스러운데, 좀 멍청하다. 방을 나오면서 내가 대신 버려줬다. 1년 이상 걸려있을 뻔했다. 조심스러운 사람과 매우 조심스러운 사람이 한 집에 3주간 동거했다. 덜 조심스러운 내가 찬웅이의 신라면 한 봉지를 몰래 끓여먹었다. 안다. 그전에 아몬드 시리얼도 훔쳐 먹었다. 지고 말았다. 이길 수 없는 거물에게 함부로 맞섰다. 조심스러움의 거장 박찬웅에게 내 책 행복한 멈춤 Stay를 바쳤다. 라면 값이다. 시리얼 값이다. 그 책이 아니었다면, 우린 그냥 서늘한 남이었을 것이다. 나는 찬웅이를 롱아일랜드 여행에 초대한다. 초대한 이유는, 나를 위해서다. 혼자 선생님 부부와 대화를 이어가는 게 버겁게 느껴졌다.
-롱아일랜드에서 가장 유명한 초밥집 사장님이셨죠. 같이 가실래요? 배울 것도 많지 않을까요?
-네, 갈래요. 가고 싶어요.
나는 사실 찬웅이에게 기본적인 호감이 있음을, 분하지만 인정한다. 집이 잘 사는 것도 능력이란 말을, 흙수저 누구나 발끈할 법한 말을, 수줍은 얼룩말처럼 조근조근 내게 했다. 잘난 척이나, 거만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돈 자랑이었다. 부모님의 재능이란 이야기로 결국 들렸다. 성실하고, 민폐 안 끼치며 살고픈 사과나무 같은 아이다. 성실해야 매일 조금씩이라도 자라고, 잡초여서는 안 되며, 누가 봐도 어엿한 꽃과 열매를 맺는, 너무 시지 않은 사과나무.
-제가 창가에 앉아도 될까요?
찬웅이가 창가를 원한다. 억지로 끌려온 건 아니구나. 두꺼운 연어 베이글을 반으로 나누고, 뜨거운 아메리카노도 하나씩. 기차가 움직이고 대부분의 자리는 비어있다. 몹시 억울한 아침이었다. 새벽 한 시 반, 세 시. 틈틈이 시계를 봤다. 아이폰 알람이 제대로 울리나? 기계를 어떻게 믿어? 믿을 건 오로지 나의 불안뿐. 나의 인간관계는 만신창이다. 대부분의 지인들과 연락이 끊겼다. 한국에 와서도 경기도 광주 집에만 처박힌다. 나가면 다 돈이다. 오랜만에 만나려면 선물이라도 들고 가야지. 몇 년 동안 너무 추하게 늙었어. 갖가지 이유를 들어 숨었다. 이제 곧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로 떠난다. 선생님 댁을 찾아가 인사를 드리는 건, 일종의 노력이다. 만신창이가 된 인간관계를 하나씩 복구하고 싶다. 찬웅이가 창가로 시선을 돌린다. 풍경은 입이 안 다물어지고, 연어 베이글 샌드위치는 맛있다. 나는 찬웅이가 CIA를 졸업했다는 말을 이 지면을 통해 여러 번 했다. 찬웅이에게는 전직 외교관인 선생님의 신분을 강조했다. 어떻게든 찬웅이를 데려가고 싶었다.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끙끙대는 피곤함을 찬웅이와 나누고 싶었다. 신분은, 학교는, 직업은 굉장한 호소력이다. 찬웅이가 창가로 고개를 돌릴 때마다, 비에 젖은 개가 떠오른다. 비가 꽤 퍼붓던 날 찬웅이의 눅눅해진 아디다스 운동화가 눈에 들어왔다. 푸른색 아디다스 로고가 끝. 아마 싸서 샀을 것이다. 여유가 있으니까 뉴욕에서 공부하지. 실제로 찬웅이는 잘 사는 집 아들이다. 아버지는 울산의 사장님이다. 맨해튼의 작은 방이나, 꾀죄죄한 운동화는 가난과 좀 더 닮았다. CIA에 들어가기 위해 세 시간씩 자며 영어 공부를 했다. 강남에서 기숙사 생활까지 하면서 매달렸다. 잘 살지 않았어도, 찬웅이는 무언가에 매달렸을 것이다. 두 시간 거리지만 롱아일랜드는 처음이다. 뉴욕 대부분의 여행지가 찬웅이에겐 처음일 것이다. 죄수에게 허락된 단 하루의 외박처럼, 찬웅이가 풍경에 집중한다. 길을 잃어버릴까 두려워, 혀를 내밀고 창밖을 응시하는 개를 닮았다. 몇 시에 볼까요? 작가님 편할 때요. 어디서 볼까요? 역 앞은 어때요? 이런 대화가 오갈 때, 답은 즉시즉시였다. 찬웅이는 오늘의 외출을 누구보다 기다렸다. 뉴요커, 맨해튼, 셰프. 화려한 이미지와 실제의 삶은 남극과 북극. 찬웅이는 아기가 됐다. 잠을 설쳤을 것이다.
-이런 곳도 있었네요.
창으로 찬웅이의 입김이 차창을 뚜렷하게 덮는다. 그동안 내내 아팠다고 이제야 말하는 환자 같다. 평생을 따라다니는 아토피로 사춘기 내내 긁고, 피 흘리며 살았다. 가족이 자기 몰래 치킨을 뜯을 때, 차마 눈 마주칠 용기가 안 나서, 방문을 못 열었던 그 날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찬웅이가 두리번거릴 때마다 눈이 간다. 아기의 눈으로 보는 풍경, 아기의 놀라움, 빨아들이는 속도감, 그 속도의 경이로움. 열심히 빨아들이는 찬웅이의 어깨가 불룩해진다. 이 아이가 자신의 이름으로 식당을 차리면, 비행기를 타고서라도 꼭 가보고 싶다. 내게는 꼭꼭 감춘 힘이 궁금하다. 까인 것 같은데, 여전히 한 여자를 기다리는 그 마음이 어떤 요리를 만들게 할까? 지고지순하지만, 답답하지 않은 감동을 기대한다. 찬웅이를 이미 알아본 내가, 자랑이 될 날이 올 것이다.
PS) 매일 글을 써요. 뭐라도 해야 안 불안해서 써요. 오체투지로 포장하지만, 사실 저를 위한 글이죠.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제 막막함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까지, 저의 글은 계속됩니다. 천천히, 차근차근, 영차영차!